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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4/11) 게시물이에요

목차

1.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일까?





11명만 참석한 마르크스의 쓸슬한 장례식과 불행한 가족사 그러나 수천 명이 운집한 1주기


1883년 3월 14일 마르크스는 65세의 나이로 런던 자택에서 숨졌습니다. 1843년 독일을 떠나 프랑스, 벨기에, 영국으로 이어지는 거의 40년간의 고단하고 빈곤한 망명길을 함께 했던 부인 예니가 1881년 12월에 사망한지 15개월 후였습니다. 엥겔스가 조사를 읽은 마르크스의 장례식은 단 11명만이 참석할 정도로 썰렁했다고 합니다. 사실 마르크스의 런던 생활은 그의 쓸쓸한 장례식처럼 개인적으로는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을 모르던 부인 예니는 생계가 막연했던(비록 엥겔스가 금전적 도움을 주긴 했으나) 타지에 와서 얻은 아들과 딸이 모두 어려서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둘째 아들마저도 8살에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으니 그 마음은 찢어지듯 아팠을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예니는 모두 7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3명의 딸들만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가사일을 도와주던 헬레네 데무트와 마르크스 사이에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마르크스 입장에서는 총 4명의 자식이 그나마 성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까지 살아남은 마르크스의 딸들은 모두 혁명 운동에 투신하면서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았고 라우라를 제외한 두 명은 40살 전후의 짧은 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막내딸 엘레노아와 둘째 딸 라우라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막내딸 엘레노아는 자신을 배신한 연인이 어린 소녀와 결혼하자 얼마 후 독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둘째 딸 라우라는 66세까지 장수했으나 놀랍게도 프랑스 혁명가였던 남편 폴 라파르그와 함께 70살이 넘어 무기력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서(마지막은 공산주의 만세라고 씀)를 남기고 동반 자살했습니다. 유명한 사회주의자 부부의 충격적인 자살로 한때 프랑스에서 70살 이전에 자살하는 유행이 퍼졌을 정도라고 합니다.  (라파르그 부부의 장례식은 경찰의 통제를 받았지만 레닌과 조레스가 참석하였습니다.) 


* 마르크스의 딸들: Jenny Carolina와 Jenny Laura

스웨덴 복지와 사민주의: 2. 마르크스 이론의 배신자(?) 베른슈타인 | 인스티즈



한편 초라했던 마르크스의 장례식과 달리 1884년 1주기에는 그의 무덤이 있는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경찰들이 이를 막느라 진땀을 뺐다고 합니다. 점점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매년 기일마다 마르크스의 무덤에는 이런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1955년 영국 공산당은 기금을 모아 마르크스 무덤에 기념물을 세우기로 하는데 아래 사진과 같은 마르크스의 흉상과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절이 상단에 하단에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 있는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석했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의 마르크스 무덤

스웨덴 복지와 사민주의: 2. 마르크스 이론의 배신자(?) 베른슈타인 | 인스티즈





혁명가들의 가슴뿐 아니라 머리를 강타한 과학적 세계관- 역사적 유물론


영국 공산당이 마르크스 기념물에 새겨 둔 두 개의 글귀야말로 마르크스주의가 관념의 논리가 아닌 행동의 지침서임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졌던 것은 단지 노동자가 세상의 변혁에 앞장서야 한다는 명제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가 스스로를 과학이라고 말하며 자연세계의 합법칙성이 사회과학에도 적용된다고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 사후 저술한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라는 책의 제목처럼 생시몽 등 이전의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유토피아적 사회주의가 판타지였던 반면에 마르크스주의는 뉴턴 법칙이나 패러데이 법칙처럼 과학의 반열에 올랐다고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각하며 강한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모든 인간 사회는 생산력 수준에 대응되는 생산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물적 토대 위에 국가, 종교, 법 등의 상부구조가 생겨나서 사회구성체를 이룬다고 보았습니다. (역사적 유물론과 이탈리아 논쟁에 대해서는 홍기빈 박사의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를 주로 참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산력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 기존의 생산관계에 갈등이 발생하고 생래적으로 기존 생산관계와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생산계급이 세력을 키워 감에 따라 모순이 더 커지고 결국 발전된 생산력에 어울리는 생산관계를 만드는 역사 발전단계의 도약이 일어난다는 것이 당시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유물론이었습니다. 


