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 Dance'
프랑스 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기숙제 발레스쿨
매년 유럽 각지에서 10대 소년 소녀들이 최고의 무용수가 되기 위하여 이곳으로 모여든다.
난 오로지 춤을 향한 열정 하나만으로 바다를 건너 온, 이 학교의 유일한 동양인 학생.


다른 예술학교와 다를 바 없으나, 다만 이곳에는 하나의 특별한 관례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후원 제도'
학생들이 무용수로서 자립하기 전 까지 후원자가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으로,
학생들의 옷차림 부터 생활의 질 까지, 후원자의 유무는 우리에게 하늘과 땅 만큼의 차등을 부여한다.
그러나 동양인이라는 특이점 때문일까, 난 이제껏 단 한명의 후원자도 가지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언제나 토슈즈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신세이다.

최고의 발레리나, 화려한 백조가 되기 위하여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
이곳에서 여시가 만나게 된 남자는 누구일까?
1.
부유한 후원자
MARVIN

토슈즈 안의 압정, 찣겨진 레오타드, 등 뒤에서 들려오는 키득거리는 비웃음...
학교에서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사실은, 동급생들에게 있어 좋은 괴롭힘 거리밖에는 되지 않았다.
수년간 지속되어온 따돌림 속에 철저하게 고립된 나는,
고독속에 이를 악 물고 더더욱 발레에 집중했고, 결국 상급반으로 올라가는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더더욱 시기어린 시선을 받게 된 나. 그렇게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던 가운데에,
어느날 아침, 여느때와 다름없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던 내 귀에 흥분어린 목소리가 날아와 박힌다.
"얘들아! 오늘 정말로 그 분이 오신대!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리나케 뛰어다니며 슈즈를 신고, 몸을 풀기 시작하는 아이들.
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분' 이라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에 소란스러움이 잦아들고,
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신사 한명이 교장선생님의 뒤를 따라 들어온다.
아이들의 관심은 모두 그 말끔한,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림새의 남자에게 집중되었다.

"무슈, 소개드리죠. 이쪽은 학교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의 상급반 아이들입니다.
몇명은 벌써 유수의 발레단에서도 스칼라쉽을...."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고서는,
한없이 지루함에 가까운 어투로 대꾸하는 것이다.
"아뇨, 소개는 됐습니다. 춤 부터 먼저 보도록 하죠."
그에 우리는 황급히 자리를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학생들.
남자는 연습용 가로대 사이를 천천히 지나며 우리를 훑어본다.

그런데 그가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팽팽하게 뒤로 당겨지는 리본.
아차 싶은 찰나, 콰당! 난 그의 발치에 요란하게 엎어지고, 그의 구두 위로 울컥 코피를 터뜨리고 만다.
음악 조차 멈춘 채 얼음같은 침묵이 깔린 주변. 난 시퍼렇게 질린 채 천천히 시선을 올린다.
남자는 코트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채, 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무, 무슈, 죄송......"
그러나 황급히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꾹 눌러오는 그의 손.
귓가로 고개를 숙인 그에게서, 내게만 들릴 정도의 낮은 속삭임이 흘러나온다.
"내 관심을 끌고싶었다면, 좀 더 품위있는 방법을 사용했어야지..."
남자가 떠난 후 몇시간동안 교장선생님에게 호되게 혼이 난 나는,
결국 날이 샐 때 까지 차가운 복도에 꿇어앉아 양동이를 들고 있어야만 했다.
최악에 가까운 첫인상 때문이었을까. 어떻게든 남자의 눈에 들어보려 들떠 있는 동급생들과 달리,
난 그와 다시 만날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중간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언제나와 같이 해가 질 때 까지 연습실에 홀로 남은 채 연습을 하고 있던 나.
그런데 빙그르르, 그랑 훼떼를 도는 순간, 빠르게 도는 시야 사이로 잡히는 낯익은 얼굴에 난 당황하여 멈춰선다.

