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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미국에서 여행 중이신가요?
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l조회 746 출처
이 글은 9년 전 (2017/1/12) 게시물이에요



#4. 회상, 2008년 9월 17일, 서울


내가 우리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몰래 훔쳐봤었더라면, 시간을 되돌려 하숙집 앞에서 너의 라이터


와 담배를 빼앗을 수 있었을까? 너는 그렇게 내 집 앞에서 4시간 동안 기다리며 나를 원망하고 몰아세


울 수 있었을까?


2006년 여름 즈음에 우연히 만났던 나와 너의 이야기는, 단지 쓸쓸한 기억으로 잊히고 말 것인지.


#5. 비와 그녀


강의실 밖에는 비가 아주 조금씩,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오전만 해도 밝았던 교정이 우울하다 싶을 만


큼 구름에 둘러싸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우산을 챙겨온 터라, 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내가 비 내리는 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우울한 날씨에 고등학교 때 사귀던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다. 특히나 이렇게 비 오는 날


씨에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미안해... 성민아. 그런데 나 자신이 없어. 내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다릴 수 있을지, 다시 공부해야 하


는 너한테 짐이 되지는 않을지. 우리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나는 그러고 싶어.'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냐? 수많은 여자애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유명한 여대잖


아. 너도 이제 신입생인데 남들처럼 미팅도 하고 대학생들한테 고백도 받고 그런 특권쯤은 있어야 겠


지. 나는 너를 못 붙잡아. 그러니까 선택은 네가 했어야 했어. 왜 울어? 네가 울 이유는 없잖아. 차라리


내가 제발 떠나지 말라고 무릎 꿇고 울면 모를까.


갑자기 민망하다 싶을 만큼 엄청난 휴대폰 진동이 귓가를 때린다. 책상 위에 폰을 그냥 올려놨던 내 잘


못이다.


교수님은 짐짓 모르는 척 수업을 계속 진행하고 몇몇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나는 서


둘러 무음모드로 바꿔놓은 다음 문자를 확인한다.


[저 지금 학교 끝나고 아저씨네 집 앞으로 가고 있는 중이에욤. 한 20분 뒤쯤 도착할 듯.]


너도 참... 분위기 깨는 데는 선수구나. 왜 얘만 등장하면 늘 똑같던, 늘 그랬던 분위기가 한 번에 뒤집히


지?


[응. 나도 그때쯤에 수업 끝나서 바로 갈 거야. 없어도 잠깐만 기다려]


딴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벌써 교수님이 수업을 마무리 짓고 있다. 종합관 건물 밖으로 나가니 아까 보


다 빗줄기가 훨씬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반 친구들 몇 녀석이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성민아, 위닝하러 가자'


'야, 오늘은 안되겠다. 누구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오~누구? 여자냐? 여자?'


그러고 보니, 성별로 따지면 여자는 여자로군. 여자 만나러 가는 게 맞기는 맞네.


친구들보다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데, 문자가 한통 더 도착한다. 여고생으로 부터다.


[지금 맥도날드 앞에 있는 지하철 출군데요.... 비 와서 못 나가고 있어요ㅠ 이쪽으로 좀 와주면 안 돼요?]


우산 안 가져왔니? 준비성 하고는... 귀찮긴 하지만 안될 건 없지. 나는 간단하게 답 문화고 3번 출구 쪽의


로 걸어간다.


비가 내리지만, 3번 출구 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다들 만나면 행복한 연인을 기다리고,


친구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뭐지? '내가 빼앗아간 라이터 받으려고 기다리는 애'를 만나러 가는 거


구나. 진짜 이건 정말이지 별로다.


그 여학생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조용히 서있는 그 애한테 다


나가서 어깨에 살짝 손을 댄다.


'어. 안녕하세요. 우산을 안 가져와서요. 미안요.'


미안하다고? 나는 왜 비 오는 날에 여자들한테 미안하다는 소리밖에 못 들을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네


가 미안할 건 또 뭐냐? 내가 라이터 가져가서 네가 몇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고 몇 번이나 신촌으로 와야


했던 건데.


다시 보니 어제 흥분했던 모습에 비하니까 많이 차분해진 모습이다. 그래, 차분해지니까 좀 낫네.


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제처럼 까칠하게 대들었다면 내가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야, 너 저녁 먹었어? 내가 미안한 것도 있고... 밥 사줄게, 먹고 가.'


여고생은 의외의 제안이었던 듯,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기로 했었는지,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야 오늘 너희들끼리 그냥 먹어. 나 공짜로 먹는다 밥. 응? 아 그냥 아는 오빠랑'


그러면 그렇지 네 핵심은 바로 '공짜밥' 이었구나. 이거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된장 포스 좀 풍기겠는데?


아는 오빠라... 그래 어떤 의미에서 '아는' 오빠인 건 맞지. 내가 '여자' 만나러 가는 거처럼


나는 파스타 투웰브로 가려고 마음먹고 발걸음을 돌린다. 그때 뒤에서 여고생이 나를 부른다.


'나 우산 없다니깐요.'


아 참, 그렇지 같이 쓰고 가야겠네. 내가 먹자고 했으니, 우산도 씌워주는 게 맞지. 근데 뭔가 사모님


모시고 가는 최 기사가 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야 네가 약간만 앞으로 가. 내가 씌워줄게'


막상 같이 우산을 쓰고 가니까 분위기가 좀 어색하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화장도 거의 안 한 거 같은데


피부는 좋네. 키는 163정도? 근데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나이 먹어서 주책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파스타 투웰브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다. 여고생이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가 나한테 묻는다.


'뭐가 맛있어요? 해물 소스? 토마토소스?'


그냥 아무거나 시키지. 나는 화이트소스가 좀 느끼하기는 한데 한번 먹어보라면 주문해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까 정말 할 얘기가 없다. 이거 무슨 소개팅도 아닌데 왜 이렇게 뻘쭘한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너랑 나랑 공감대를 형성할만한 무언가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구나.


아! 이름.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네. 그런데 나는 방금 네 이름을 알았어. 네 가슴에 붙어있는 명찰에서.


'손시연'


내가 명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어색했는지, 여고생이 가슴 언저리를 툭툭 털며 나한테 물어


다.


'뭐 묻었어요? 왜 계속 이쪽 쳐다봐요?'


잠깐만, 목소리 뉘앙스가 '이 변태야 왜 계속 가슴 쳐다봐!' 대충 이렇게 들린다? 나 변태 아니거든, 네


가슴 쳐다본 것도 아니고. 어린애 가슴 같은 거 관심 없거든?


'너 어디 고등학교야? 몇 학년?'


'S 고등학교 2학년이요. 아저씨는 대학생이에요? 어디? 연대? 서강대?'


'연세대, 나 신입생이야.'


'오~!연세대. 공부 잘했나 보네. 나 연세대 들어가면 아빠가 정말 좋아할 탠데.'


공부? 내가 경쟁상대로 생각한 애보다는 못했어. 모의고사랑 내신 10번 시험 보면 8~9번은 그 녀석이


점수가 더 높게 나왔거든. 그게 늘 스트레스였고. 그래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 근데 그놈의 경쟁의식 때문에 늘 불만족스러웠어. 성적에 있어서는.


'그럼 아저씨는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 다 1등급 받고 그랬겠네요? 반에서 1등도 하고? 나는 반에서 15


등안에 겨우 드는데.'


애는 애구나. 하기야 저 때 관심사가 다 그렇지 뭐. 너는 몇 등급이냐 전교 몇 등이냐 이런 거.


'근데 너 아까부터 왜 계속 아저씨 아저씨 거려 나 86년생이거든? 너 몇 년 생인데?'


'저 빠른 90이거든요? 와 86년생이래. 완전히 아저씨다 아저씨.'


헉, 90년생. 시간의 갭이 있기는 있다. 나는 올림픽 보면서 걸음마 뗐는데, 너는 그때 이 세상에 존재하


지도 않았구나. 어떻게 보면 아저씨가 맞기는 맞네. 근데 꼭 그렇게 불러야 돼? 완전 된 느낌이라


구. 그래도 생각보다 분위기 안 어색하고 괜찮아졌네.


분위기 안 어색해져서 좋기는 한데 너랑 나, 진짜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다. 이름도 달라, 성격도 달라,


나이도 달라, 성적도 달라, 이건 뭐 공유할게 진짜 없네.


맞다. 라이터 돌려 주기로 했지. 까먹을뻔했다.


'라이터 받아.'


'아! 깜빡할뻔했다. 바본가 봐 바보.'


나야 그렇다 치고, 얘는 왜 이래? 라이터 받으러 온 애가 그새 그걸 까먹니? 어제 그렇게 라이터 내놓으라


고 울고불고 난리 브루스를 추더니.


'근데 이거 되게 비싼 건가 보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어?'


그때 갑자기 여고생의 얼굴이 완전히 울상이 된다. 어? 얘 또 우는 거 아니야? 분위기 왜 이래?


'나.. 아빠랑 여동생이랑 셋이 살거든요. 엄마가 나 중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그거 엄마가 아빠한테 젊


었을 때 사준 거라, 아빠가 엄청 아끼는 거란 말이에요.'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미안 미안. 이런 반응을 바라고 말한 게 아닌데. 아 진짜 이런 거 너무 싫다. 나는 왜


누가 내 앞에서 울려고 하는 게 정말 싫지? 나까지 슬퍼지려고 해. 아무리 봐도 너 진짜 애는 애다. 어제


는 그렇게 까칠하더니만...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울상을 짓냐? 너 이런 이미지 아니잖아?


