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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그녀들을 가정의 공간으로 위치 지어놓고, '내조자' 내지 '청와대의 안주인'으로 한정짓는 모습은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그녀들도 대외적으로 활발한 사회생활을 하고, 사회적 지위도 가지고 있을 터인데 가정안으로 그녀들을 묶어 두는 접근 방식은 우리 언론의 가부장적 시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언론의 두 얼굴이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 쪽으로는 여성의 인권과 양성평등을 얘기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활약은 가정내의 안정과 평화를 지탱하는 아내로서의 역할이 수행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론이 유포하는 영부인의 덕목 역시 정치적 역할과 사회적 책임감, 사회 전반에 대한 인식수준이 아니라 알뜰한 살림솜씨, 남편에 대한 내조, 아이들에 대한 풍부한 모성이다. 우리 속담에 '베갯밑공사'라는 것이 있다. 잠자리에서 아내가 바라는 바를 남편에게 속삭여 청한다는 뜻이다. 사극이나 역사 드라마를 보면 조선시대 수많은 국왕들이 후궁들의 '베갯밑공사' 즉, 개인의 욕망과 권력욕으로 인해 엄청난 살육과 피를 부르고, 수많은 정치적 실정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영부인의 역량과 자질, 인물 됨됨이와 세계관, 사물의 배면을 뚫어보는 시각이 직간접적으로 대통령의 업무수행과정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그 만큼 영부인의 공적 영역에서의 역할과 자질이 중요함에도 여전히 언론은 시대에 역행하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필자는 지지자도 많고 적도 많은 영부인을 원한다. 육영수 여사처럼 모든 국민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 몸에 받은 인자한 모성의 어머니가 아니라, 잔 다르크 같은 열정과 리더십을 가진 철의 여인을 원한다. 적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분명치 않고, 뚜렷한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육영수 여사가 그랬다. 그녀의 국민장이 치러질 때 반도 전체가 눈물 바다가 되었다고 하니, 분명 그녀는 국가의 어머니였음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실정과 정치적 과욕을 잡아주고, 한국 사회가 민주화로 나아가는 데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랑과 모성의 어머니로서, 그녀의 역할은 남편의 잘못 쥐어진 칼자루를 고쳐주기 보다는 칼자루가 지나간 자리의 아픔을 달래주고 피를 닦아주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힐러리 같은 적도 많고, 욕도 많이 먹는 영부인을 바라는 것은 요원한 것일까. 나는 하나같이 인자한 웃음을 띠며 육영수 여사의 모습을 닮으려는 그녀들의 속내가 읽혀져 불편하다. 분명 그녀들 중에는 힐러리에 버금가는 사회적 능력과 자질을 가진 이가 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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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무시하고 ㅇ씨라고 붙이는건 그 분의 역할을 한정시키고 싶은 마음을 내포하는 건 아닌가 싶었고, 마침 제 생각과 비슷해보이는 오마이뉴스 2002년도 기사가 있길래 퍼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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