"왜 멈추지? 계속해."
난 당황했고, 그 순간 그에게 아직 정식으로 사과의 말을 건네지 않았단 사실을 재빨리 떠올린다.
"무슈, 저번의 일은, 정말이지..."
"무슨 일?"
".....어, 저, 저번, 그러니까, 제가, 무슈의 구두에..."
식은땀을 흘릴 지경이 되자 빤히 날 쳐다보던 그가 짜증스럽게 되었다는 듯이 손을 내젓는다.
"더듬는 꼴을 보아하니, 네 선생이 행여나 돈줄이라도 끊길까 어지간히 혼을 낸 모양이구나.
걱정 말라고 해. 기부금 액수에는 변함이 없을거라고. 그건 그렇고... "
쯧 하고 혀를 차며 흘러나온 말.

"....이런걸 신고 하니까 그런 형편없는 훼떼가 나오지."
난 그의 시선이 거의 너덜거리기 시작한 신발을 향해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치부를 들킨 것만 같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나는 얼른 발을 뒤로 뺀다.
그런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묻는다.
"후원자가 없나?"
"......"
"그러고 보니, 며칠 후가 중간 시험이라지?"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제게 새 슈즈 한벌이라도 사주시려구요?"
난 괜스레 욱하는 마음에 뾰족하게 쏘아붙였고, 남자는 그에 빙긋 웃어보이며 이렇게 대꾸한다.
"안될것도 없지. 하지만 공짜는 아니고. 입맞춤 한번이라면야."
난 모욕감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 얼굴을 붉히고는 말한다.
"...무슈,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농담이 아닌데. 시험을 위해서는 좀 더 좋은 신발이 필요하지 않나?"
그 순간, 화를 내려던 내 머릿속에 내 슈즈와 옷차림을 보며 키득거리던 동급생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그런 내 머뭇거림을 알아차린 남자는 허리를 숙이더니, 내 눈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다.
"고민할 것도 없잖아?"
입술을 지그시 깨문 나는, 그의 멱살을 쥐고는, 확 그를 내쪽으로 끌어당긴다.
쪽.
이가 부딫혔는지 입술이 얼얼했고, 난 재빨리 떨어져나갔다. 감촉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만큼 짧고 서툰 키스.
그러나 남자는 그저 부드럽게 웃음을 짓는다.

"......토슈즈 값으론 조금 부족한 것 같지만... 기대해도 좋아."
그 다음날, 난 내 이름앞으로 배달 된 커다란 상자 하나를 받게 되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금박이 입혀진 검은색의 포장을 뜯어내자, 모습을 드러내는 내용물.
요란한 탄성이 터지고, 난 꿈을 꾸는 듯한 심정으로 그것을 어루만진다.
기대해도 좋다는 남자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건 정말이지, 내가 평생 본 중 가장 아름다운 토슈즈였으니까.

며칠 후, 중간시험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이끌어낸 나.
아이들의 시기어린 시선을 받으며 난 날아갈듯한 기분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이런 식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후원자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몇달이 지나도록 여전히 후원자는 감감무소식.
다만 그 이후, 나는 어쩐 일인지 남자의 얼굴을 보는 일 만이 매우 잦아졌다.
홀로 남아 연습을 하는 날이면 꼭 한번씩 얼굴을 비추며 내 실력에 온갖 악담을 퍼부어 대는 그.
내가 그의 참견에 못이겨 짜증을 내거나, 참지 못하고 씩씩거릴 때면
그는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곤 하는 것 이었다.

"훌륭한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관객의 쓴소리 정도는 감수할 줄 알아야지."
그러나 그에 대한 내 불편함과는 별개로,
난 첫번째 거래 이후 망설이면서도, 항상 남자에게 필요한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물건들에는 대가가 따랐다.
언제나, 키스 한번.