나는 빨리 대화의 화제를 바꾼다.


'되게 중요한 거였네. 내가 진짜 미안. 스파게티는 어때? 맛있어?'


'조금. 솔직히 약간 느끼한 거 같은데 먹을 만은 해요.'


나는 그때 다시 깨닫는다. 얘는 어머니가 없구나, 나는 아버지가 없는데 부모님 중에 한 분이 안 계시는


거. 이것도 공통분모라면 공통분모네. 너도 나와 같은 느낌의 슬픔 하나는 가슴속에 공유하고 있는 거


니까. 스파게티 다 먹을 즈음에 겨우 하나 찾았구나. 공통점.


'아저씨 이름 뭐예요? 내 이름은 아까 명찰로 봤죠?


응. 손시연이잖아. 너 아까 내가 명찰 보고 있는 건지 알았구나? 나 혼자 괜히 변태로 몰린 것처럼 오버


한 거였네.


'나 최성민'


'휴대폰 이름 바꿔서 저장해야겠다. 이름 몰라서 '이상한 아저씨'로 저장해 놨는데.'


이.... 이상한 아저씨?! 이 자식이 사람을 가지고 노네. 근데 이거 어쩌나. 내 폰에 너는 '진상녀'


라고 등록돼 있는데? 이상한 아저씨와 진상녀와의 만남? 진짜 그림 안 나온다. 그치?


나 역시 이름을 바꿔 저장하려는데, 휴대폰이 없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방 속에다 넣어뒀다 보


다.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여고생이 뭔가 발견한 듯 말한다.


'어?! 유리알 유희네? 나 그거 읽고 독후감 써서 내라고 선생님이 그랬는데.'


너네도 이거 독후감 쓰니? 또 하나 공통점 있네. 나도 연대에서 이거 독후감 쓰라고 해서 썼었거든.


헤르만 헤세. 이름만 생각해도 너무 복잡하다 지금.


'그거 나 빌려줘요. 아싸 책값 벌었다.'


공짜 엄청 좋아하는 거 같아 너 밥 먹으러 따라온 목적부터가 그렇지? 이제 책까지 공짜로 빌려 가려고?


'이거 그냥 줄게. 너 가져.'


'오~쿨한 척. 빌려 갔다가 나중에 시간 남으면 돌려 줄게요. 고마워요. 땡큐.'


책을 책가방에 집어넣으면서 우리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졌다. 나 혼자 다니면


그냥 우산 안 쓰고 다닐 텐데. 얘 때문에 안 쓸 수도 없고. 그냥 씌워주기로 한다. 조금 걷다 보니 벌써 3번


출구 앞이다.


'야, 너 지하철역에서 집 가까워? 많이 걸어가야 돼?'


'성수에서 내려서 한 15분쯤? 왜요?'


'그럼 너 이거 가져가서 쓰고 가. 3천 원 주고 산 거니까 그냥 가져. 난 여기서 5분이면 가니까.'


'안 그래도 되는데. 괜찮은데..'


나는 우산을 그 여고생 손에 쥐여주고 지하철로 보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남자의 이런 호의에는 별


로 익숙치 않은 거 같다.


'그럼 갈게요. 잘 가요.'


이번에는 인사도 없이 휙 지나가지는 않는군. 나는 아주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하숙집으로 걸어간


다. 비 오는 날이 꼭 짜증 나고 우울하지만은 않구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6. 같은 생각


'이제 답안 작성 다하신 분들은 조용히 나가셔도 됩니다.'


조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몇몇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간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가방을 챙겼다. 한번 더 검토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서 빨리 시험에서 해방되고 싶은 생각이


나를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시험이 끝났으니. 이제 방학이다. 몸도 무겁고 머리도 무겁다. 상쾌하게 땀을 흘리고 싶다. 나는 곧바로


이글 피트니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그 여고생의 만남은 그때 3번 출구 앞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라이터라는 매개물이 우


리를 이어주었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이어줄 매개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손시연이 빌려 간 유리알 유희


라는 책을 통해서 다시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만남의 가능성마저도 일주일 전


그 애가 보낸 문자 한 통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윽.. 미안해요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유리알 유희 잃어버렸어요. 어떡하죠?]


당시 뭐라고 다문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기말고사와 여러 가지 과제에 밤새 시달리는


라 여고생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 책 너한테 준거니까 괜찮아. 나 지금 뭐 하는 중


이냐고? 응 시험기간이라 완전히 쩔어있어. 너희도 곧 기말 고사지? 아마도 이런 식의 성의 없는 답문을


하다가 그만두었겠지,


시간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기억 속에서 손시연이라는 여고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아져만 갔다. 갑자기 신선하게 다가왔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신기루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 애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여고생이 나한테 가져다준 인상이나 느낌


은 강렬했다. 하지만 그 느낌이라는 것이 반드시 가슴 뛰는 애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나는 손시연을


생각했었지만, 사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 이것이 만들어낸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나는 한 명의 평범한 대학생


으로, 그 애는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는 위치로 되돌아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삶의


테두리를 바꿔놓을 새로운 해프닝은 아마도 발생하기 힘들겠지, 인생은 영화가 아니니까.


한가지 확실한 건 있다. 적어도 나란 놈에게는 여고생과 나 사이의 울타리와 벽을 넘어설 용기가 없었


다.


헬스를 마치고 땀에 젖어 탈의실 문을 여는데, 한 통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어이 최성민! 잘 지내지? 이번에 연대 갔다며? 축하한다. 자식ㅋㅋ 이번 주 토요일에 강남에서 동창회


한다. 뭉치자!]


김창수, 오랜만이네. 그렇게 경쟁의식을 느꼈던 녀석인데 오래간만에 네 이름을 보니까 정말 반갑다. 친구


란 게 이런 건가 봐.


고3 때 네가 반장, 내가 부반장이었지. 너는 1등, 나는 만년 2등이었고. 넌 내가 480점을 맞든, 490점을


맞든 그보다 꼭 몇 점씩은 나보다 점수가 높았어. 운 좋게 내가 시험 점수가 높아도 나만 혼자 가슴 뛰어


을뿐, 너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고등학교 때 음악실에서 틀어준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슬프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나는 영화를 보


는 내내 살리에르를 마음속으로 응원했어. 충분히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서도 모차르트에 대한 콤플렉


스로 불운했던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었거든.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너보다 나은 게 한가지 있기는 했네


여자친구. 강소영 말이야 그건 너도 항상 부러워했었잖아.


나는 그제야 한 통의 문자가 더 와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갈뻔했다.


[시험 잘 봤어요~? 아저씨?]


의외로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쪽은 내가 아니라 손시연이었다. 시험 끝나


니까 이제 여유가 좀 생기는 거 같다. 미안, 나 완전히 이기적인 동물인가 봐.


[오늘 끝났어. 넌 시험 잘 봤어?]


[왕짜증 ㅠ 시험 얘긴 그만 ㅎ 우리 학교 놀러 와요. 시험 끝난 기념으로 내가 쏠게요]


야, 문자 칼같이 오는 건 마음에 든다. 소개팅할 때 만난 여자애들이 일부러 답문 늦게 보낼 때마다 정


이 뚝뚝 떨어졌거든. 이런 식으로 밖에 자기 가치를 표현 못할까? 이런 생각 때문에 싫어졌어. 내가 너


무 꽉 막힌 걸까? 주위 여자애들은 나보고 연애 하수래.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되는데 어중간한 나쁜 남


자 콘셉트에, 여자 마음도 모를뿐더러 센스도 부족하다나? 근데 어떡하니. 싸이월드에 퍼가는 연애 지식


같은 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걸.


가만, 네가 쏜다고? 공짜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 내가 여고생한테 밥까지 얻어먹을 정도로


불쌍해 보이나 봐. 솔직히 지금 개운하기는 한데, 완전히 피곤해. 드러누워 자고 싶다고. 그래도 네가 사는


밥 한번 먹고 싶기는 하구나.


나는 연대 앞에서 S 고등학교 근처로 가는 버스를 탔다. 6시까지 오라고 했지? 근데 왜 이렇게 버스가


느리게 가느냐. 아무래도 또 늦을 거 같네.


[야 한 십분 늦을 거 같은데. 어디로 갈까?]


[교문 앞으로 오삼~!]


역시 고등학생. 하삼체 같은 거 나 별로거든? 아 너 보인다. 근데 왜 이렇게 손을 흔들어대? 완전히 뻘쭘해.


이렇게 고등학생 많은 거 처음 본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어이~! 연대 아저씨! 여기!'


제발 그런 하이톤으로 화물연대 노동자 아저씨 부르듯이 나 좀 부르지 마.


'아저씨'라는 말에 그 학교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깜짝 놀라며 손시연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당연


하지, 자기 학교 여학생이 삼촌도 아니고 오빠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아저씨'를 부르는데 너 같으면


안 놀라겠냐?


손시연의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나를 쳐다보고 킥킥 거리며 지나간다. 쪽팔린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어. 너 나 놀려먹으려고 이러는 거지 지금? 나 생각보다 소심한 놈이라고.


'와 되게 오랜만이다. 아저씨. 왜 도망쳐요? 나랑 있는 게 부끄러워요?'


