로마를 빛낸 장군들 이전편
1화 - 지연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2화 - 시라쿠사 정복자, 마르켈루스
1. 스키피오의 초기 생애
스키피오의 정식 이름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로서 아프리카누스는 아프리카를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어린시절 그는 섬세하고 지적이며 카리스마가 넘쳤고 자신이 장차 로마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운명이라고 믿었다. 스키피오는 신앙심이 깊었으며 새벽이 오기전에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에 가서 조용히 앉아 있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들이 주신 꿈이 자신의 계획을 인도해 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실제 역사라기보다는 전설이나 신화에 가깝다. 게다가 로마 귀족들 특유의 꾸밈이 들어가 있어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리스 출신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로마인들이 지나치게 미신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이용한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도 똑같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로 그는 BC 218년의 집정관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자 어린 스키피오는 아버지를 따라 출정을 했다. 전시에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가는 것은 그 당시 로마 귀족들의 관습으로 젊은 귀족들이 군 복무 경험을 얻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집정관의 군대는 히스파니아로 이동 중이었는데 한니발이 이미 알프스를 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아버지 스키피오가 형인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히스파니아 전선을 맡기고 자신은 아들 스키피오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BC 218년 11월, 티키누스 강에서 전투가 치뤄졌으나 한니발에게 2,300명의 병력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아버지 스키피오 자신도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스키피오 가문의 전설에 따르면 아들 스키피오가 기병대를 이끌고 나타나 아버지를 구원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버지 스키피오는 부상에서 회복한 이후, 전직 집정관이 되어 히스파니아에 있는 형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그러니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큰아버지) 합류하러 떠났다. BC 216년, 아들 스키피오는 이탈리아에 남아 2군단의 군사 호민관(트리부누스 밀리툼)이 되었는데 2군단은 그 해의 집정관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이끄는 8개의 군단들 중 하나였다. 당시 스키피오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인 아이밀리아와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족 또는 친척이 이끄는 군대 휘하에서 복무하던 젊은 귀족들의 관습의 예시라고 볼 수 있다.
그는 BC 216년 8월 2일, 칸나이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전투는 로마군의 대패로 끝났고 집정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원로원 귀족 80명이 전사했다. 스키피오는 칸나이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패잔병들을 이끌고 도망친 4명의 장군 중 한명이었다. 나머지 3명 중 1명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아들이었다. 칸나이 전투의 참혹한 결과는 로마 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심을 일으켰다. 몇몇 귀족 무리들은 외국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스키피오는 그 무리의 우두머리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머무는 곳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마침 회의를 열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20살의 스키피오는 메텔루스의 방으로 들어가 한 손에 칼을 들고 유피테르 신에게 엄숙한 서약을 맹세하고, 그 맹세를 깨드릴 경우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게 끔찍한 벌이 내려질 거라고 말했다. 서약의 내용이란 자신은 절대로 공화정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며 공화정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스키피오는 그 회의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시켜 자신과 똑같은 내용의 서약을 맹세하게 했다.
칸나이 전투의 패전 이후에도 로마는 계속해서 패잔병들을 수습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칸나이 전투에 참전한 8만 6천명에는 훨씬 못 미치는 1만명에 불과해서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였다. 스키피오는 이런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높은 가문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비르투스(virtus) 즉, 덕(德)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귀족들이 동요를 하는 와중에도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마인들은 패배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어려움에 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시민들, 특히 권력의 핵심에 있는 귀족들은 나가서 용감히 싸워야 했고, 패배 여부와 상관없이 용감히 싸웠다면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용감히 싸워서 패배를 할 지언정 지휘관이 전사하거나 자살을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훌륭한 지휘관이란 명예롭게 싸우다가 전장에서 죽는것이 아니라 패전을 하더라도 잔존 병력을 수습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다음의 전투를 준비하는 지휘관이었다. 기회는 언제든지 다시 주어지기 때문에 한두번 패배하더라도 언젠가는 승리할것이라고 믿었다. 즉, 로마인들이 말하는 비르투스란 어떠한 암울한 상황도 끝까지 견뎌내고 최종적으로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칸나이 전투에서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어떻게든 살아남아 로마로 돌아왔을 때, 원로원은 그를 크게 환영하여 감사를 표했던것이다.