난 입맞춤을 하면서도, 그가 언제 돌변하여 내게 음흉한 손길을 뻗거나 저질스러운 요구를 하게 될지 모른다고 여겼으나,
그는 시간이 지나도 내게 결코 짧은 입맞춤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내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그저 뒷짐을 진 채 기다리다가,
내가 한참의 망설임 끝에 까치발을 들 때 즈음에서야 허리를 숙여 오곤 했다.
그리고 나서 입술이 마주 닿기 전 짧은 순간 마주친 남자의 눈빛은, 언제나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다.
아주 잠깐의 부드러운 온기. 그럴 때면 난, 분명 이 행위는 아무 의미도 없을텐데도...
한없이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한다.
그렇게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던 어느 날,
캐비넷 안에서 분명 매진되었을 것이 틀림 없는 발레 티켓을 발견한 나.
난 수업이 끝난 후 마주친 남자에게 당장 그것에 대해 따져 묻는다.
"티켓, 당신이 보낸거죠?"
"그럼 나지, 산타클로스겠어?"
태연한 대답에 도리어 할말을 잃은 나. 그는 그런 내게,
거절이란 있을 수도 없는 일 이라는 듯이 말한다.
"여덟시 까지 오페라 하우스야."
내가 왜 거길 가? 무슨 의도인줄 알고? 하루 종일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으나,
결국에는 그가 말한 시간에 난 오페라 하우스를 향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에스코트하는 그.
객석에 앉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남자의 의중을 알지 못해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곧 공연이 시작되고, 불이 다시 켜질 즈음에 난 거의 황홀한 기분에 빠져들어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를 나서며 나는 흥분에 겨워 마구 지껄인다.
"맙소사, 그녀가 움직이는 것 봤어요? 나도 그렇게 출 수만 있다면...."
"그래, 그래."
한없이 들떠 공연에 대해 재잘거리는 내게 못말리겠다는 듯한 웃음으로 대답하는 그.
이후 와인에 근사한 식사까지 대접받은 나는, 몇시간 후엔 완벽하게 긴장을 풀려 있었다.
고민같은 것은 까맣게 잊은 채, 호사로운 저녁시간에 흠뻑 취한 나.
남자는 그런 내 수다를 말없이 들어주다, 시계를 보며 이야기 한다.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은걸."
"좀 더 있다가 가면 안돼요?"
거의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에, 남자는 가만히 멈춰선다.
무표정한 그는 마치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내 머리맡에 걸터 앉아, 살짝 상체를 기울이더니, 속삭이는 것이다.

