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일곱, 교복을 입은 순간 부터 이어져 온 탈선.
난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길 즐겨한다.
밤거리를 나도는 삶. 부모님은 나를 포기한지 오래이다.
이도 저도 아닌채 방황하는 나날의 연속들.
"심심한데 우리 한건 크게 해볼래?"
어느날 생각없이 따라나섰던 자리.
야구배트로 자동차 유리창을 깨부수는 그들의 모습에, 난 크게 당황하고 만다.
기껏해야 편의점에서 물건 몇개나 집어나오자는 줄 알았더니.
와장창여기저기 유리조각이 흩어지고 곧 요란하게 경보음이 울려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순간,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야, 튀어!"
누군가의 고함에 흩어지는 무리들.
그러나 어설프게 도로를 뛰어 도망치던 나는,
얼마 못가 경찰에게 붙잡히고 만다.
..비뚤어진 학창시절의 초입,
여시가 만난 남자는 누구일까?
1.
보호관찰을 받게 된 여시와,
그런 여시에게 붙여진 상담교사
사고를 친지 일주일. 난 결국 보호관찰을 받게 되었다.
내게 붙여진 상담교사. 난 정기적으로 그를 만나 상담을 받아야만 한다.
상담, 반성문, 보고서... 난 모든것이 귀찮기 짝이 없었다.
대충 대충 하면 되겠거니 했으나, 일찍이 나보다 먼저 경험이 있는 친구들은
내게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며혀를 찬다.
"그 상담사? 진짜 깐깐하게 구는 인간인데.운도 없지,너 진짜 잘못걸렸다."
엄격하기로 유명하다는 남자. 그러나 그들이 평가서를 써주기 때문에,
이후에 조금이라도 더 편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잘 보이는 수 밖에는 없었다.
심각한 표정의 내게 친구가 살짝 귀뜸을 해 온다.
"근데 또 몰라. 나이도 젊구 하니까,네가 치마만 좀 걷어올려 보면 될지도.
시도나 한번 해봐."
그러나 남자를 만난 첫날. 난 결코 그러한 얄팍한 술수가 통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한눈에 깨닫는다.
딱딱한 원리원칙주의자의 얼굴. 사무적인 목소리, 내 태도가 어찌되었건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는 내 앞에 쓱 종이를 내민다.

"거기다 써."
난 왠지 약이오른다. 잘 보여야 한다고? 그러나 반항심이 먼저였다.
난 씹던 껌을 뱉어다가 그가 준 종이에 진득하게 붙여버린다.
그리고 보란듯이 그의 면전에 대고 종이를 팔랑였다.
그러나 그저 그것을 지그시 쳐다보기만 하는 남자.
난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약간 당황하고 만다. 그런 내게 그가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화라도 내줄까."
"....."
"이런 식으로, 이런 유치한 반항으로밖에 소통할줄 몰라?"
그는 미소짓더니보란듯이 내 손에 들린 종이를 쓰레기처럼 구겨버린다.
그리고 그대로 내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날 화나게 하고싶으면, 더 노력해."
장난이나 조금 쳐 보려 했던것이, 난 진짜로 욱 해버렸다.
난 그에게 툴툴 대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유치한 장난이 이어진다.
책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거나,자동차 열쇠구멍을 본드로 채워놓는다거나, 하는 것들.
그러면서도난 그가 내 행동을 단순히 치기어린 반항정도로 치부하는것이 왠지모르게 약이 올라,
그가 내준 과제 같은것은 기를 써서라도 성실하게 해 갔다.
다만 내용까지 그가 원하는대로 따른다는것은 또 싫은 생각이 들어
욕설이나 남자애들이 는 아주 상스러운 말들로 종이를 가득 채워넣곤 했다.
그럼 그는 그걸 내 앞에서 보란듯이 읽어내려갔다.
XX같은 선생, X를 XX해서XXXX, 등등.....