2. 히스파니아 전선으로의 투입과 신 카르타고 포위전

1차 포에니 전쟁 당시의 히스파니아와 카르타고의 세력권.

2차 포에니 전쟁 발발 당시의 히스파니아와 카르타고 세력범위. 스키피오가 본격적으로 투입된 BC 210년경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칸나이 전투 이후 그가 다시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되는것은 BC 210년부터이다. BC 218년에서 211년까지 그의 아버지와 큰 아버지인 스키피오 형제가 히스파니아 전선에서 복무하였으나 그들은 히스파니아 전선에 대한 원로원의 병력과 자금 지원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히스파니아에서의 로마군 전력은 점점 약화되고 있었는데 이 틈을 타서 BC 211년 로마와 동맹 관계이던 켈트 이베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은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스키피오 형제는 중과부적으로 패배해 전사하였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라는 장군이 간신히 잔존 병력을 수습해 히스파니아 북동쪽 만을 겨우 지켜내고 있는 중이었다. 나머지 대부분은 카르타고 측에 투항하였다. 원로원은 카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보내 몇번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전세를 크게 뒤집지는 못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복귀했다.
이제 후임자를 다시 물색해야 하지만 히스파니아 전선은 야심찬 로마의 귀족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는 곳이었다. 히스파니아는 지형이 안좋아 현지 부족들과의 전투를 치르기가 워낙 어렵고 원로원도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을 상대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느라 히스파니아에 대한 지원은 상대적으로 부실한 편이었다.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스키피오가 나섰다. 그는 히스파니아 사령관에 유일하게 출마해서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제 막 26살인 그가 당선되자 수많은 시민들이 과연 원로원의 결정이 옳은 것인가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러자 스키피오는 연설로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스키피오는 이탈리아에서 1만명의 부대를 이끌고 엠포리온으로 갔다. 엠포리온은 히스파니아 북동쪽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이다. 이들은 전쟁 이전부터 로마와 동맹 관계였다. 스키피오의 도착으로 히스파니아에서의 로마군은 보병 2만 8천명, 기병 3천명이 되어 총 3만 1천명의 규모에 육박했다.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의 군대는 총 세개의 부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개별 부대만 따져도 모두 3만명이 넘는 규모였다. 이 부대는 각각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마고 그리고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지휘하는 중이었다. 스키피오는 아버지 스키피오 형제가 BC 211년 당시 패배하여 전사한것이 카르타고군의 뛰어남 때문이 아니라 켈트 이베리아 동맹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 스키피오 형제는 BC 211년, 마지막 출정을 앞두고 켈트 이베리아 동맹군 2만명을 소집했다. 이들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운용했는데, 켈트 이베리아인들은 로마 입장에서 그다지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켈트 이베리아의 병력이 단체로 탈영하는 사태가 벌어져 스키피오 형제는 순식간에 카르타고군에게 압도당하며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아들 스키피오는 이러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엠포리온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서 수비적으로 일관하기보다 적극적인 공세로 분위기를 반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스키피오는 적의 병력 규모, 배치, 주변의 지형 등에 대해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카르타고의 3개의 야전군은 각각 분산되어 있었고 거리도 어느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루시타니아(현재의 포르투갈 지역)의 타구스 강 유역에 있었고 하스드루발은 히스파니아 중부의 카르페타니 마을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마고는 이베리아 반도 최남서부에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는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세 장군 사이의 불화도 심각했다. 거기에 히스파니아의 부족들은 카르타고의 지배에 반감을 점점 더 반감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스키피오가 새롭게 히스파니아로 투입되자 히스파니아인들은 스키피오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많은 부족들이 스피키오와 동맹을 맺거나 군대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스키피오는 철저한 준비를 마친 끝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공격 목표는 히스파니아령 카르타고의 수도인 신 카르타고(Carthago Nova)로 현재는 카르타헤나라고 불리고 있다. 히스파니아령 카르타고에 주둔하는 카르타고의 세 장군들이 아무리 사이가 안좋다고 해도 로마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도 반목할 가능성은 매우 적어보였다. 만약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의 부대 중 하나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실패한다면, 다른 장군들은 그 틈을 타서 즉시 군대를 이끌고 지원을 올 것이다. 그러면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심각한 숫적 열세에 처하게 되고 작년에 그의 아버지 스키피오 형제가 당했던 패배를 그대로 반복하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카르타고의 야전군을 공격하는 대신 가장 중요한 핵심 지역이자 히스파니아령 카르타고의 수도인 신 카르타고를 공격하겠다는 결정을 한것이다.