"몇신지는 알고 있어?"
"알아요. 근데 조금만 더...."
내 말을 차분히 끊고는 말하는 그.
"이것도 나쁘진 않지만 말야.
요즘 날 지나치게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
그 순간 나는 술기운이 모조리 가시는 듯 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난 당황한다.
너무 예의가 없었나? 난 얼른 상체를 세우며 변명한다.
"미, 미안해요 무슈, 난, 신사분이랑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는 빤히 나를 내려다보았고, 곧 그의 손이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이 내 셔츠 카라 부분을 느릿하게 쓰다듬는다. 낮게 깔린 눈빛.
난 왜 그러냐고 묻고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의 손가락 끝이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친다.
마땅한 스킨쉽이 없음에도 나는 얼굴이 자꾸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다가온 그의 옷깃에선, 내가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아주 좋은 향수냄새가 난다.
남자가 살짝, 검지손가락을 쇄골 아래로 밀어넣더니, 내 셔츠를 그대로 손가락으로 주욱 잡아당긴다.
나는 저항없이 끌려갔고,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아주 낮게 속삭였다.
"그 얘기가 아닌거 알잖아?"
내가 침을 삼켰고, 순식간에, 아주 미묘한 기류가 흘러 지나간다.
그러나 곧 남자는 손을 떼더니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일어나."
"......네?"
"바래다 줄테니까, 일어 나라고."
기숙사로 향하는 길, 차 안은 내내 침묵이었다. 도착했을 때에 나는 어색하게 입을 연다.
저기, 고마워요. 그러자 짧게 돌아오는 대답. 내일 전화해.
사라져가는 차의 귓꽁무니를 바라보며, 나는 술기운이 전혀 없음에도 멍했다.
결국 아침까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나.
그런데 다음날 아침, 연습실로 향한 나는 날 쳐다보는 시선이 유난히 많다는 것을 느낀다.
위아래로 훑어보며, 수근거리는 아이들. 난 의아함과 함께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고,
아니나 다를까, 곧 교무실로 호출이 떨어진다.
"소문이 돌고 있단다. 네가 무슈 마빈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게다가 지난 새벽에 네가 그분의 차에서 내리는걸 보았다는 아이가 있어."
"......."
"넌 정숙한 아이인줄 알았는데. 이건 그분의 평판에도 아주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될게다.
말해보렴. 정말로 후원을 받는 대가로 불순한 거래를 했니?"
난 온몸의 피가 마르는 듯한 기분속에 서 있다가, 입술을 떨며 대답한다.
"... 그분과 그런 로맨틱한 스캔들이 터질 만한 일은 추호도 없었어요.
단지 그분은 아주 부유하니까, 그분과 친하게 지낸다면,
금전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실인가요, 무슈 마빈?"
난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고, 거기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난 그저 홀린듯이 말을 쏟아낸다.
"돈이 필요했어요. 또, 새 슈즈가 필요했다고요... 그래서, 그래서......"
"알겠어."
조용한 한마디에 난 심장이 떨어지는 듯 하다.
그의 약간 창백해진, 조금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표정.
"이젠 연락하지 않으마."
이후로 그는 정말로 나를 더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 난 밤마다 그가 마지막으로 주었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몇달이 지나도록, 끝내 그 번호를 누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나는 내게 후원자가 생기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는 첫 만남에서 춤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그저 뭔가 내 몸 만을 집요하게 훑어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난 그저 후원을 받게 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여겼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저녁식사에 응한 나.
맥 없는 대화를 이어가던 중, 난 갑자기 허벅지를 짚어오는 손길에 깜짝 놀라고 만다.
".....지금 뭐하시는거에요?"
남자는 내 반응이 우습다는 듯이 대답한다.
"여기까지와서 뭘 얌전빼는거야?
어차피 너, 이 전에도 몸을 주는 대가로 후원을 받았다면서?"
난 충격으로 굳어져있다가 치맛속으로 파고드는 손길을 거칠게 밀어낸다.
거센 반항끝에, 간신히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 찬 채 맨발로 그의 집을 뛰쳐나온 나.
울면서 거리를 떠돌던 나는 간신히 근처의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남자가 내게 쥐여주었던, 몇번이고 걸까 망설였던 쪽지의 번호를 누른다.

뚜르르...뚜르르...........
긴 신호흠 끝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나 난 목이 메여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참동안의 침묵끝에, 그가 말해온다.
[......어디야?]
"고, 공원 앞, 공중전화..."
난 헐떡이며 대답했고, 또 한참의 침묵 후에 그가 대답해왔다.
[거기 있어. 움직이지 말고.]
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달려온 그.
나는 그가 평소와 달리 엉망진창으로 옷을 기워입은 채 급히 달려나온것이라는걸 깨닫는다.
난 여러가지 감정이 뒤죽박죽 된 채, 차마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떨군다.
그런데, 그런 내 발치에 쭈그려 앉는 남자. 그는 곧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고,
난 그것이 발레슈즈라는것을 깨닫는다.
"...이번엔, 입맞춤은 필요 없어. 이건 그 날 주려고 했던 거야."
"........."
"그 날 네게 말하고 싶었어. 줄 곧, 사실 키스는 핑계에 불과했다고..."
흙투성이가 된 내 발에 조심스럽게 그것을 신겨주는 그.
난 그의 떨리는 손길에, 그가 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순간 난 울음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오는것을 막을 수 없었고,
내 웃음소리에 고개를 든 그의 뺨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결코 짧지도, 서투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크게 뜨인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마디를 조용히 속삭인다.
그러자, 곧장 더없이 열정적으로 돌아오는 그의 키스.....
"슈즈는 필요 없어요, 무슈......"