정말 놀리는 말투다. 너네 홈그라운드라 이거지?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집 가서 잠이나 자는 건데.


'빨리 쏘기나 해.'


'알았어요. 따라와요.'


얘 뭐 기분 좋은 일 있었나? 완전 기분이 업 돼있네.


'어머. 시연아 뭐 해? 옆에 누구? 아..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냐. 내가 왜 네 친구들한테 고개 숙여서 경어체로 인사하고 있느냐고.


너랑 좀 떨어져서 걸어가야겠다. 앞서가 뒤따라 갈 테니까.


손시연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허름한 분식집이었다. 그래...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


기야,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냐. 그냥 고맙게 먹을게.


'아저씨, 여기 라볶이 맛있어요. 그때 아저씨가 사준 거보다 훨씬.'


2500원짜리 하나 시켜주면서 생색은... 그래도 오늘 만남으로 파스타 투웰브랑, 분식집의 간극


만큼 우리 거리가 줄어든 거 같아. 그때 파스타 투웰브에서 마주 앉았을 때는 정말 어색했었는데, 지금은


별로 안 어색해.


'와 아저씨 이제 보니까 진짜 진상이다. 완전 쩔었네. 연대생들은 다 공부 열심히 하나 봐요?'


헉, 밥 사주려면 좀 곱게 사주면 안 되느냐? 오랜만에 봐서 밥 먹는 상대방한테 진상이라는 소리를 꼭 해야


갰어? 그리고 진상은 내가 아니라 너거든? 옛날에 내 폰에 너 '진상녀'로 등록돼 있던 거 모르지?


내가 공짜로 사줄 때는 고분고분 잘 먹더니. 자기가 사준다고 아주 기고 만장하다.


'그래 나 진상이다. 됐지? 목소리 좀 낮추지?'


'미안, 장난이에요. 장난, 진짜 빨리 나왔다. 아저씨 맛있게 먹어요.'


저녁 대용으로 먹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럭저럭 맛은 있다. 사실, 라볶이 맛보다도 생각


보다 이 여고생과의 만남이 부담 없고 편해서 놀라고 있는 중이다. 나는 솔직히 떨어져 있으면서 너랑


나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는 아니었나 보네 부끄러워진다. 갑자기


나는 주변 환경을 핑계 대면서 너랑 나 사이에 벽을 만들고 있던 건지도 몰라


'야 근처에 배스킨라빈스 있어? 아이스크림은 내가 사줄게.'


'배스킨라빈스는 없고, 아파트 단지 쪽에 하겐다즈 있어요.'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네. 하겐다즈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고, 우리 둘은 지하철역으로 걸어


갔다.


'어, 키 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크네 아저씨? 호빗까진 아니지만.'


자, 이제 진상에 이어서 호빗까지 나왔어. 너 오늘 대놓고 막 나가는 거 같아.


'야 나 그래도 177이거든? 너야말로 겨우 내 어깨 넘어오면서 무슨.'


'난 여자잖아요. 남자가 조인성 정도는 커야지. 정말 멋있잖아요. 조인성. 난 180은 넘는 남자랑 사귀어


야지. 대학 가면.'


그래 희망사항이라는데 누가 말리겠냐. 조인성 멋있지. 근데 나도 김태희 좋아하거든? 너 한번 김태희


랑 비교 당해볼래?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 가슴에 상처 줄까 봐 내가 참는다.


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해진다. 나는 성수역 집 근처까지 손시연을 바래다줬다.


'야 오늘 잘 먹었다. 잘 들어가.'


'네. 다음번엔 아저씨가 사줘요. 저 갈게요.'


집으로 돌아오는 덜컹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계속 손시연이 생각났다. 소개팅을 여러 번 했지만, 이


렇게 재밌고 편하게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할까? 너무 편하고 기분이 좋다. 장


난으로 갈굼 당하는 것도 기분 나쁘지 않고, 약간 어설프게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좋다.


손시연,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7. 어느 날 사랑이


이상한 일이다. 왜 내 머릿속에서 그 여고생 생각이 자꾸 나는 거지? 이런 느낌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고등학교 때 강소영을 사귈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아니야. 소영이랑은 학교에서 매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잠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보고 싶다고나 그러지는 않았어. 그런데 나는 지금 너무


보고 싶다. 너를.


아침에 일어났는데 제일 먼저 너에 대한 느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머리 감으려고 눈을 감아도 마


찬 가지다. 토익학원에서도, 헬스장에서도, 하숙집에서 TV를 켰을 때도, 컴퓨터를 할 때도 잠깐씩 네 생


각이 나. 그런데 이게 어떤 감정인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 편한 친구 그 이상의 감정인 건 확실해.


하지만 이게 사랑인지는 확신이 안 서네. 고등학교 때는 강소영이랑 결혼하고 평생같이 살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 애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행복했지.


그렇지만 솔직히 너에 대한 감정이 불타는 사랑 뭐 이런 건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그 자체로 편하고


보고 싶기는 한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


무려 4살 차이인가? 아니 3살 차이지! 너는 빠른 90이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근데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왜 인터넷 검색창에다 '대학생 여고생' 을 검색하고 있는 거야? 저기 지식인에 누가 써놨네.


'대학생인데 여고생이랑 사귀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볼까요?ㅠㅠ'


저런 걸 물어볼 때가 없어서 지식인에다 물어보는 녀석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일까. 값싼 위안이


라도 받으려는 건가. 근데 나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놈이네. 여기서 이런 거나 검색하고 있고. 아직 사랑하


는 감정인지 조차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와. 정말 복잡하다.


친구들아! 자, 이리 와봐. 내 여자친구 소개해줄게. 여고생이야! 2학년. 예쁘지?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친구 놈들은 분명 놀라서 이렇게 말하겠지.


'이런 미, 완전히 순진한 어린애 꼬드겨서 뭐 하는 짓이야!'


그만. 이런 복잡한 생각 그냥 집어치우자. 그냥 나 자신에게 내 감정에 충실하자. 그러고 보니 내가 먼


저 문자 보낸 적이 한 번도 없네. 내가 늘 이런 식이니까 여자애들로부터 센스 없다는 소리 나 듣는 거겠지.


[뭐 하고 있어~?]


[수업 중이요~^^ 완전 선생님 몰래 문자 쓰고 있음. 왜요? 아저씨?]


아, 수업 중이구나. 센스란 게 이런 건데. 수업 중인 거 미리 알고 여자애 좀 배려해주면 좀 좋을까?.


[그냥 심심해서ㅋ 학교 끝나고 신촌 놀러 와. 이번엔 내가 쏠 차례잖아.]


[어. 오늘은 안되는데ㅜ 내일 놀러 갈게요 밥사줘요ㅋㅋ]


[그래~그럼 내일 내가 또 연락할게. 수업 집중해! ㅋ]


별것도 아닌데 허탈하다. 그냥 오늘 못 보고 내일 보는 것뿐인데 뭐가 이렇게 아쉬울까. 다행히 얘도


나랑 만나는 게 어색하거나 부담되거나 하지는 않나 보다. 심심해도 할 수 없지 뭐. 그냥 집에서 빈둥 거


리기나 해야겠다.


밤 10시쯤 됐는데, 고등학교 때 정말 친했던 친구 민석이로부터 연락이 온다 맥주 사서 하숙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란다. 지금 서강대에 다니는데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다. 마침 심심했는


데 잘 됐다. 이 녀석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같은 과 후배 여자애에게 완전히 푹 빠져있었다,


'나 2주일 내로 걔한테 눈 딱 감고 질러버리려고. 아, 완전 내 스타일이야. 몸매 하며 얼굴 하며 아주... 죽


는다 죽어.'


'잘해봐 인마. 괜히 차이고 나서 나한테 술 사 달라고 하지 말고.'


맥주 마시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12시다. 갑자기 민석이가 내


컴퓨터 앞에 앉더니 이것저것 뒤져본다.


'오 치밀한데 이 자식? 야동 어디다 숨겨놨어? 빨리 자수하지?'


'나 재수하면서 야동 끊었거든? 이미 고등학교 졸업할 때 같이 졸업했으니까 헛수고하지 마.'


'그래? 그럼 내가 오랜만에 새로운 거 하나 소개해 주마.'


저 녀석 장난기는 진짜 알아줘야 돼. 어? 근데 너 지금 뭘 다운로드하는 거냐. 그래 말리기도 귀찮다.


'제발 너 혼자 곱게 감상하고 지워라. 응?'


민석이가 다운로드한 성인 동영상 제목을 본다. 여고생을 어쩌니 저쩌네 하는 원색적인 제목이 쓰여 있


다. 잠깐, 이건 아니잖아.


'잠깐 스톱!'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외치면서 민석이에게서 마우스를 낚아채 영상을 지워버렸다. 갑자기 혼자 열


받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반사적인 거부감이 든다. 하필 여고생이 들어가는 제목의 영


상이냐고 제발 그런 영상 좀 다운로드해 보지 마. 완전 기분 찜찜하다고.


'아씨, 이딴 거 좀 다운로드하지 말라고! 여고생이면 애들인데 좀 순수하게 바라보면 안 되냐? 응?'


완전 내 감정 이입시켜서 한풀이라도 하듯이 나는 민석이를 몰아세웠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


는지 민석이가 웃으며 응수한다.