신 카르타고의 위치. 오늘날에는 Cartagena로 불린다.
신 카르타고는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가 히스파니아 통치를 위해 세운 핵심 도시로서 한니발이 이탈리아로의 진격을 시작한 출발지였다. 카르타고의 도시들은 대개 항구를 끼고 있었지만 신 카르타고의 항구는 히스파니아의 그 어떤 항구들보다도 크고 정비가 잘 되어있었다. 업무 일지는 물론 금고나 귀중품들이 상당량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수의 숙련 노동자와 무기와 장비, 이것을 만드는 수많은 공장, 식량 등이 풍부했다. 즉, 이곳을 점령하면 로마군의 전력은 크게 강화되는 반면 카르타고군의 전쟁 수행 능력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셈이었다. 카르타고 3개의 부대들은 모두 신 카르타고와 최소 10일은 떨어져 있는 거리에 있었다. 신 카르타고에는 소수의 주둔군만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방비가 잘되있는 요새였고 한면은 바다, 또다른 한면은 염수호로 이루어져 있어 좁은 지협을 통해 육지로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스키피오는 고민에 빠졌다. 공성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희생이 크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전투 유형이다. 그렇다고 적게는 몇 주, 많게는 몇개월이 걸릴지도 모르는 공성전을 계속 하고 있자니 적의 지원군이 당도할 판이었다. 딜레마에 빠져있는 스키피오가 한가지 계책을 내었다. 그는 타라코라는 동맹 도시에서 어부와 선원들을 만났다. 이들은 신 카르타고의 주변을 항해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에게서 도시의 주변 지형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었다. 호수의 어느 지점에서는 걸어서도 건널 수 있고 저녁에는 수위가 더 떨어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호수를 건너 도시의 북쪽 성벽을 넘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튼 스키피오는 이러한 정보들을 입수하고 그 해 겨울을 주변의 동맹 도시들을 순찰하면서 보냈다. BC 209년 봄이 되자 스키피오는 동맹국을 방어할 3천 5백명의 병력만을 남겨두고 에브로 강 어귀에 모든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병력을 나누어 35척의 갤리선에 태우고 부관인 라일리우스의 지휘 하에 신 카르타고로 가게했다. 이들은 스키피오의 본대와 신 카르타고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신 카르타고에는 북쪽의 염수호와 남쪽의 바다가 서로 운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폴리비오스가 직접 가서 확인했다고 주장한 바에 따르면 성벽은 둘레가 약 4km에 달하고, 5개의 언덕이 있었다. 수비대의 사령관은 마고(위에 언급한 마고와는 또 다른 인물)인데 정규군 1천명과 민간인 남성 2천명을 징집해 총 3천명의 동원하여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반면, 스키피오의 병력은 10배가 넘는 3만 5천명에 육박하였다. 전투에 앞서 스키피오는 부하 장수와 병사들에게 이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전공을 세우는 자들에게는 넉넉하게 보상을 할 것이며, 특히 처음으로 성벽을 오르는 자에게 성벽 모양의 금관(corona muralis)을 하사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꿈에 바다의 신인 넵투누스(그리스의 포세이돈 신에 해당)가 나타나 우리를 도와줄것이라 약속했다고 선언했다.

신 카르타고를 재현한 모습

신 카르타고의 주변 지형으로 북쪽으로는 염수호, 남쪽으로는 바다로 둘러쌓여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스키피오는 병력을 3개의 경로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동쪽 -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 본진. 지도에서 동쪽으로 향해 있는 방향이 성의 정문이다.