참고영화: 연인
2.
상급반의 에이스
KENNY

그는 학교의 유망주이자, 화려한 수상기록과 흠잡을 곳 없는 실력으로 상급반의 에이스인 소년.
그는 언제나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둘러쌓여있다.
누군들 그와 만년 꼴등 신세를 면치 못하는 내가 접점이 있을거라고 상상이나 하련만,
난 정말이지 아주 우연히, 아주 오래전 그의 비밀을 엿보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아직 중등부에서 고군분투하던 시절,
난 춤을 추다 실수라도 할 차에는 나를 무슨 벌레라도 보는 듯한 케니의 시선에 항상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밤 산책을 나섰던 어느날,
난 우연히 어둑한 정원 한 가운데에서 밀애를 나누고 있는 두 형체를 발견한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곧장 들려오는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잡아챘다.

"케니, 네 피부는 정말 곱구나..."
황홀한 듯 이어진 여자의 목소리.
난 어둠속의 창백한 얼굴이 그 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순간, 거짓말처럼 그와 시선이 맞딱드린다.
얼음처럼 냉랭하게 굳어지는 그의 얼굴. 나는 주춤 뒷걸음질을 치다 자리에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다음 날, 연습실을 향해 가던 순간,
누군가에게 손목이 틀어잡혀 창고로 내동댕이 쳐지고 만 나.
날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것은 바로 케니였다.
겁에 질려있는 내 멱살을 잡아 올리며, 차갑게 으름장을 놓는 그.
"어젯밤 본 일에 대해 한마디라도 떠들고 다녔다간, 네 목을 비틀어버릴 줄 알아."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난, 겨우 떨리는 목소리를 낸다.
"그 사람, 남작 부인 맞지? 도대체 왜...."
"그게 뭐?"
그는 내 옷깃을 틀어쥐며 위협적으로 속삭인다.
"난 그여자가 원하는걸 주고, 그여자는 날 경제적으로 후원해주는 것 뿐이야. 이용하는게 뭐가 나빠?"
그의 타오르는 눈빛에 나는 잠시 할말을 잃는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내 입술에서 더듬거리며 흘러나오는 속삭임,
"하지만,... 하지만,
그런짓 따위 하지 않아도 네 춤은 충분히 아름다운걸......"
아차 싶었을 땐 이미 엎질러진 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았을 떄,
이번에는 정 반대로 그가 할말을 잃은 듯 굳어있었다.
그리고 곧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얼음처럼 냉랭하던 그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이었다.
난 내 눈을 의심했고, 그에 그가 휙 몸을 돌리며 날카롭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다.

"....너, 진짜 입만 벙긋 해봐!"
그런데 그렇게 으름장을 놓은것 치고는 괴상하게도,
그 이후로 난 그와 마주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는 마치 날 감시하겠다는 듯이 굴었지만, 그런것 치고 그의 행동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수준이 맞지 않는다며 번번이 파트너를 갈아치웠던 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음 파드두 상대로 나를 지목한 것이었다.
난 얼이 빠져서는 그에게 묻는다.
"너, 정말 나랑 출거야?"
그런데 되려 그는 그런 것을 묻는 내가 괴상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는 것이다.

