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녀 씨 보고서 올렸어요?"
"아직요..."
"줘 봐요. 어디까지 썼어요?"
처음 올리는 보고서라 잔뜩 풀이 죽어 있었는데, 입사 동기인 박지민이 도와 주겠다며 자기 자리에서 의자를 이만큼 끌어와 옆에 앉았다.
"진짜 잘 썼다."
"진짜요?"
"응. 내 보고서 엄청 꿀리겠다."
입사 동기인 박지민 씨와는 나이도 같고 새로 들어온 신입이 딱 우리 둘 뿐이라서 회사 밖에서 연락도 하며 자주 만난다. 그래도 직장에서 만난 사이라 완전히 말을 놓진 못 하고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쓰는데, 상사들이 말을 편하게 하는 꼴을 못 봐 지민 씨의 말에 누가 들을까 싶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누가 우리 얘기를 들어요."
"들을 수도 있잖아요......"
"들으라고 해. 뭐, 우리가 사내 연애라도 하나?"
"네?!?!"
"아, 농담이에요 농담. 제 말은 이거잖아요. 친구끼리 말 좀 놓으면 뭐가 어떻나. 네?"
"네 알죠 알아요......"
내가 네??!?! 하며 큰 소리를 내는 탓에 회사 직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리는 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지민 씨도 고개를 살짝 들어 주위를 둘러 보고는 의자를 끌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이제 남은 업무를 처리하려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이었다.
"오늘 회식이니까, 불참하는 인원 없도록 해요!"
"아......"
꿀 같은 불금에 회식이 웬말이야. 오늘 집에 돌아가 밀린 드라마를 보며 치맥을 먹으려고 했던 내 생각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아무도 듣지 못 하게 한숨을 살짝 내쉬며 옆을 봤는데,
해탈한 듯 웃는 지민 씨가 보였다. 지민 씨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회사 직원들끼리 사용하는 메신저가 울렸다.
[박지민 : 게녀 씨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발신인을 확인하고 당황하여 메신저 쪽지창을 닫았다. 옆에서 지민 씨가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곧 사라지고 타자 치는 소리만 울리기 시작했다.
여섯 시가 되었다. 알람을 맞춰 놓아 주머니 안쪽에서 진동이 계속 울리지만, 기쁘지가 않다. 회식이라니......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결국 신입인 나는 변명 한 번도 못 하고 회식 자리에 끌려다녔다. 건배! 건배! 건배! 위하여! 파이팅! 소리를 몇 번을 들었는지...... 다행히 옆에 앉은 지민 씨가 몰래 내 잔의 소주를 버리고 물로 채워 줘서 취하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 3차는 노래방이구나.
"김게녀 씨, 나와서 춤이나 한 번 춰!"
"네?"
"왜 춤을 시키고 그러세요."
"빨리 나와! 신입 춤이나 한 번 보자!"
"저 저기 과장님, 제가 정말 몸치여서......"
"노래 부를래, 춤 출래?"
"제가 추겠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지민 씨가 벌떡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과장님의 표정이 좋지 않아 어떻게 되는 거 아닐까 싶어 불안한 눈빛으로 과장님과 지민 씨를 번갈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춤이 끝났을 때 과장님의 표정은 밝았고, 귀엽지만 잘 추기까지 해 직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지민 씨가 춤을 다 추고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그 한숨이 나 때문인 것 같아 심장이 쿵쿵 뛰었고, 노래방의 어두운 조명과 시끄러운 소리들에 내 목소리가 묻힐 것 같아 지민 씨의 귀에 대고 고마워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지민 씨가 예쁘게 웃음 지으며 내 귀에 아니에요. 하고 말했다.
그렇게 회식이 끝났고,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 씻고 몸을 눕혔다. 지민 씨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월요일이 되었고,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오늘이 보고서 내는 날이었지. 주말 내내 고친 첫 보고서를 제출하러 팀장님 책상으로 향했다.
"저기 팀장님."
"네. 게녀 씨. 기다렸어요."
"여기 보고서입니다."
팀장님은 보고서를 꼼꼼하게 살펴 보시더니, 좋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처음 쓴 티 너무 난다."
"아......"
"게녀 씨는 보고서 쓰지 말아요."
"그래도 고칠 점을 알려 주시면 제가 더......"
"농담이에요 게녀 씨."
"아 네...?"
"농담이에요. 진짜 잘 쓰셨어요. 처음 맞아요?"
"네...... 주말 내내 고쳤어요 진짜!"
"그랬어요?"
자기가 더 뿌듯하단 표정으로 바뀐 팀장님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이 문장을 더 자연스럽게 잇는 방법을 알려 주셔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휴대폰을 켜 메모장에 적어나갔다.
핸드폰을 힐끔 본 팀장님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물었다.