남쪽 - 라일리우스가 이끄는 35척의 갤리선 함대
북쪽 - 야간에 석호의 수위가 내려가자 500명의 소규모 별동대를 보내 공격을 감행해 성벽을 점령하고 성문을 포위함
다음날 오후 3시, 로마군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남쪽의 바다에서 라일리우스의 함대가 항구로 진입하여 공격을 시도했고 동쪽에서는 스키피오가 2천명의 선발대를 내보내 사다리를 운반하는 병사들과 함께 진격하였다. 카르타고의 마고는 정예병들을 성 남쪽에 있는 언덕으로 보내 항구로 진입하는 라일리우스의 병력을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민병대의 대부분은 동쪽의 정문에 집중시켰고 나머지는 성벽의 둘레에 분산시켜 적에게 퍼붓을 발사무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겼다. 스키피오가 나팔을 불자 동쪽의 2천명의 선발대가 진격하여 성문과 점점 가까워졌다. 카르타고의 마고는 로마군이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성문을 열고 무장을 한 민병대를 돌격시켰다. 이것은 고대 공성전의 특징 중 하나인데, 바로 수비하는 측이 요새를 벗어나 바깥의 평지에서 공격군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적의 본격적인 공격을 지연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게다가 동쪽의 육로는 매우 좁은 지협이었기 때문에 로마군은 한번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가 어려웠다. 카르타고의 2천명의 병사들이 로마군 선발대와 가까워지자, 스키피오는 선발대를 뒤로 후퇴시켰고 카르타고군은 뒤를 쫓았다. 양측의 병력은 결국 성문으로부터 40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맞붙었다. 스키피오가 선발대를 약간 뒤로 물리게 한 이유는 카르타고 수비대 중 뛰어난 병사들을 먼저 제거해버리기 위함이었다.
처음에는 대등한 듯이 보였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선발대가 싸우는 광경을 보고 뒤에 있는 병사들은 자기편을 응원하는 함성소리를 질렀다. 스키피오는 고지대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전투를 감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발대들이 싸우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또 다른 부대를 대기시켰다가 전선에 투입했다. 반면에 절대적인 숫적 열세에 놓여있던 마고는 선발대에 뒤이어 투입할만한 예비 병력이 거의 없었다. 카르타고의 선발 부대는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로마군의 압력이 점점 더 강해지자 카르타고군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이 모습을 보자 성벽을 지키는 카르타고의 병사들이 동요하였다. 수비대가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본 스키피오는 즉시 사다리를 투입시켜 성벽을 오르게 했다.
스키피오 자신도 직접 그 현장으로 갔으나 그는 마르켈루스처럼 최전방에서 칼을 들고 진두지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몇 명의 병사들을 시켜 거대한 방패로 자신의 몸을 가리게 하고 병사들의 근처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전투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전장에서의 세부적인 사항에도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한편, 용맹한 병사들을 직접 목격하여 넉넉하게 포상을 해줄 수 있었다. 지휘관이 직접 병사들을 지켜봄으로써 병사들은 사기를 유지하며 사력을 다해 싸웠다. 이것은 이후의 로마 군사령관들이 전투를 지휘하는 대표적인 방식이 되었다.
그러나 적이 방어하고 있는 성벽을 오르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의 혼란을 틈타 로마군은 성벽에 사다리를 놓았다. 그러나 사다리들 중 일부는 병사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고, 일부는 카르타고 군이 밀어서 넘어뜨렸으며, 일부는 너무 짧아 성벽위까지 닿지 않았다. 시라쿠사 전투에서 마르켈루스가 성벽 한 지점의 돌의 개수를 세고 크기를 짐작해 그것을 바탕으로 사다리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이런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였다. 로마군은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부터 계속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카르타고의 수비대는 투석기로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쏟아부었다. 로마군은 여전히 도시 안으로 진입하지도 못한채 사상자만 쌓여갔다. 결국 스키피오는 부대를 퇴각시키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그날 저녁이 되자 타라코의 어부들이 말한것처럼 북쪽 석호의 수위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석호의 물결이 잠잠해지자 스키피오는 5백명의 별동대를 직접 이끌고 석호의 가장자리까지 갔으나 공격까지 몸소 지휘하지는 않았다. 별동대가 호수를 건너 별 어려움 없이 성벽에 도착했다. 직접 와보니 북쪽 방벽에는 별다른 보초병도 없을 정도로 경계나 방어가 허술했다. 로마군이 북쪽의 석호를 건너오리라고는 미처 예상을 못해 북쪽에는 수비 병력을 배치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북쪽의 성벽은 높이가 얼마 높지 않았기 때문에 별동대는 손쉽게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랐다. 별동대는 북쪽의 성문을 장악하고 성벽을 따라 곧바로 동쪽에 있는 정문을 향해 나아갔다. 가는 도중에 수비대 몇 명을 마주쳤으나 쉽게 몰아냈다. 그들이 보유한 긴 방패와 짧은 단검은 성벽과 같은 좁은 공간에서의 싸움에 최적화된 장비였다.