'뭐야, 정말 웃기네. 네가 보고 지우라메. 갑자기 왜 이렇게 흥분해? 이 자식 이거.'


'아까 했던 말 취소. 다운로드하는 거 절대 금지다. 인마.'


나는 민석이를 반강제로 컴퓨터 앞에서 끌어내리고 좀 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1시쯤 되자


민석이도 그만 일어나려는지 맥주 캔이랑 아주 부스러기를 치운다.


'야 내일모레, 토요일 동창회 하는 거 알지? 너 재수하느라고 그동안 못 나왔었잖아. 너보고 싶다는


애들 많더라. 이번에 꼭 나와.'


'응. 알았다. 잘 가라.'


나는 민석이를 보내고 하숙집 침대에 드러눕는다. 내 방 주변을 둘러본다. 내 하숙집이 왜 이렇게 산뜻


하게 느껴지지? 다시 그 애 얼굴이 떠오른다. 기분이 좋아진다. 상쾌하다.


나는 내일 손시연을 만난다.


'어? 너 왜 사복 입었어? 교복은 어쩌고?'


다시 만난 손시연은 사복 차림이었다. 교복을 안 입으니까 그래도 정말 어린 여고생처럼 보이지는 않는


다. 같이 돌아다닐 때 부담스럽니는 않겠네. 다시 만나니까 좋다.


'저라고 맨날 교복만 입는 줄 알아요? 평소에 사복 많이 입거든요?'


'너 학교 끝나고 바로 오는 거잖아?'


'아저씨 되게 궁금한 거 많네 정말. 그냥 사복 입고 왔으면 그러려니 하면 안 돼요? 오늘 뭐 사줄 거예요?'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뭐...'


'그럼 내가 가는 대로 따라와.'


여자애들이 유일하게 내 강점으로 뽑는 거. 여자랑 만날 때 잘 리드하고 끌고 다니고 하는 거지.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지. 먹고 싶은 거 먹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면 되는 거잖아? 이렇게 부담 없이 편


하고 좋은데.


롤집에서 롤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대화를 하다가, 영화 얘기가 나왔다. 그래, 영화 안 좋아하는 사람


은 별로 없지. 너도 좋아하는구나, 영화?


'야 그럼 이거 먹고 영화 보자, 요즘에 재밌는 거 하나?'


'저도 요즘에 뭐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학교만 다니다 보니까. 공포영화만 아니면 돼요. 저 무서운 거


절대로 못 봄.'


때마침 6월 말이라 공포영화 시즌일 텐데, 너 성격만 보면 공포 영화 무지 잘 볼 거 같은데 의외로


무서운 거 싫어하는구나. 나는 손시연을 데리고 아트레온으로 갔다. 요즘 무슨 영화하지? 와 근데 진짜


볼 거 없다. 게다가 너 공포영화 못 보니까 그것도 제외해야 되고 슈퍼맨 리턴즈 괜찮겠네. 헐, 근데 상


영시 간이 2시간 반을 넘어. 저것도 제외.


'오, 조인성 나오는 영화한다! 저거 봐요! 어.. 근데 18세 이상 관람이다....'


아 맞다.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18세 이상 관람가도 못 보네. 그럼 대체 뭘 봐야 되냐 우리?


'너 진짜 꼬꼬마다. 18세 이상도 못 보고, 공포영화도 못 보고. 너 10시 전까지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그럼 시간 안 맞는 거는 또 못 보네? 어디 만화영화하는데 없나?'


되돌아보면, 손시연은 어리다는 말에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 짜증나 진짜. 왜 아저씨는 말끝마다 어린애 아니면 꼬꼬마 걸려요? 나 사복 입어서 18세 영화 볼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그냥 비열한 거리 봐요.'


이러다가 얘 삐지겠다. 그래 장난 그만할게. 그래도 18세 이상은 안돼. 조인성 나와서 이러는 거 아니


니깐 오해는 말어. 결국 우리가 선택한 영화는 엑스맨이었다. 고등학생이랑 영화 보려니까 진짜 고려해


야 될 게 많다는 걸 느낀다.


'팝콘이랑 음료수는 내가 쏠게요. 러브 콤보 면 되겠다. 러브 콤보 괜찮죠? 러브 콤보 사 올게요.'


얘가 진짜... 왜 이렇게 '러브러브' 거려? 나 원래 영화 볼 때 뭐 안 먹는데. 그래도 괜찮다. 같이 영화 보니


까 재밌네. '여자' 랑 영화 보는 거도 오래간 만인 거 같아. 아, 아니다. 소개팅 한 여자애랑 얼마 전에 영화


보기는 했었지. 근데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여자애한테 연락을 안 했어. 그러니까 얼마 뒤에 소개해 준


애 통해서 왜 연락 안 하느냐고 떠보듯이 물어보더라고. 간단했어. 너무 거리감 느껴지고 불편했거든.


솔직히 영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느새 영화가 끝나고 지하철로 걸어가는데 손시연이 말을


꺼냈다.


'아저씨 나 종로에 있는 단과학원 등록했어요. 주말에 다녀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서 완전 왕따처럼


주변에서 혼자 밥 먹어야 될 듯.'


'오. 공부 좀 열심히 하려나 본데?'


'당연하죠. 내가 수학이 좀 안되거든요. 수학만 잘하면 10등 정도 할 수 있는데 진짜. 수학 때문에 완전


미치겠어요. 요즘.'


'열심히 해. 수학은 시간 많이 투자하면 점수 올라. 학원 다니면 점수 많이 오를걸?'


지금만 해도 안 그러는데, 나는 그때 왜 그렇게 눈치가 없었을까? 그 애가 그 정도 말했으면 내가 알아서


주말에 학원 근처에서 밥 사준다거나, 밥 먹으면서 수학 가르쳐 준다거나 할 수 있어야 했다.


결국 다시 이야기를 꺼낸 건 손시연이었다.


'주말에 학원 근처에서 혼자 밥 먹기 진짜 싫다. 아저씨, 언제 근처에서 한번 더 밥 사주세요.'


'아. 알았어 학원 몇 시에 끝나는데?'


'토요일은 저녁 7시에 끝나고, 일요일은 1시에 끝나요.'


'나 토요일 고등학교 동창회라 술 많이 마실 거 같아서... 일요일은 힘들 거 같아 토요일 저녁에 사


줄게. 너 사주고 바로 동창회 가면 되겠다.'


나는 그렇게 한번 더 사주기로 약속했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앞의


로 너를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좋다. 행복하다.


사랑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8. 동창회


7시까지 학원 앞에서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늦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학원 앞으로 걸


어간다. 6시 50분이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그런데 왜 학원 끝나는 시간에 학생들이 하나도 안 보이


지? 학원 입구 앞에는 휴대폰 화면을 계속 확인하고 서있는 손시연과 어떤 여학생 둘뿐이다.


'많이 기다렸어? 빨리 오려고 지하철역부터 막 뛰어왔는데.'


다행히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는 듯, 밝은 얼굴이다.


'아뇨. 방금 끝나서 별로 안 기다렸어요. 아저씨, 이 근처 뭐 먹을 데 있는지 알아요?'


'나도 이 근처는 안 와봐서 잘 모르겠네. 아까 오다 보니까 음식점 몰려있던데 거기로 가보자.'


둘이 걸어갔던 그 길은 도로 사정이 그렇게 좋지 못 했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곳곳에 물이 고여있고.


자동차도 많이 지나가고 있다. 야야, 앞 좀 보고 걸어 네 앞에 물 고여있는 거 안 보여?


'조심해. 조심'


나는 손시연이 고인 물을 피할 수 있게 어깨를 감싸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엄마야!'


너무 세게 끌어당겼나. 얘가 왜 이렇게 깜짝 놀라? 엄마까지 찾고. 괜히 나까지 놀랬잖아. 절대로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니거든?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너 신발이랑 양말까지 다 젖을뻔했어.


손시연이 놀랐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날 보고 웃으면서 말한다.


'아저씨. 무슨 여자를 갑자기 그렇게 확 잡아당겨요? 간 떨어져 죽을뻔했네. 휴...'


'그래, 사모님 걸어가시는데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해 물을 늦게 발견한 내 잘못이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고마워. 됐죠? 근데 아저씨 생각보다 힘세다. 오 팔근육!'


고마워. 그런데 어째 칭찬같이 안 들린다? '생각보다' 세다니... 또 장난 시작이니?


'요즘에 나 헬스 하잖아. 나 정도면 평균 이상은 돼.'


'그래 봤자 비, 권상우에 비하면 아직 멀었거든요 아저씨?'


그래. 그건 나도 인정. 근데 한 번만 더 조인성, 권상우 타령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 손시연


한채영, 김태희 세트로 너랑 비교 분석해줄게. 그때 가서 상처받았니 뭐니 해야 소용없어.


'여기 맛있을 거 같다. 부대찌개 좋아해?'


'그럼요. 완전 좋아함. 여기서 먹어요.'


식탁에 앉자, 손시연이 수저를 챙겨주고 나는 물을 따라준다. 생각보다 호흡 잘 맞는 거 같아 우리. 다


른 여자 만날 때는 수저 챙겨주고, 물 따라주는 거부터가 신경 써야 될 부분이었는데... 부대찌개가 나온다.


맛있게 먹어. 너 잘 먹는 모습이 좋더라 나는.


'그러고 보니 너 음식 가리지 않고 정말 잘 먹는다. 완전 잡식동물 같아. 너네 집에 밥값 엄청 나오겠다.