"메모장에 적는 거예요?"
"네...... 다음엔 더 잘 쓰려고......"
"뭘 적고 그래요, 귀엽게."
"적으면 더 기억하기 쉽잖아요!"
"알겠어요, 그럼 적어요 적어."
팀장님이 알려 주시는 팁들을 메모장에 고스란히 적고 있었는데, 어제 회식 자리에서 나에게 춤을 시켰던 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녀 씨! 커피 한 잔만 타와!"
커피를 타 오라는 말에 팀장님이 말을 멈췄고, 나도 죄송하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팀장님께 잠시만요. 하고 탕비실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러자 팀장님이 아랫 입술을 꽉 물더니 일어났다.
"과장님."
과장님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탕비실로 향했다. 아,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왜 이런 건 여자한테만 시키는 거야? 성차별 심하다 심해. 조금만 더 지나 봐, 내가 타다 주나. 입으로 조그맣게 궁시렁대며 머리론 과장이 블랙이었나 믹스였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과장님이 커피는 됐다는데요?"
"아 깜짝이야!"
어느새 옆으로 와 웃고 있는 팀장님 때문에 깜짝 놀라 쓰러질 뻔했다. 내가 말한 거 다 들었으면 어떡하지. 헐, 안 되는데. 회사 짤리게 생겼네...... 세상아 잘 있어라......
"제가 커피 타 드릴게요 게녀 씨."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얼굴에 미소를 띈 채 팀장님이 말을 걸었다. 상사가 커피를 타 주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하고 있어야 될지 몰라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있었다.
"아 진짜, 그 손은 뭐예요."
커피를 타다가 날 슬쩍 보더니 또 웃기 시작하는 팀장님. 아, 그냥 제가 탄다고요. 눈치 보여 죽겠네.
"그럼 팀장님 건 제가 타 드릴게요!"
"아 됐어요. 원래 상사가 타는 거예요."
"과장님은 왜 ㄱ..."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과장님 얘기에 놀라 말을 멈추고 놀란 토끼 눈으로 팀장님을 바라 봤다. 김게녀, 너는 인생 입으로 망하겠다. 팀장님은 날 놀리는 건지 정말 놀라신 건지 입가에 웃음을 띈 채로 덩달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죄송합니다......"
"게녀 씨는 죄송할 것도 많아요 진짜. 안 말해요. 걱정 마요."
"네 감사합니다......"
"아까 들은 것도 비밀로 해 줄게요."
"헐. 들으셨어요?"
"네. 우리 비밀 생긴 거예요 게녀 씨."
"네......"
그렇게 순탄한 듯 순탄하지 않은 듯 순탄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어느 주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게녀야, 나 일하는 곳으로 올래?]
[응? 나 거기 떨어졌잖아.]
[친구 좋다는 소릴 왜 하냐!]
[무슨 소리야......]
[한 명 다시 뽑는데, 내가 너 추천했어. 너만 동의하면 돼.]
[허얼...... 진짜!?]
[응! 잘 생각해서 내일까지 연락 줘.]
친구가 다니고 있는 직장은 내가 정말 일하고 싶었던 회사이다. 페이는 비슷비슷하지만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은 솔직히 적성과 전공에 맞지 않을 뿐더러 과장 새끼 얼굴은 더 보고 싶지도 않다. 원래의 나라면 생각할 시간도 가지지 않은 채 바로 알겠다고 답을 했을 텐데, 모르겠다. 뭐가 이렇게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건지. 뭐가 아니라 누구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이 되어 일단 출근을 했다. 지민 씨는 월차를 써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팀장님은 월요일이라 밀린 업무 때문에 바쁘신지 시종일관 굳은 표정이었다. 에이, 뭘 이리 고민하냐. 그냥 그만두고 가자.
지민 씨에게 문자 한 통을 넣었다.
[지민 씨, 저 제가 가고 싶었던 회사로 가게 되었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팀장님에게도 말해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님의 자리로 향했다. 정말 바빠 보여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팀장님."
"네 게녀 씨."
팀장님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날 바라보며 말하라는 듯한 눈빛을 주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저. 회사 옮겨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팀장님."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게녀 씨. 아,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게녀 씨, 저 게녀 씨 좋아해요. 더 오래 보고 싶어요. 게녀 씨를 더 알고 싶어요. 가지 마세요."
"비밀 하나 더 만들어요 우리. 사내 연애 어때요?"
누군가 내 손을 덥썩 잡아 놀란 토끼눈으로 옆을 바라 봤다. 지민 씨였다.
"게녀 씨 가도 돼요. 되는데, 저랑 연애하면 안 돼요? 아니, 그냥 가지 마요. 가지 말고 내 옆 자리에 있어요."
1 지민 vs 2 박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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