*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 물적토대(생산력, 생산관계), 상부구조

스웨덴 복지와 사민주의: 2. 마르크스 이론의 배신자(?) 베른슈타인 | 인스티즈



이러한 역사적 유물론은 인류사의 흥망성쇠를 매우 명료하면서도 도식적으로 보여주었기에 당시 꽃을 피우던 새로운 과학문명에 정확히 어울리는 사회과학적 합법칙을 발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젊은이들에게 유레카라는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혁신적 관점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당대 유럽을 지배하던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명쾌한 해석의 틀이 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미 그 경로가 정해진 것으로 어떤 힘으로도 파국에 이를 운명을 저지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 수단 소유의 사적 성격 간 모순(자본 축적의 심화와 빈곤한 프롤레타리아의 급증으로 인한)이 점점 심해지다가 파괴적 공황(높아진 생산력을 감당할 수 없는 구시대의 생산관계로 인한)이 몰려오면서 결국 자본주의 체제 전체가 붕괴하는 날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유물론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모순은 높아진 생산력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수립함으로써 해결되며 이는 사회주의 건설이라고 명확히 제시하였습니다. 홍기빈 박사의 정리에 의하면 이러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사회주의적 의식으로 무장한 노동운동 및 사회주의 정당이며 다른 하나는 높은 수준의 생산력입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 이외의 세력들은 자본주의에 불만을 가지고 있더라도 여전히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인 사유제에 집착하고 있기에 결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고 바라봤습니다. 즉, 자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자영농을 꿈꾸는 농민이나 소상공인 등은 자본주의 사회에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사적 소유를 철폐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또한 사회주의 건설은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혁명을 도모하는 것은 무책임한 모험주의라고 봤습니다. 즉, 아나키스트들처럼 소수가 기획하는 무장폭동이나 테러에 대해 마르크스는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때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할 마르크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세상에 남겨진 제2 인터내셔널의 혁명가들과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마르크스의 명쾌한 분석에 환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다음의 행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말 마르크스주의자들 상당수는 조만간 프롤레타리아들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할 것이고 자본주의 경제는 파국적 위기에 처할 것이며 따라서 궁핍에 찌든 노동계급이 결국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자각하고 사적 소유를 철폐하기 위해 전면적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은 막연히 혁명의 날을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을 조직하고 의식을 개조해 자신들의 주어진 역사적 과제를 깨달을 수 있도록 노동자들을 독려하고 그날이 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핵심적 임무가 되어야 했습니다. 




역사적 유물론은 진짜 과학일까? 또 다른 판타지일까?


기존 공상적 사회주의보다 월등히 우월한 과학적 세계관(과학이라는 강조는 특히 소련 시절 소련과학아카데미 마르크스주의 도식화로 더 강화됨. 예, 양질전화의 법칙)으로 자신을 포장한 마르크스주의였지만 과학에 가까울수록 경제적 결정론이 되기 쉬워 사람들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부분이 애매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1890년대를 전후하여 이탈리아에서는(이 부분은 홍기빈 박사의 책을 참조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결정론적 이해가 널리 퍼졌는데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 및 실천과 무관하게 사회의 역사적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결정론적 관점에 반기를 든 사람이 라브리올라(Antonio Labriola)였습니다. 라브리올라는 역사적 유물론은 생산력 발전과 경제적 토대에 의해 인간 사회가 결정된다는 기계적 결정론이 아니며 생산력 발전에 의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한다고 예언하는 것도 아니라며 결정론적 해석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는 역사적 유물론의 핵심은 생산력이나 여타 저항할 수 없는 역사적 힘 따위의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주어진 사회 경제적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인간들의 집단적 실천과 의지가 어떻게 역사를 움직여왔는가의 문제이며,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핵심은 자본주의라는 조건 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노동계급의 의지와 실천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라브리올라의 실천의 철학으로써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대해 의외의 곳에서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바로 라브리올라의 친구인 크로체가 역사적 유물론과 정치경제학을 아무리 읽어봐야 사회주의 사회의 미래를 도출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 연구에 있어서 사회경제적 관계를 중시하는 하나의 연구 지침에 불과한 것 아니냐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역사적 유물론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노동자 계급의 열망을 담은 노동자 선언에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즉, 사회주의 도래를 과학적 법칙이라고 포장하지 말고 더 좋은 사회를 꿈꾸는 노동자의 열망의 결과로 보자고 한 것인데 그렇게 되면 엥겔스가 비판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차이는 별로 없게 됩니다.   