그가무표정으로, 부드럽고 깔끔한 어조로 그것을 읽을 때면,
난얼굴이 화끈거리는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쓸 때는 분명 아니었는데,
남의 입으로 듣는 내 글이 그렇게 유치하고 형편없을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때때로 감상평도 덧붙였다.
"진부한걸. 어휘력도 형편없고.
매번 똑같은 욕밖에 못하는건,네 단순하기 짝이없는 머리의 한계인가?"
..이쯤이면 정말로 열이 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난 슬슬, 이 남자가 날 상담으로 개선시키고 싶은건지,
아니면 더 분노에 가득찬 학생으로 만들어 사회에 내보내겠다는건지 모르게 되었다.
동시에 난 그가 나에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항상 상담이 끝날 때 즈음, 무언가를 적은다음 봉투에 넣어 고이 서랍에 보관하곤 했다.
뭘 적는걸까. 형편없는 계집애라고? 구제불능, 꼴통, 아니면... 난 망설이다,
결국 하루는 점심시간 그가 자리를 비운 새를 노려 상담실 안으로 살금 들어온다.
서랍안을 뒤져 마침내 포획물이 손에 걸린다. 난 왠지 긴장되는 마음으로 그걸 열어보려는데,

"뭐가 궁금한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난 화들짝놀라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난, 그냥 뭐가 있나 해서..."
"내놔."
단호한 한마디. 눈치 보며 건네주려던 난 그러나 뚝 멈춰섰다. 반항심이 또 불쑥 고개를 든 탓이다.
잠깐 망설인 난 에라 모르겠다 그냥 종이를 그대로 내 브래지어 안에다 구겨넣어버린다.
"싫어."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에 그가 푹 한숨을 쉬더니, 성큼 다가온다.
화났나? 난 약간 찔끔하여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덥썩 내 어깨를 잡는 손길.
그러더니 대뜸 쑥 차가운 손이 내 옷 안으로 들어온다. 난 기겁하여 펄쩍 뛰어올랐다.
이 변태, 소리지르려다가, 순간 난 그와 눈이 마주친다. 어, 말문이 막혔다.
혓바닥까지 딱 치켜올라오던 목소리가 어물대며 기어들어간다.
훅 끼쳐오는 그의 애프터쉐이브 향과, 진중한 표정.
"재미있어?"
그가 조용히 말한다. 그의 손은 아직도 내 옷 안에 있었다. 그러나 더듬기는 커녕 그대로 움직이지조차 않는다.
다만 난 그의 차가운 손등이 아슬아슬하게 내 명치부근의 맨살을 스치고 있는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냉기에 반응하듯 온몸의 털이 오소소 곤두선다.
"나랑 이러는거."
그 순간 스르륵 종이와 함께 손이 빠져나간다.
그는 그대로 내게서 한발짝 떨어지고는, 팔짱을 끼더니, 날 지그시 바라본다
"그래. 언제까지 마냥 재미있을것 같아? 응?"
"......"
난 어째서인지 아무말도 하지 못했고,
그는 그저 눈빛으로만 난 꾸짖다가 자리를 떠나버린다.
그 이후로 난 약간 기가 죽어버리고야 말았다.
어쩐 일인지 계속 그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한풀 수그러든 내 모습에
그가 더 기세등등 해졌다던지, 혹은 더 너그러워졌다던지 하는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전과 다를바 없이 똑같이 무심하고, 똑같이 퉁명스러웠다.
"눈좀 붙일테니까 알아서 써 놔."
장맛비가 쏟아지던 어느날 인가는,
뭔가 피곤한 듯한 기색으로 몇번 하품을 하더니 책상위에 엎드려 잠을 청하는 남자.
난 시킨대로 글을 써내려 가다 그를 흘끔 본다. 한쪽 팔 뻗은채, 책을 한권 베고는 곯아 떨어진 그.
고르게 색색거리는 소리가 곧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 단정한 눈매를 보고 있는데, 목이 간질간질하니....

난 그래서 결국 몇번이고 망설이다가 손가락을 조심스레, 형광등에 반짝이는 그의 솜털로 가져갔다.