너 그러다가 고3 때 되면 살 엄청 찐다.'


'우와... 사람 보고 잡식동물이래. 원래 공부하고 나면 배고프거든요? 그리고 나 살 안 찌는 체질이거든


요? 내가 밥을 많이 먹든 말든.'


손시연이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러다가 정들겠다.


'알았어 많이 많이 먹어. 밥 하나 더 시켜줘? 너 모자라지? 표정 보니까 정말 모자란데?'


'네 정말 모자라요 지금. 근데 됐어요. 그냥 집에 가서 저녁 한번 더 먹어야겠다.'


하기야. 하나 더 먹기에는 여기 너무 밥을 많이 퍼준다. 그리고 집에서 한번 더 먹기는 무슨.


'근데 아저씨. 동창회 몇 시까지 가야 돼요? 나 때문에 늦는 거 아니에요?'


아, 동창회 가야지.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만나서 놀고 있다고 문자 왔었는데. 7시 30분이네. 그만


일어서자 우리.


손시연과 나는 지하철을 같이 탔다. 성수에서 손시연이 내리고 나는 곧장 강남으로 가면 된다. 성수에


가까워 올 즈음에 손시연이 말했다.


'맞다. 아저씨 다음부터 학원 토요일에 30분 일찍 끝난대요. 6시 반에. 아, 역 다 왔다. 아저씨 동창회


재밌게 놀고 와요. 갈게요.'


다음부터 6시 반에 끝난다고? 아, 오늘 그래서 10분이나 일찍 왔는데 아무도 없이 너 혼자 기다리고 있


었던 거구나. 일찍 끝나게 됐다고 말을 하지. 별로 참을성도 없으면서.... 너 은근히 나 미안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어. 다음부터는 안 늦을게. 정말로.


강남역에서 내린 나는 동창들이 기다리고 있는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8시가 넘어선 시간이다. 저기 있


다. 고등학교 친구들. 와. 생각보다 많이 와있네.


'최성민이다. 야 성민아. 여기야 여기!'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김현석이 나를 보고 반갑게 부른다. 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정말


많네 반갑다 진짜 내가 재수하느라고 그동안 연락도 잘 못하고.... 미안하다,


'야 최성민!'


'어?! 김창수!'


오랜만이다. 김창수 이거 거의 1년 반 만이지 우리? 한때 라이벌이었는데, 왜 이렇게 반갑지? 역시 멋


있는 건 그대로구나. 자식.


'최성민 너 멋있는 건 그대로네 오랜만이다. 인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인마. 반갑다. 반가워, 너 학교에서 완전 잘 나간다며?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디서 그런 헛소문이 도냐? 야 여기 내 옆에 앉아라'


'오 우리 학교 엘리트 2명이 모이셨네. 자 기념으로 다 같이 한잔 마시자! 최성민, 너 회비 만원 내는 거


잊지 말고 저기 하얀이한테 내.'


엘리트는 무슨... 역시 민석이가 분위기를 주도하며 술을 한 잔씩 따르게 한다. 나는 술을 한잔 마시고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만나서 인사를 나눴다.


나는 또 다른 아이들과 인사하기 위해 어떤 테이블로 다가간다. 그때였다. 갑자기 놀라서 머리가 하얘지


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턱하고 막힌다. 뭔가가 머리를 세게 때리고 지나가는 느낌도 든다. 강소영이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회에 강소영이 오지 말란 법은 없지. 젠장, 눈이 마주쳤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 정말이지 최악이다. 이런 상황.


'안녕, 연대 갔다는 말 들었어. 오랜만이네...'


어색함이 싫었는지 강소영이 먼저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더 예뻐졌네. 대학생 되니까 패션부터가 달라


진 것 같고. 그런데 대단하다 너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흔한 친구였던 것처럼 말을 건넬 수 있는 거야?


네가 있는 줄 알았으면 나는 여기 오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눈 마주치고 쳐다보지 말아줘. 나는 아직 예


전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단 말이야.


'응 오랜만이다 소영아.'


분위기가 어색한 걸 눈치챘는지 민석이가 날 끌어당겨서 다른 테이블로 데리고 간다..


'야 어디 숨어있었어? 이 자식. 저기 너 술 먹이려고 안달 난 애들 많으니까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빨리


오지?'


민석이 덕에 나는 그 테이블에서 발을 뗄 수 있었다. 다른 쪽 테이블로 가면서 민석이가 말한다.


'소영이도 동창회 할 때마다 자주 참석했어. 너한테 말해줄 걸 그랬다. 괜찮지 너?'


'응.. 뭐 다 옛날 일인데, 근데 좀 어색하긴 하다. 저쪽 테이블 다시 갈 용기는 안 나.'


원래 있던 테이블로 가 앉는다. 거기서 친하게 지냈던 동창들 몇 명과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빨리 강소


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김창수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에 신이 나서 말을 늘어놓는다.


'너희들 그 영어 선생 알지? 이티 말이야 이티. 우리 그때 단체로 야자 땡 까고 도망치다가 이티한테 걸려


서 완전 혼났었잖아. 부모님한테까지 연락 다 돌리고. 나랑 성민이랑 대표로 50대씩 대걸레


봉으로 얻어맞고.'


'맞아. 여자애들 울고 난리 났었지. 김기웅 선생님이지? 오랜만에 보고 싶다. 뭐 하시냐 요즘?'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셨어. 그래도 우리 많이 예뻐했었는데.'


고등학교 때 추억은 얘기해도 얘기해도 끝이 없다. 생각해보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우리는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계속 그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끊임없이 소주와 맥주잔


이 오고 갔다. 벌써 취한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한둘이 아니다. 술이 센 편인 나도 약간 취기가 돌


정도였다. 어? 김창수 너도 완전히 취했네 아까 우리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창수야 괜찮아?'


'어... 아 완전 많이 마셨네. 다리 힘 빠졌다. 야 나 좀 부축해 주라.'


나는 김창수를 부축해준다.


'야 잠깐 밖에 나가자. 너 바람 좀 쐬어야겠다.'


부축해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앞에 있는 화장실에서 누군가 나온다. 강소영이다. 나랑 취한 창수를


보더니 놀라는 표정이다. 아씨. 일부러 다시 안 보려고 했는데 왜 또 너랑 마주치지?


'야 너네 괜찮아..? 둘이 옷에 뭐가 그렇게 많이 묻었어? 잠깐만.'


강소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기 손수건을 꺼내서 우리 둘 옷을 털어준다. 소영아, 제발 이러지 마. 넌


안 어색해 지금? 나 너랑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머리가 복잡하단 말이야 정말로


'괜찮아. 안 그래도 돼 나 잠깐 창수랑 밖에 나갔다 올게. 애들이랑 잘 놀고 있어.'


창수를 데리고 술집 밖으로 나가자 몇몇 동창들이 밖에서 전화를 받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성민아, 지금 속이 완전 쉣이다. 애들 없는데, 저 골목으로 좀 가자


골목으로 가자마자 창수는 구석에서 구역질을 한다. 나는 말없이 뒤에서 등을 두드려준다. 원래 잘


안 취하고 자기 관리 잘하는 녀석이 오늘 왜 이래?


구토가 끝나자 나는 창수에게 근처 편의점에서 여명 808하나를 사서 건네주었다. 창수가 숨을 한번


내쉬더니 그걸 마신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성민아.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마침 잘 됐다. 말해도 되지?'


'당연하지 무슨 말인데 인마. 걱정하지 말고 해 다 들어줄게.'


창수는 나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결심했다는 듯 이야기를 꺼낸다.


'나......... 소영이 좋아했었잖아. 아무한테도 말 못했어도, 너한테는 말한 거 같은데.. 기억나지? 요즘에 나


소영이랑 만난다. 사귀지는 않는데, 만나고는 있어. 저번 동창회에서 만난 뒤로 연락했거든. 너 이제


소영이랑 안 사귀는 거 맞지? 나... 이래도 괜찮은 거냐?'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추억 저편에 숨어져있던 기억들이 내 의사


는 묻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다가온다. 그래, 지금 이 장면 낯이 익다. 분명 똑같은 상황이었어. 내 기억


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파노라마는 2002년의 어느 시점에서 정확히 멈추어 선다. 월드컵으로 우리들


이 한껏 흥분해 있었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다.


#9. 2002년 6월 4일, 그 후.


내 기억 속에서 멈춰 선 파노라마는 그 시점부터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억지로 숨겨둔 채 생


각하지 않았던 기억이라서 그런가? 마치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에 노출된 것처럼 눈이 부시다.


하지만 점차 적응이 된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온 나라가 뜨겁다.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몰려나와 응원을 펼치고 노래를 부른다.


환희와 생동감이 넘친다는 표현이 옳다. 그렇게 폴란드전을 앞둔 6월 4일, 국가대표 선수도 아닌 주제


에 나는 내 방에서 휴대폰을 붙잡고 초조해하고 있다. 그냥 문자로 보낼까? 아니야. 찌질해 보여 그건


남자답게 눈 딱 감고 전화하자 그런데.. 거절당하면 쪽팔릴 거 같아. 그래 애초에 기대를 하지 말고 전


화해보자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손해 볼 건 없는 거잖아? 나 자신을 합리화 시켜보자. 거절당했을


때의 쪽팔림과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도피처를 일단 마련해 두 자. 안되더라도 쿨하게 가는 거다. 최


성민.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지? 생각할 시간 좀 더 주지. 이러다 경기 시작하겠다. 그냥 친구 놈들이랑


같이 볼까? 제발. 나약한 생각 집어치우자. 그냥 통화 버튼 누르자 이 쿨하지 못한 녀석아.


