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의 저서에 삽입된 민자영의 사진(추정).
명성황후가 사진찍는걸 극도로 피한 이유는 당시 유행하던 사진에 대한 괴담때문이 아니라
암살위험에 노출되는걸 막기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음.
1. 명성황후는 아무런 기반없이 국정을 흔든게 아니라 고종친정이후 지속적으로 행한 매관매직으로 민씨일파를 급성장시킴. 이는 고종의 친위세력의 성립과정에서 특히 심했는데, 얼마나 극심했던지 스무살도 안된 친척을 당상관 품계까지 올리려다 민씨본인이 '이건 내가봐도 좀 아닌듯 ㅇㅅㅇ'라며 품계를 낮춘 사례도 존재.
2. 다들 국사시간에 배운 임오군란으로 인해 청군이 진주한건 민자영(민비)의 요청이었음. 결과적으로 청군이 진주하고 조약에 의거 일본군도 조선에 진주. 이로인해 민씨일파는 재집권한 대원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사실상 국권침탈의 스타트를 끊음.
3. 이후 민씨정권의 폭정은 극에달해 백성의 분노는 극에달하고, 민영준은 백성들이 하도 씹어대는 통에 이름까지 민영휘로 바꿈. 민영휘는 평양감사로 있을때 특히 백성을 엄청 뜯어먹음. 미국에 넘긴 운산금광 채굴권으로 단돈 2700원을 받았는데, 당시 운산금광의 채산성은 4000만원이었고, 이는 당시 일본제국 GDP 1년치를 약간 상회하는 수치였음.
4. 민씨 본인의 사치도 심했는데, 내탕금을 탕진하고 호조(지금의 재경부)까지 손을 댐. 위에있는 양탄자는 표범 48마리로 만듦. 민자영을 접견한 위안스카이는 '황후의 사치는 서태후 이상이었다'라고 언급함.
5. 황현의 매천야록은 을미사변 당시 한성주민들의 반응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요약하자면 '왜놈들이 국모를 죽여서 분노해야할지, 그토록 학정을 일삼은 민자영이 죽은걸 기뻐해야할지' 헷갈려했다고 함.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