무덥게 내려앉은 여름의 공기. 그의 피부는 습도 때문인지 약간 차갑고, 끈적이고, 붉은기를 띄고 있다.
그의 어깨부터 손목까지, 닿을 듯 말듯 조심스럽게 더듬어 내려가던 새끼손가락이
마침내는 살짝 굽어저 있는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닿는다.

난 그의 손가락을 펴고 손바닥을 마주대어 본다.
그의 손은 내것보다 한참이 더 컸다.
그 때, 난 이미 그가 일어나 있다는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멎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고, 그 또한 어째서인지 날 멈추지 않는다.
난 마른 침을 한번 삼킨다.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서서히 손가락이 얽혀든다.
그는 여전히 엎드린채로 반응이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더 서로의 마디가 맞닿은 손가락이 죄여들고.
나는 이유모를 흥분으로 몸을 떤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그 순간,
갑자기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난 깜짝놀라 손을 놓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내게서 등을 돌린채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등이 씩씩거리고 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싶었으나, 난 몇번이고 달싹거리다 말을 걸지 못했다.
도무지 무슨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한번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이내 날 한번 돌아보지도 않은채 쾅 문을 닫고는 상담실을 빠져나가 버린다.
..빠르게 멀어지는 발소리.
그 이후로 그는 단 한번도 날부르지 않았다.
찾아가도 상담실의 문은 굳게 닫혀져 있을 뿐이다.
잘된 일 아닌가? 귀찮기만 했을 뿐인데.
그러나 한편으로, 난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 했다.
그리고 어느날,
또다시 이유없이 잠겨진 상담실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난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다.
[그래서, 어떻게 지내? 좀 잘 풀려 가?]
"응. 그냥......"
난 침울한 목소리로 안부를 전한다. 왜? 하고 그녀가 물어오는그 순간.
갑자기 바싹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여기서 핸드폰 쓰는거 금지랬지."
난 놀라서 확 고개를 돌리는데, 그 순간 수화기에서 크게 튀어나오는 목소리.
[그래서. 꼰대 꼬시는건 어떻게 되가냐? 그 상담사 말야!]
그는 그 말을 들었음이 틀림없었다. 난 새파랗게 굳어버렸다.
아니, 아니에요. 난 그런게. 난 떠듬거린다. 눈치없는 친구는 여전히 뭔가를 크게 주절거리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 화가 났을거야. 다가오는 손에 질끈 겁을 먹는데
그는 그저 서서히 내려가는 내 손목을 꽉 잡고는, 오히려 수화기를 내 입에다 대어다 준다.
"뭘 망설여?"
그가 날 내려다보고, 난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는 전혀 화를내고있지 않았다.
아프게 내 손목을 죄이던 손이 서서히 올라와 내 손에 얽혀든다.
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닿을듯 말듯한 거리에서,
"너도 알잖아."
그가 아주 작게 속삭인다.
그러나 내가 그 다음말을 들을 때 즈음
우린 이미 핸드폰은 안중에도 없었다.

"성공적이라고 해.
그 꼰대, 이미 옛적부터 넘어온지 오래라고..."
2.
정학을 받게 된 여시와,
자폐증을 앓고있는 옆집 아이
사고에 대한 처벌로 돌아온 것은, 2주간의 정학.
우습게 생각했던 난, 3일만에 몸이 근질근질 하여 견딜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있을 시간. 시간이 어찌나 더디게 가는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없을까 싶어 밖을 기웃거리던 나는
옆집 커다란 정원 구석에 쪼그려 앉은 등을 발견한다. 작은 동물처럼 왜소한 체구.
또래처럼 보이는 얼굴에 쟤도 정학먹었나, 하는 생각을 하던 나는 곧
그가 동네에 소문 자자한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중간에 그만두고, 오로지 집 안에만 박혀 살고 있다던 그 아이.
부모가 근방에서 소문이 자자한 성공한 사업가 였기 때문에
더더욱 소문은 크게 부풀려져 있었다. 듣기론 무슨 증후군인가, 정신병이 있다던데.