강소영이라고 등록된 번호로 신호가 간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여보세요?'


'어.... 소영아! 나야 성민이 너 지금 집이야?'


'응. 너한테 전화 온 거 처음인 거 같다 야. 무슨 일이야?'


'오늘 축구하잖아 광화문에 거리응원하러 안 갈래?'


내 입에서 왜 '안 갈래?'라는 말이 나왔을까. '가자!'라고 확신 있게 말했어야지. 이런 사소한 게 분위기


를 좌우한다고 정신 좀 차리자.


'거리응원? 누구누구 가는데?'


'아... 그게.... 그냥 주변에 사는 애들 몇 명 불러도 되는 거고, 그냥 만나서 생각해봐도 될 거 같은데...'


바보 같은 놈. 정말 말리고 있어 지금. 단둘이 보자고 단호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거니?


'근데 나 지금 동생 숙제 도와주고 있어서... 늦어질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동생 숙제 잘 도와주고... 학교에서 보자.'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냥 전화하지 말고 친구 놈들이랑 축구나 보러 갈 거 그랬


나. 와 근데 은근히 기분 다운된다. 아니야. 동생 숙제 도와줘야 한다잖아. 그냥 쿨하게 넘어가자.


아씨, 지질하게 보였으면 어쩌지? 그래 내 주제에 무슨 강소영이냐 그냥 남자 놈들이랑 어울려서 누구


는 개발이네 히딩크가 어쩌네 하면서 축구나 보자 나가자.


그런데 왠지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진다. 세수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


고 있는데 계속해서 쪽팔린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으니까 어째 잡생각만 드는 거 같다. 빨리 몸을 움직


여야지. 어디서 빨간 티 하나를 꺼내 입고. 나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벌써 폴란드 전이 시작했는지, 함성이 엄청나다 친구 놈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다.


정말이지 그 연락은 의외였다. 아니 의외라기보단 기뻤다. 그보다 더 떨리는 느낌의 전화가 내 생애에


있었을까?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시끄러워서 한쪽 귀를 막은 채로.


'어 소영아 왜?'


'나 방금 동생 숙제 다 끝났어. 와 거기 광화문이야? 엄청 시끄럽다. 지금 가도 돼?'


아싸 다행이다. 그럼 당연히 와도 되지. 민석아 미안한데 좀 이따가 봐야겠다. 형님이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응 지하철 출구 앞에서 기다릴게. 도착하면 연락해'


'빨간색 옷 입어야 되는 거야? 사람들 다 빨간색 옷 입고 있지?'


'그냥 티셔츠만 빨간색으로 입고 와.'


나는 그렇게 폴란드전이 시작된 얼마 뒤에 광화문에서 강소영을 만났다. 청치마에 빨간색 티셔츠. 아


직까지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강소영은 나 혼자만 기다리고 있는 게 처음에는 조금 어색한 눈치였지


만, 이내 재밌게 응원하고 축구를 봤다. 나는 축구 규칙을 잘 모르는 소영이에게 뭔가 아는척하면서


설명을 해준다. 즐겁다. 이런 기분.


결국 한국이 폴란드를 2:0으로 누르고 월드컵 첫승을 기록한다. 거리 응원을 나왔던. 사람들은 서로 부


둥켜 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그래, 나도 정말 기분이 좋다.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너와


단둘이 이렇게 밖에서 만난 건 처음이니까. 너랑 이렇게 웃고 떠든 것도 처음이니까.


던킨도넛에서 시원한 걸 마시면서, 우리 둘은 계속 축구 얘기를 했다.


'와 진짜 감동적이야. 난 축구 한 번도 안 해보고 축구 규칙도 잘 몰랐거든. 너 때문에 많이 배운 거 같아.'


'그치? 16강 갈 수 있을 거 같아. 사람들 이렇게 많이 나올지 몰랐는데 정말 많더라.'


강소영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은 기분이었다. 고작 한번같이 만난 주


제에.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나는 오늘 그 자체로 즐거우니까.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임


원 회의에서 강소영을 만났고 한눈에 반했다. 변변히 말도 못 붙이다가. 우연히 학교 행사를 같이 준비


하게 되면서 전화번호도 알게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나는.


민석이한테 한번 더 연락이 온다. 이 녀석 진짜 보채네 알았다 알았어.


'야 너 어디야? 답문도 안 하고 축구 다 끝날 때까지 어디 있었어? 첫승이다 첫승!'


'아 그럴 일이 좀 있었다. 지금 어디냐? 몇 명정도 모였어?'


'다섯 명 모여있다. 빨리 와 이 형님이 다 세팅해놨으니까.'


친구들이 있는 공원으로 가니 벌써 치킨도 시켜놓고 난리도 아니다. 월드컵 첫승으로 다들 흥분해 있


다. 내가 그쪽으로 가서 앉자 누가 내 어깨를 툭하고 친다. 김창수다.


'같이 좀 보지. 어디 가 있었어? 오늘 응원할 때 대박이었는데. 우리 옆에 정말 예쁜 대학생 누나들 있었


다. 골 넣고 나서 정말 기뻐서 서로 끌어안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민석이 저놈이 일부러 그 누나들


옆에서 예쁨받고 장난도 아니었어. 부럽지 부럽지?'


근데 별로 안 부럽네? 내 옆에도 예쁜 여자가 있었단다. 아니다... 나는 네가 부럽다 창수야.


김창수는 대단한 놈이다. 중학교 때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데도. 별로


범생이 티가 나지 않는 녀석이다. 우리 고등학교는 그다지 유명한 고등학교가 아니었다. 때문에 이 학교


를 배정받고 나서 나는. 문과 남자들 중에서는 적어도 1등을 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중


학교를 다닌 친구들도 내가 1등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틀렸다. 나는 전교 등수는 그럭저럭 나왔지만. 항상 반에선 1등을 하지 못 했다. 내 위에


는 언제나 김창수가 있었다. 내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저 녀석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는 거 같은


데, 어떻게 된 거지? 원래부터 머리가 좋은 건가. 나는 김창수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했다. 창수를 한


번 이겨 보고 싶었다. 예비 형식으로 치른 사설 모의고사에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생 치고는 높은 점수


를 받았지만 채점을 마친 김창수의 점수는 나보다 20점이 높았다. 그건 그 모의고사를 치른 전국에서


10등 안에 드는 점수였다. 반장 선거에서도 김창수는 항상 반장이고 나는 부반장이었다. 인정하기 싫지


만, 나는 노력파였고 김창수는 천재였다. 내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김창수를 향한 라이벌 의식이 싹텄


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친한 친구가 됐다. 친구를 향한 우정과 경쟁의식. 그런 관념이 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야 인마. 이 형님이 뭘 가져왔는지 잘 봐라.'


민석이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양주인 건 확실했다.


'어? 그거 양주잖아. 어디서 낫냐?'


'우리 집에서 몰래 가져왔다. 자 누구부터 마셔볼래?'


당시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생에 불과했다. 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더라도 취할 때까지 많이 마셔본 일


은 없었고 게다가 양주를 마셔본 애들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서로 주저했다. 그때 김창수가 나섰다.


'야 내가 한번 마셔볼게.'


역시 이런 일에서조차, 너는 나를 한발 앞서는구나. 김창수는 겁도 없이 양주를 종이컵에 따라서 벌컥


벌컥 바셨다. 다른 녀석들도 그제야 조금씩 따라서 양주 맛을 보기 시작한다. 다들 얼굴을 찡그린다.


'아 써 무슨 맛이 이러냐? 우리 아버진 이거 잘 마시던데. 목구멍이 정말 타는 거 같아.'


창수야 너는 괜찮니? 너 설마 술까지 센 거야?


하지만, 김창수도 양주를 한 번에 원샷하고 멀쩡할 정도로 술이 센 녀석은 아니었다. 얼굴이 빨갛게 되어


속이 안 좋은지 가슴 언저리를 주먹으로 친다.


'아 이거 갑자기 술기운 올라온다. 나 토해야겠어.'


창수는 공원 화장실로 가서 구역질을 시작했다. 내가 따라가서 등을 두드려 준다. 한 10분쯤 됐을까.


속이 좀 괜찮아졌는지 침을 한번 뱉고 옆에 있는 벤치로 가 앉는다.


'아 더럽게 어지럽네 다시는 안 마셔야지. 성민아 너는 괜찮냐?'


'난 조금밖에 안 마셔서 그러길래 뭘 그렇게 한 번에 원샷 해버리냐 자식아'


'그러게 토하니까 좀 낫네 야 성민아. 너밖에 없어서 하는 말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오케이?'


'뭔데? 나 입 무거운 거 모르냐?'


'나 6반 강소영 좋아한다. 임원회의 때 처음 봤는데 완전 내 스타일이더라고. 너도 걔 알지?'


'어? 응...'


그럼 알지 강소영 왜 그랬는지 몰라도 솔직히 나는 그때 형태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멋있는


녀석이지 김창수. 이 녀석이 소영이를 좋아한다고? 오늘 강소영을 만나서 좋았던 기분이 일순간에 싹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혼란스럽다. 걱정스럽다.