베른슈타인의 문제제기: 왜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고 있는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논쟁은 그 의미가 무엇이었든 그 후폭풍이 그리 컸던 것 같지는 않지만 사회주의 운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사민당에서 벌어진 수정주의 논쟁의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이 활동한 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와 아우구스트 베벨 등이 주도하여 1890년 창당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1891년 마르크스주의가 골간이 된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합니다. 그런데 에르푸르트 강령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역사적 종말, 노동자 계급의 임무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화려한 수사들이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 구체적 요구 사항을 정리한 뒷부분에서는 참정권 보장, 8시간 노동제, 언론/출판의 자유, 지방자치권의 확대 등을 담고 있습니다. 즉, 앞부분과는 큰 관련이 없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대에 대한 것들이 뒷부분에 포함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에르푸르트 강령을 감수한 사람은 사민당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칼 카우츠키였지만 뒷부분의 실제적 요구를 강령에 넣은 사람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원래 베를린의 가난한 유대인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나 커가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물을 읽으며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법에 단속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자 영국으로 건너가 20년이나 되는 장기간의 망명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망명 생활 기간 동안 베른슈타인은 완고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영국의 페비언주의 노동운동가들이 거둔 개혁의 성과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입니다. 사실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하는 논의에서도 당내 소수파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소수파를 이끄는 폴마르(Vollmar)는 숲 속의 두 마리 새보다 손안의 한 마리 새가 더 가치가 있으므로 당이 생산의 사회화(사회주의 달성)라는 먼 미래의 문제에 집착하기보다는 부르주아 국가권력과 타협하여 노동자의 당면한 문제들을 풀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비록 폴마르의 주장은 강령에 정식으로 채택되지 못했지만 베른슈타인이 써넣은 마지막 부분은 폴마르의 주장과 맞닿아 있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른슈타인은 강령 말미의 구절에 자신의 실용적 요구를 넣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의문을 계속 키워갔습니다. 특히 왜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대로 종말로 치닫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지고 있느냐는 의문이 그것이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의 이런 의문은 폴마르에서 볼 수 있듯이 비단 개인만의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베른슈타인은 1898년 1월부터 당 기관지인 노이에 차이트(새 시대)에 마르크스의 핵심 명제들을 비판하는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에 대한 붕괴론과 혁명론을 비판하며 의회에서 다수 석을 차지하는 현실적 권력 장악 목표를 세우고 입법활동읕 통해 노동자의 권익을 높이자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자본의 지속적 독점화가 가속화되어 빈곤 상태의 노동 계급이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은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며 마르크스 경제학은 더 이상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언제 올지도 알 수 없는 자본주의 붕괴론에 더 이상 목을 매달지 말고 그동안 등한시했던 개혁주의적 방법을 적극 채택하여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을 돕자는 것이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의 주장을 마르크스주의자의 수정주의 선언(the Manifesto of Marxist Revisionism) 이라고 불렀습니다. 


* 수정주의를 내세운 베른슈타인과 조레스

스웨덴 복지와 사민주의: 2. 마르크스 이론의 배신자(?) 베른슈타인 | 인스티즈



하지만 베른슈타인의 논문 게재는 당내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발로 중단되었습니다. 칼 마르크스 이래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는 칭찬을 받았던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하여 레닌과 레닌의 스승이었던 플레하노프 등 저명한 국제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사민당 기관지 편집인으로 베른슈타인의 논문 게재를 직접 허용했던 카우츠키마저도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배신했다며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사실 1890년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10년 안에 유럽의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1873년에서 1886년까지 공황이 이어졌고 미국과 독일에서 중화학 공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거대 독점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노동운동도 거세지고 있었기에 파국이 임박했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생각은 세기말이라는 숫자가 주는 묘한 마력과 함께 급격히 고양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른슈타인의 논문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한테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며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에 대한 발칙한 도전이었고 한발 더 나아가 계급의 적들을 이롭게 하는 위험한 행위로 비추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를 떠나면서부터 하나의 유력한 사회과학 이론이 아니라 정치적 권위를 보장받는 무오류적 교리로 변해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은 당내에서 표면적으로는 배척되었지만 유럽 곳곳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베른슈타인이 말한 대로 점점 의회주의 투쟁을 벌여나갔고 입법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0세기가 가까워지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더 승승장구하였고 독일 등 선진국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상승하였으며 억압적 정책들도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독일만 해도 이미 1880년대 들어 여러 사회복지 입법(산재보험, 질병보험, 연금보험, 의료보험)이 도입되었으며 1890년에는 반사회주의법이 철폐되어 정치적 자유도 크게 신장되었습니다. 사실 이 시기는 화려한 빅토리아 시대의 말기로 선진국에서는 자본주의의 쇠퇴 징조는 커녕 생산력의 증대 속에 자본가의 부와 함께 노동자의 처우도 개선되던 때 였습니다.


스웨덴 복지와 사민주의: 2. 마르크스 이론의 배신자(?) 베른슈타인 | 인스티즈


물론 베른슈타인의 공격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적 기반이 무너졌거나 괴멸적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레닌은 베른슈타인의 문제제기에 대해 제국주의론을 들고 나와 왜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고 있는지를 나름 이론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다음에 다룰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바뀌어 나갔고 이제는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모국이 등장하면서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럼에도 베른슈타인이 사회주의를 배신했는가 생각해 보면 베른슈타인이 독일 제국의회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나중에 1차 대전의 참전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신들을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작금의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유효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 본 연재글의 참조문헌은 여러 권의 책과 잡지, 논문 및 인터넷 자료입니다. 주요 참고 서적은 사회민주주의의 시대(프랜시스 세예르스테드), 노동지배의 이념과 전략(김수진),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홍기빈), 경제성장과 사회보장 사이에서(엔뉘 안데르손), 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하수정), Armageddon Averted (Stephen Kotkin), PostCapitalism: A Guide to Our Future (Palul Mason), The Russian Revolution (Daniel Turner), The Nordic Model of Social Democracy (Brandal et. al.), The Nordic Model-challenged but capable of reform (Valkonen et.al.), The Nordic Model (Mary Hilson)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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