정원 울타리로 다가간 난, 생각없이 그에게 대뜸 말을 건다.
"야, 너 진짜 정신병있어?"
잠시 날 올려다보는 새하얀 얼굴. 한참 후에야 대답이 돌아온다.
"아니."
"그럼? 너 머리가 좀 이상하다고 들었는데."
"아냐. 난 그냥... 적응하는게 느려."
화를 낼 만한 무례한 질문에도 그는 그저 침착했다.
난 그에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한다.
"아무튼 위험한게 아니라는거지? 그럼 너네 집에서 놀아도 돼?"
사실 그와 놀고싶다기 보단 그 번쩍이는 대궐같은 집을 구경하고싶은 마음이 컸다.
부잣집 문턱이나 한번 밟아보자 싶은 심정. 그는 또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말없이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난 그것이 무언의 허락임을 알아차린다.
"진짜 헉소리 나오게 좋네."
난 감탄하고야 만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집 이었다. 대리석 바닥에, 번쩍거리는 장식물들.
넋이 나간 내 뒤에서,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집에 친구를 데려온건 처음이야."
난 그의 말이 우스워서 피식 웃는다. 몇분전에 만나놓고 친구라니?
난 동네에서 바보소리 듣는 그와 말이 통할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나 떼울 겸, 뭐 얻어먹을것이 있을까 하고 와 본 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날부터 뺀질나게 그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난 그의 부모님이 집을 비운 시간에만 그곳을 찾았다.
냉장고도 벌컥 벌컥 열어젖히고, 그의 옷장도 엉망으로 뒤집어 놓곤 했다.
그래도 그는 내게 주의 조차 주지 않는다. 진짜 바보인가보네. 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 처럼 모자란 아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놀랄 만큼 똑똑하다는 것이 맞았다. 그가 읽는 책들은 난 표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고,
방 안에 온통 나붙은 글과 표식들은 내가 평생 듣도보도 못한것 이었다.
난 하루는 의아해 물었다.
"공부도 잘하는데 학교는 왜 안가?"
내 말에 그는 잠시 날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나한테 필요하지 않으니까."
"뭔소리야? 너희 부모님 돈도 많잖아. 그럼 막 수영장 있고 그런 학교 가지 않나?"
"내겐 여기가 학교야."
난 그저 이해 못할 괴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난 그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아주 폐쇄적이고 말수도 적었지만, 내가 끈질기게 말을 붙이면
꼭 몇마디라도 대답을 하곤 했다.
언젠가부터 그와 노는것은 지루한 일상의 유일한 재미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려운 수식이나 복잡한 도표같은것도 척척인 주제에
인간관계나 대화 같은것에는 정말 요령이 없었다.
그는 돌려말하는 법도 몰랐고, 그래야 하는 필요성조차 이해를 못했다.
조금의 꾸밈도 없는 그의 말들. 난 그런 그의 순수함이 제법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야. 오늘 날씨도 좋은데 밖에 나가자."
".....싫어."
드물게 쨍쨍한 햇볕이 뜬 어느날.
신이 난 나는 그에게 들떠 말했으나, 그는 흘끔 창밖을 보더니 단칼에 거부한다.
아, 그래 너 참 히키코모리라고 했지. 난 곰곰히 생각을 해보다, 그를 집 안에서 한번 꾀어 내 보기로 한다.
먹을것을 사준다고 꼬셔보기도 하고,
공놀이를 하자, pc방에 가자, 딱 문 앞 까지만 나가보자 등등...
하다하다 안되니 슬슬 열이 오른 나는 아예 그의 옷을 잡아다 문 앞까지 질질 끌어냈다.
그는 갖은 인상을 다 쓰며 고집스럽게 뻐팅겨댔다.
".....싫다니까."
"아 그럼 진짜 여기까지만 나와봐, 어?"
내 손에 소마냥 끌려오던 그는, 문턱을 딱 넘은 순간 갑자기 격하게 버둥거리더니,
아예 훌렁 티셔츠를 벗어버리고는 쿵쾅거리며 뛰쳐올라가 버린다.