'야, 나 나중에라도 고백하게 되면 좀 도와주라. 알았지?'


창수가 기억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때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 그런데 그렇게는 못하게


어. 나랑 소영이랑 잘 될 수도 있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소영이를 포기할 수는 없어. 만약에 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든다면,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거야. 넌 정말 대단하고 인기도 많은 녀석이잖아.


꼭 강소영이 아니어도 되잖아.


그날 이후로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소영이에게 연락하고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너를 좋


아한다고. 사귀고 싶다고 너랑 꼭 사귀어야 한다고. 이번에는 정말이지 단호했고 어물쩍 거리지도 안


았다.


그렇게 나는 강소영과 사귀게 됐다. 나는 소영이가 고백을 받아들인 그 시점에서도 김창수 생각이 났


다. 미안했다. 아니,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김창수는 어떻게 행동할까? 우리 사이에 혹시 끼어들지


는 않을까?


그러나 내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괜한 걱정이고 괜한 억측이었다. 그래 돌아보면 내가 못난 놈이


었다. 창수는 사랑보다는 우정을 중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영이와 사귄 뒤 처음 며칠간은 나


와 김창수의 사이가 어색했지만. 어느새 친한 친구 사이로 되돌아갔다. 김창수는 나와 소영이 사이에


끼어들기는커녕 소영이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배려였다. 오히려 소영이가 멋모르고 김


창수에게 인사 걸고 친한 척해도 창수는 무덤덤했다.


'야 김창수 애가 뭐 그러냐? 인사해도 잘 받아주지도 않고. 걔 나 싫어 하나?'


아니, 그 반대야 소영아.


김창수는 나와 이야기할 때, 더 이상 소영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보다 더 의외였던 것은 김창수


가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여자를 사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김창수는 주


변에 여자가 많은데도 아무도 사귀지를 않는 거지? 김창수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수줍게 고백을 해도


여 후배들이 반까지 찾아와 초콜릿을 건네고, 직접 만든 쿠션을 주면서 좋아한다고 해도. 김창수는 이


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학년 때 한 학교 후배와 드디어 사귀게 됐지만 그 관계는 채 한 달도 이어지지


못 했다.


그래, 내가 왜 지금에야 이걸 깨달았을까? 그놈은 역시 대단한 녀석이었다. 녀석은 강소영을 좋아하는


마음을 끝내 접지 못 했다. 하지만 친한 친구를 위해 양보를 하고 있었다. 친한 친구의 사랑에 끼어들만


큼 김창수는 비열한 놈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창수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했지


만, 알고 보면 김창수는 날 위해 자기의 감정마저 포기해버릴 수 있는 놈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예상대로 김창수는 서울대에 합격했다. 나는 서울대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과


는 합격하기 힘든 대기번호였다. 나는 주저 없이 재수를 결정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소영이도 만류


했지만, 나는 확고했다.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인 창수에게 지기 싫었다.


파노라마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다. 골목길이다.


창수가 그런 김창수가 2002년 그날 이후 4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어렵게 소영이 이야기를 꺼내고 있


다. 나는 창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솔직히 창수와 소영이가 사귄


다면,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그게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


기억의 굴레에 김창수와 강소영을 가둬둘 수가 없다.


'나 소영이랑 깨진지 1년도 넘었잖냐. 뭐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 나는 상관 안 해.'


김창수와 나는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를 쳐다보았다.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창수가 비틀거리면 일어선


다.


'휴... 그래도 너한테 말하니까 속이 좀 편해진다. 야 나 이만 집에 가야겠다. 들어가자.'


'응 난 잠깐만 여기 앉아있다가 들어갈게 잘 가라 또 보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멍하게 하늘을 쳐다본다.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별반 달라지는 건 없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나는 가방을 챙기기 위해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집에 가자. 빨리 잠이나


자자. 술집에서 가방을 챙기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소영이다.


'성민아, 지금 가는 거야? 저기... 잠깐 이야기해도 돼? 오랜만에 봤는데.... 말도 못했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나는 소영이에게 화가 난 얼굴로 이렇게 몰아세웠다.


'야 강소영! 왜 그래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 너한테 할 말 없어. 이제는 네 얼굴 보기도 싫고 그만하


자. 우리 제발.'


사실 그렇게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 강소영의 표정을 돌아


보지도 않고 나는 술집을 나와버렸다. 요즘에 손시연을 만나서 얼마나 행복했었는데.... 가슴이 답답했


다. 재수시절, 나는 강소영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이내 끊었다. 그런 것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다.


나는 건물 앞에서 담배를 대여섯 개피나 연속으로 피우고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배터리가 나간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나는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자고 싶다.


#10. 고열


그렇게 나는 아팠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혼자서 아프다는 거 이렇게 서러운 거구나. 나는 집 밖


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하숙집 침대에서 계속 누워만 있었다. 혹시나 해서 서랍을 뒤져 예전에 약국에


서 사다 놓은 감기약을 한통 다 먹다시피 했지만 효과가 없다. 병원에 가야 할 텐데. 귀찮다. 아니, 일어


설 기운조차 없다.


지금 몇 시지? 무슨 요일일까? 헬스장도, 학원에도 며칠간 못 갔겠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을 수는 없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찬물이 피부에


닿으면서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내 감각을 깨운다.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다.


안 피우던 담배를 피워서 그런가? 입이 텁텁하고 목도 답답하다. 나는 물컵에 찬물을 따라서 마시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쪽에 던져두었던 휴대폰부터 충전기에 연결한다. 종료 버튼을 길게 꾹 누른


다. 월요일 밤 10시 오래도 누워있었구나.


휴대폰에서 연달아 진동이 울렸다. 그동안 밀렸던 문자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느라 아우성이다. 이봐


뭐 하다가 이제야 켜는 거야? 마치 이렇게 보채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잘 들어갔냐는 고등학교 친구


들의 문자와 반 친구들의 문자 언제 집에 내려오느냐는 어머니의 문자도 도착해있다. 나에게 특별한


문자도 하나 도착해있다. 손시연으로 부터다.


[아저씨 동창회 재밌었어요~?ㅎ]


일요일 점심 즈음에 도착했던 문자다. 내가 문자를 씹어버린 꼴이 되었네. 미안해


[폰이 꺼져있었어. 미안 지금 확인했네. 동창회 재밌었지~ 학교 잘다녀왔....]


다시 한 번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아 미치겠네. 정말 많이도 밀려 있었군. 손시연에게 문자를 마저 보


내고 새로 온 문자를 확인한다 하.. 어떡하지? 이번엔 강소영이다. 물론 소영이의 번호는 내 전화 목


록에서 예전에 지워버렸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전화번호까지 다 지워지지 않은 모양이다.


[잘 들어갔어...? 나 그날 정말 놀랐어..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이 문자 보면 연락해줘..]


제발. 내가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나랑 지금 뭐 하자는 거니? 대


학가더니 어장관리, 뭐 이런 거 하는 거야 지금? 내가 그렇게 바보 같아 보여? 넌 이렇게 쉽게 문자 보내


고 쉽게 말 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안 그래


재수 시작하면서 너한테 이별 통보받고 정말 힘들었어. 거의 한 달 동안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고. 매일 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다짐했어. 너를 완전히 잊어버리겠다고. 너에 대한 감정이나, 함께 했던


기억 같은 것도 다 지워 버리겠다고. 너랑 마주쳐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 내가 가슴속에서 밀어내자고 그렇게 겨우 조금씩 잊어갈 수 있었단 말이야 너를.


나는 착각했어. 내가 너와 나 사이를 주도한다고 생각했어. 넌 항상 내가 하자는 데로 잘 따라주는 편이


었고 내 기분도 잘 이해해 주려 노력했거든. 한 번도 큰 소리 내거나 화낸 적도 없었고. 그런데 아니야 우


리 사이의 주도권은 너에게 있었어. 난 약자였어. 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나는 반응해야 했고, 신경


써야 했고 가슴 아파야 했어. 네 생각에 괴로워하고 너를 잊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어. 그러니까 제발 그


만 하자 우리. 또 한번 너한테 화내기 싫어 정말이야. 우리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말고 보지도 말자.


꼭 그렇게 하자...


또다시 진동이 울린다. 이번엔 좀 더 길게 울리는 진동이다. 손시연이네 아 정신없다. 정말 신경이 날


키로워져서 그런가. 진동이 한 번씩 울릴 때마다 어지러워.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난 언제나 건강한 놈이


었는데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여보세요?'


'어 아저씨다. 며칠 동안 폰 꺼놓고 뭐 했어요?'


미안하다 손시연 네 얼굴 바라보고 네 문자 볼 때마다 좋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좀 여유가 없어. 내가


내일쯤 다시 연락하면 안 될까?


'응... 좀 피곤해서 자고 있었어. 넌 뭐 해..?'


'어? 아저씨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와 귀신이구나. 응, 조금 아프네. 식상한 표현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래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


'아.... 아니,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가 봐 괜찮아.'


'그래요? 근데 왜 그렇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들리지? 아저씨 아프죠?'


'아니야 괜찮다니까... 무슨 일로 연락했어?'


'아프면, 병원 가요. 그냥 누워있으면 안 돼요.'


'안 아프다고. 안 아프다는데 대체 왜 그래!'