한편, 동쪽에 있는 로마군 본대도 별동대가 정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들은 즉시 공격 준비를 마치고 다시 성벽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테스투도 진형(한 무리의 병사들이 방패를 이용해 거북이처럼 부대 전체를 감싸는 진형)을 펼쳐 성문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앞줄의 도끼를 든 병사가 성문의 목재 부분을 마구 찍어내렸다. 그 사이에, 정문으로 접근한 5백명의 별동대도 카르타고 수비대를 배후에서 공격했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은 카르타고 수비대는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성문은 양쪽에서 내려찍는 도끼로 인해 파괴되었고 나머지의 병사들도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랐다. 이 무렵 라일리우스의 함대도 사다리를 동원해 항구 근처의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성은 곧 함락될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방심은 금물이었다. 아직 마고의 휘하에 1천명의 정규 병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도시들은 건물들 사이사이에 매우 좁은 도로들이 뻗어있어 마치 미로와 같았다. 그래서 수비대가 도시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공격군의 지휘관은 부대를 통솔하는데 애를 먹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문에 성벽이 무너졌다 하더라도 수비측이 추가 병력을 동원할 경우 공격군을 몰아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스키피오도 이러한 상황을 우려해 부대를 직접 지휘하기 위해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로마 병사들은 좁은 거리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때의 광경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병사들이 마을을 점령하면 사람의 시체뿐만 아니라 몸의 절반이 잘린 개, 갈기갈기 찢어진 동물들의 사지를 볼 수 있었는데, 이번 전투에서는 그 장소에 있는 병사들의 수가 매우 많았던 탓에 그러한 광경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라고 적었다.
마고는 결국 항복했다. 로마군은 성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나팔을 불어 병사들에게 성안을 약탈하라는 신호가 떨어졌다. 각 보병 중대들은 모든 지역을 약탈하여 전리품을 가지고 시장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호민관이 감독했다. 전리품들을 전부 로마군을 따라다닌 상인들이나 아니면 지역 주민들에게 경매로 팔아치워 수익을 확보하고 병사들에게 계급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수익을 분배하는것보다도 더욱 어려운 것은 훈장을 수여하는 일이었다. 열병식을 하는 동안 육군과 해군 사이에 누가 먼저 성벽을 올랐는가하는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고 심지어는 폭력 사태로 치달을 정도였다. 스키피오는 해군의 섹스투스 디지티우스와 육군 4군단의 백인대장인 퀸투스 트레벨리우스가 동시에 성벽을 넘었다고 판정하여 두명 모두에게 성벽 모양의 금관을 수여했다.
신 카르타고의 점령으로 히스파니에서 로마와 카르타고 양측의 세력 균형에 엄청난 균열이 생겼다. 스키피오는 수많은 투석기와 18척의 군함을 새로 건조했고 포로로 잡은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함선의 선원으로 근무하게 하여 상당한 병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히스파니아 현지의 귀족 인질로 300명을 잡았다. 특히 귀족 여성들에게는 특별히 예우를 갖춰주었는데 중간에 부모에게 돌려보내주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가 인도적인 차원이었든 정치적인 차원이었든 결과적으로 히스파니아의 수많은 부족들이 로마에게 우호적인 자세로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다.
스키피오는 신 카르타고를 남부 스페인의 기지로 삼고 엄청난 식량이나 자원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추가적인 전투를 준비하는데도 자급자족 형태로 하였다. 또한 오랜 전쟁을 거쳐 그의 병사들도 크게 단련이 된 상태였다.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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