난 그가 남긴 허물을 든 채로 벙 쪄있다가 그를 따라 방으로 올라갔다.
"야... 삐졌어?"
책상위에 웅크린채 옴짝달싹 않는 그.
난 내가 좀 심했나 싶어, 아이 어르듯 조심스레 말을 건다.
"미안해. 이제 안그럴게."
"........."
그래도 대답이 없다. 난 부드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움찔 몸을 떤다.
꼭 작은 동물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난 살살 그의 맨 등을 쓰다듬었다.
"응? 얼굴좀 들어봐."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문득 나는 그의 목덜미 새빨갛게 익어있다는것을 눈치챘다.
알레르기라도 있나? 그것을 주의깊게 바라보던 내가 마악 손가락 가져다 대는데,
뒷목의 솜털이 조금 스치는 순간, 그가 데인 듯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난다.
나도 덩달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드러난 그의 얼굴이 귀끝까지 터질듯이 시뻘갰다.
".... 옷 줘."
"뭐야? 왜그래?"
"옷. 달라고."
그는 아예 내 손에서 티셔츠를 빼앗듯이 채어간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더니, 이제는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버린다. 영문을 모를 일 이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내게 조금 이상하게 굴기 시작했다.
날 흘끔흘끔 보다가, 시선을 마주치면 홱 피해버린다거나 하는 식 이었다.
혹은 내가 말을 걸거나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꼭 놀란 토끼같은 눈을 하고는 움찔거렸다.
그는 마치 내게 아주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내가 알아차리지 않게끔 하는것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신경이 쓰이지 않는건 아니었지만,
그가 그런 이유모를 행동을 하는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기에
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날,
방 구석에 함께 쪼그려 앉아 영화를 보던 우리.
영화는 제법 로맨틱한 내용으로, 난 완전히 머리끝까지 영화의 내용에 심취해 있던 찰나였다.
곧 두 연인이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비춰지고
그것을 이상하리만치 눈여겨보던 그가 눈을 꿈빡이더니, 대뜸,

"우리 이거 하자."
난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짜증스럽게 맞받아친다.
"야, 뽀뽀는 아무때나 하는거 아니야. 분위기 맞춰서 하는거야.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그게 언젠데?"
"그거야 본인들이 알지."
난 여전히 영화에 몰입해 있다.
그러자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난 지금 그럴 분위기인데."
뭐, 난 웃기고 있네 하고 비웃어주려, 난 그를 향해 홱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그 순간 난 대번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노트북 화면만 희미하게 비치는 방 안, 날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무섭도록 선명하다.
난 할말을 잃은채 얼어붙었다. 그가 원래 이런 얼굴 이었던가?
난 그의 눈매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롭고, 딱딱한, 남성스러운 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갑자기 우리가 앉은 공간의 틈이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하기 시작한다.
그가 조금만 기울여 온다면 곧장 내 어깨에 닿을 듯한 거리. 난 목이 뻣뻣해졌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듯이 얌전하다.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시선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한참 후에야 난 천천히 몸을 뒤로 빼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경직된 말투로 이야기했다. 아니. 지금은, 아니야.
그러자 그는 아주 조용히, 그럼 언제? 하고 묻는다.
왜 인지 가슴 밑이 울렁거린다. 삐질거리며 말을 더듬던 난 결국 나도 모르게 눈을 돌리고야 말았다.
"......저기, 나, 이제 가봐야 될거같아."
그리고 몸을 벌떡 일으킨 나는, 그가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간다.
그러나 마악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얘, 잠깐만!"
날 부른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난 영문을 몰라 엉거주춤 멈춰선채 그녀를 본다.
뭔가, 나쁜짓 한것 같은 기분에 심장 엇박자로 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너 우리애랑 요즘...친하게 지내는 아이지? 옆집 사는, 여시 맞니?"
".....네"
난 그냥 꾸벅,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앙칼진 톤, 무언가 불쾌한 어투였다.