이런, 생각보다 목소리가 컸다. 아 진짜 못난 놈이다. 나 왜 아무 잘못 없는 손시연한테 이래. 바보 같


은 녀석아 어서 사과해 네 기분대로 상대방한테 아무렇게나 내뱉지 말란 말이야,


'아니 아저씨. 웃긴다 밑도 끝도 없이 왜 성질이에요. 갑자기?'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도 한 성깔 있는 앤데... 너무 내 기분만 생각했나 봐.


'아.. 미안 미안해 아팠었는데 지금은 나아졌어. 신경이 좀 날카로워서 그런가 봐. 화난 거 아니지? 목


소리 높여서 정말 미안. 아까 화낸 거 취소할게. 지금 어디야?'


왜 대답 안 해? 어..? 전화 끊어졌다. 어쩌지? 얘 삐졌나 보다. 하기야 안 삐지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나름 걱정해서 전화해줬는데. 다짜고짜 성질이나 부리는 녀석을 누가 좋아하겠어? 손시연 말 틀린 게 하


나 없네. 네가 아니라 내가 진상이다. 진짜 이런 게 진상이 아니면 대체 뭐가 진상이겠니..


나는 마지막 남은 해열제를 입에다 털어 넣고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힘없이 눈을 뜬다. 다행이다 어제에 비해서 훨씬 괜찮아졌다. 정말 불타는 것


같던 열도 조금 내려간 느낌이다. 며칠만 지나면 다 나을 것 같다. 아까 분명히 모닝콜 끄고 다시 누웠는


데, 누구지? 어, 손시연이네. 점심인데 무슨 일일까? 나한테 한판 쏘아붙이려고 그러는 건가? 그래. 차


라리 그렇게 해. 그래야 네 속도 편해지고 내 속도 좀 편해지겠어.


'응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아저씨 집이죠? 저 지금 신촌 가는 중이에요.'


'어? 지금? 너 어디쯤인데?'


'거의 다 왔어요. 15분이면 도착해요. 집 앞으로 갈게요. 내가 연락하면 나와요. 알았죠?'


다행히 화내지는 않네 성질 많이 죽었구나 손에 연 약속도 안 했는데 여길 왜 왔지? 내가 몸 좀 괜찮아


지면 다시 연락하려고 했는데.


세수만 대충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머리도 감을까 하다가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서 모자만 푹 눌


러 썼다. 집 밖으로 나가니까 벌써 손시연이 기다리고 있다.


'아저씨 진짜 아파 보인다. 안 그래도 삭은 얼굴 더 삭아 보여요.'


제발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 지으면서 갈구지 좀 마.


'걱정 마. 다 나았어. 야 어디 가서 좀 앉자.'


나는 손시연을 근처 할리스커피로 데려갔다. 근데 너 아까부터 계속 뭘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


꾸 쳐다봐?


'아저씨 완전히 초췌해요. 지금 병든 동.... 아니... 음.. 뭐랄까... 병든 짐승 같아요. 나랑 병원 갈래요?'


너 분명히 '동물'이라고 하려다가 '짐승'으로 말 바꿨어. 꼭 그런 어휘를 선택해야 돼? 와.. 몸도 안 좋은


데 기분 정말로 좋게 만든다. 눈물 나게 고마워. 너 저번에 내가 잡식동물이라 그래서 복수하는 거지?


'병원은 무슨. 괜찮다니깐. 며칠 동안 조금 열나고 그랬는데. 지금 다 나았어.'


'아니에요. 나 생각보다 힘 안 세서. 아저씨 쓰러지면 못 업고 가거든요? 아 약국 가면 되겠다! 열난다 그


했죠? 잠깐만 기다려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 갑자기 왜 이렇게 허겁지겁 이래? 누구 응급실이라도 실려가는 줄 알겠다. 야야


그렇게 막무가내로 뛰어가지 마. 보는 내가 걱정스럽다. 넘어지겠어. 이러다가 내가 널 업고 가야 될 거


같아. 잠시 뒤 약국에 갔던 손시연이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빈손이다.


'웅... 미안요. 지갑에 천원 밖에 없어요. 돈 좀 빌려줘요. 나중에 꼭 갚을게요. 알았죠?'


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아픈데 내 돈 내고 약 사 먹어야지 어쩌겠냐.


'야 그냥 내가 사 올게.'


'기왕 사 오기로 한 거, 내가 사 올게요. 3분 안에 갔다 오겠음.'


막무가내네.. 자 여기. 아니, 근데 네 지갑은 왜 나한테 주고 가? 무슨 물물교환하니 지금?


이번에는 빈손이 아니다. 손시연은 봉지에다 정말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약을 담아왔다. 고마워. 정


말 고맙기는 한데. 왜 이렇게 생명에 위협이 느껴질까? 너 약장사하는 거 같아. 저걸 다 먹었다가는 병


을 고치기는커녕 약에 중독되겠다. 누구 약 중독자 만들려고 그래?


어라, 너 또 왜 이렇게 정신없게 그래? 뭐 잃어버렸어?


'아 짜증 나. 지갑 놓고 왔나 보다. 약국 또 갔다 와야겠네. 아저씨 잠깐만...'


휴... 너 지갑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다만.


'야 스톱. 여깄어 여기 좀 진정하지?'


'언제 남의 지갑은 가져갔어요?'


말을 말자 갑자기 또 어지러워지려 그래. 너 정말 걱정돼서 온 거 맞아?


'약사 선생님이 이건 밥 먹고 30분 후에 한 알씩이고, 이건 뜨겁게 데워서 먹으면 되고... 이건 밤에 열나


면먹으면 된데요. 아! 그리고 이건 지금 먹으면 된데요.'


너 완전히 팔랑귀구나? 그 약사 자식은 왜 어린애 꼬드겨서 저렇게 약을 많이 팔아먹은 거야?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손시연, 너 수학여행 때 잡상인들 말 곧이곧대로 믿고 물건 사는 스타일이구나.


'이거 먹으라니까요?'


손시연이 내 눈앞에다 웬 약 숟가락을 하나 들이민다. 약에서 딸기향이 난다. 야 이건 아니잖아.


'이거 애들 먹는 감기 시럽이잖아. 됐어. 내가 이 나이에 이거 먹게 생겼냐?'


'어...? 나 저번에 열났을 때, 아빠가 비슷한 거 사다 줘서 먹었는데?'


'네가 그러니까 꼬꼬마지. 어른들은 이런 거 안 먹어.'


'참나. 사다 줘도 뭐라고 그러네. 알았어요. 먹지 마요.'


휴... 알았어. 먹을게. 설마 약 많이 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냐. 먹자 먹어


'아저씨. 나 누구 아픈 거 진짜 싫어 한단 말이에요.'


가만, 너 또 진지한 표정 짓는다?


그래.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아 나. 그러고 보니 나도 똑같아. 가족 중에서 누구 한 명을 잃어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누가 아픈 게 정말 싫었어. 어머니가 아파서 누워만 계셔도 정말 불안했고. 또다시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나를 떠나갈까 봐. 슬프다는 소리도 못 내고 또 그걸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봐.


하다못해 대학 친구들 중에 누가 아파도 약국 가서 약이라도 사다 줘야지 직성이 풀렸어. 너도 그렇구


나? 게다가 너는 중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며.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해 그 기분. 아무튼 고맙다. 이


이렇게라도 신경 써줘서. 혼자라는 기분 들지 않게 해줘서.


잠깐만. 근데..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킁킁 거려? 냄새나니? 미안 나 요즘에 아파서 샤워할 힘도 없었다


구 그러니까 그렇게 불결한 물건 쳐다보듯이 바라보지 좀 말지?


'아저씨. 요즘에 씻지도 않았죠? 땀 냄새 진짜 난다. 웩. 수염 봐 원숭이 같아. 정말 지저분하다. 혼자 사


는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아까 일어나서 샤워하고 면도도 하려고 했는데, 네가 전화했잖아.'


'아저씨. 아무리 아프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게는 살아야죠. 좀 씻고 살아요.'


내가 대체 왜 이 어린 것한테 인간답게 살 것을 훈계 받고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아파서 서러워 죽겠는


데. 꼭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알았어. 앞으로 인간답게 살게. 됐지?


'아저씨. 나 곧바로 학교 가봐야 돼요. 지금 점심시간에 나온 거란 말이에요. 혼자 산다고 라면 같은 거 먹


지 말고 밥 좀 잘 챙겨 먹어요. 저 갈게요.'


너 점심시간에 나온 거였어? 이런, 괜히 아픈 거 티 냈나 봐 나. 무슨 양로원 할아버지가 봉사활동 나온 여


대생 만나러 온 거 같은 기분이야 지금.


'수업 안 끝났어? 그럼 뭣하러 학교에서 여기까지 왔어? 너 점심은 다 먹고 나온 거야?'


'남 걱정하지 말고 아저씨나 걱정하시죠? 전 팔팔하거든요? 늙어서 아프기나 하구.'


그래. 다 부실한 내 잘못이다. 나는 할리스 커피 앞에서 택시를 잡아서 손시연을 태워 보냈다.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는 일이다. 그날 밤 머리를 찌르던 두통도, 온몸에 나던 열도 씻은 듯이 다


사라졌다. 그 약사가 손시연을 꼬드겨서 팔아치운 약 때문에 그런 건 아닐 텐데. 어쨌든 나는 오래간만에 편


하게 두발 뻗고 잘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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