난 뭐라고 말해야 하나, 어색하게 우물거리는데.
여자가 곧 내게 상냥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러나 난 그녀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것을 눈치챈다.
"자주 놀러와 줘서 시완이도 많이 밝아졌어. 고맙다. 근데, 이젠 여기 안왔으면 좋겠구나.
듣자하니 너 학교에서 정학도 받았다던데... 맞니?"
난 뻣뻣하게 굳어진다. 그녀는 말을 잇는다. 너도 알다시피 시완이는 좀 특별하지않니.
그앤, 뭐가 옳고 그른지도 제대로 몰라. 내 말 알아 들어? 쉽게 물든다고.
그리고 그앤 이제 영국에 있는 특수학교에 가게 될거란다. 너무 정이 들면 떠날 때에 슬프지 않겠니?
쏟아부어진 말 끝에, 잘가렴, 하고
문이 쾅 닫힌다.
난 쫓겨난 듯한 기분으로 멍하니 대문앞에 서, 화려한 집을 올려다본다.
그 아래에는 내 낡아빠진 운동화가 있다.
여자의 경멸하는 듯 했던 눈초리가 따끔하게 가슴을 찔러온다. 영국 유학이라고?
난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고, 그 애도 나와는 사는 세상이 달라.
그렇게 며칠, 몇주동안 난 단 한번도 그애의 집을 다시 찾지 않았다.
정학도 풀린지 오래. 난 울적한 기분을 감출수가 없다. 고작 얼마간의 만남이었을 뿐인데.
난 길가를 지나다가도 그와 비슷한 생김새의 남자아이가 보이면
왠지모르게 시선이 가곤 했다. 그래도, 난 다신 우리가 만나지 못할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날,
거세게 소나기가 내리는 날씨.
현관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에 나간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만다.
"너, 어떻게 온거야?
이제 밖에도 나와?"
그는 그자리에 굳어선 채 대답이 없다.
그는 맨발이었고, 흠뻑 젖은 몸에서는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난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는 그를, 답답한 마음에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기 시작한다.
그가 내게 어딘가 쉰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안왔어? 난 못나오잖아. 나 못나오는거 알면서."
"......."
"넌 아무렇게나 어디든 다 넘어다니니까 나한테도 쉬울줄 알았어?"
난 그가 이를 악 무는 것을 보았다.
난 그의 젖은 머리를 닦던 손길을 멈춘다.
...너 영국 간다며, 난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대신 그저 꽉 막힌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 이제 너희집에 가면 안돼. 너희 엄마가 나더러 너랑 더 놀지 말래."
"그래서,
안볼거야?"
내가 반응이 없자, 그가 초조하게 날 재촉하려는 듯, 뭔가 더 말하려 입을 벌린다.
난 그 순간 그의 어꺠 위에 손을 올린다. 그러자 그는 그대로 흠칫, 굳어진다.
난 그제서야 지금껏 이상했던 그의 모든 반응을 이해했다. 그의 가느다란 떨림.
축축이 젖은 셔츠는 살갗에 붙은채로,
난 손바닥 아래로 전해져오는 그의 온기를 모두 느낄 수 있다.
난 어느새 우리가 아주 가까이 붙어 서 있고,
그의 물기에 내 옷깃도 모두 젖어있음을 깨닫는다.
"이상해."
"...뭐가?"
"뛰지도 않는데, 꼭 심장이 터질것 같아."
그가 어딘가 넋이 나간채 그렇게 속삭이고, 난 그의 체온이 조금 더 올라갔음을 느낀다.
한참을 마주보던 끝에, 그가 순간, 무언가를 아주 작게 웅얼거린다. 난 잘 알아 듣지 못했고
그가 이번에는 날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말한다.
".......타이밍,
지금이지?"
그러면서 따뜻한 숨결이 내 뺨 가까이로 다가온다.
간지럽고, 차가운,
비누냄새..
난 졸리운듯한 기분으로, 따뜻한 입술 사이로 그에게 속삭였다.

"........응. 지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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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영 코(끝)성형 5번 하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