"그럼, 네 실력을 커버해줄 만한 파트너가 나 말고 누가 있는데?"
그리고 그와 파트너를 이룬 시간동안 내가 거의 지옥에 가까운 훈련에 시달리며,
눈물이 쏙 빠지는 날카로운 비난을 들었던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그렇게 지속된 인연은 예상외로 긴 시간을 계속되어,
상급반에 올라올 즈음까지도 우리는 투닥거리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가 날 갈구며)
이론 수업을 같이 듣는 등, 제법 긴 시간을 붙어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난 어느날, 혹시 그가 날 정말 '친구' 로 여기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비집어 올라왔다.
난 그가 내 물음에 한없이 경멸에 가까운 시선으로 나를 뜯어볼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대놓고 물어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그야말로 놀라움에 가까웠다.
"....야, 혹시 우리 친구야?"
그러자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대답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으나, 난 그것만 해도 대단히 낙관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제껏 그 누구하고도 이토록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동급생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마저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치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은 '우등생'이 '열등생'을 가르쳐주는,
이를테면 그가 나를 돌보아주는 봉사활동 차원의 관계 즈음으로 인식하게 된 듯 했다.
물론 그 누구보다 까다롭기 그지 없는 그가 내 실력에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사실 그것 외에는 달리 내게 이점이 없는 관계였다. 그는 정말이지 비위를 맞추기 어려운 상대였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까다로운 데다가, 오만하기 짝이없지, 매번 내 실력에 트집을 잡고...
그러나 언제나 툴툴대면서도 꼭 제 후원자에게 받은것이 있으면 내게 한아름씩 던져주거나
성질을 내면서도 내가 물어보는 것이 있으면 몇시간이고 붙잡아주고있는 그.
... 물론, 나도 그런 그가 영 싫지만은 않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나도 후원자가 필요해진 시점.
그런데 정말 괴상하게도, 내가 후원자들을 만나러 간 날이면 언제나 앞서 케니가 있거나,
토 슈즈의 바닥이 틑어져 있다거나, 예기치 않게 옷의 옆구리가 틑어지는 둥의 괴상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케니의 짓임을 알아채지 못할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게 다섯번째로 후원자에게 퇴짜를 맞았을 무렵, 결국 참다못해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채로
그의 방으로 뛰쳐들어간 나.
"야! 너 대체 뭐가 문제야?"
그러자 침대에 기댄 그는 책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네가 지금 내 독서를 방해하고 있어. 그게 문제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대체 뭐때문에 내가 후원자를 가지는게 아니꼬운건데?"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올리는 그.
그는 나를 바라보며, 가르치듯 천천히 말한다.
"넌 아직 후원자가 필요 없어.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럼 넌 필요하고?"
"넌 지금 어차피 있으나 마나잖아, 그 실력으로는..."
난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열이받아 확 배게를 집어던진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내일도 방해하기만 해봐. 진짜 다신 너 안볼줄 알아."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내 말에 도리어 차갑게 얼굴을 굳히는 그.
"그 새끼들이 널 쳐다보는 눈을 봤어? 너, 정말 그정도로 순진한거냐고?
널 발가벗기듯이 쳐다보는 그 역겨운 눈을 봤냔 말야?"
"맙소사, 고작 그것때문이야? 쳐다보는게 어때서? 춤을 봐야하니까 그렇지!"
그는 콧방귀를 뀌었고, 난 그 순간 욱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후원자가 죄다 너랑 남작부인 같은 관계인줄 알아?"
실수를 깨달았을 때에 말은 이미 입을 떠난 후였으므로, 난 그 자리에서 새파랗게 얼어붙고 만다.
난 그가 불같이 화를 낼거라 예상했으나, 그는 그저 가만히, 무표정하게 날 쳐다보더니 책을 덮는다.
그리고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는 않지."
".....미안, 난, 그럴생각은...."
그런데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게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침착했으나, 난 그가 전에없이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실대로 말해 줄까? 네가 오디션이고, 후원자와의 만남이고 번번이 다 퇴짜 맞는 이유."
"........"
"그건 말이지, 나 때문이 아니야.
그냥 네 발레가 오리새끼가 뒷발로 뒤뚱거리는 것 만큼이나 볼품없기 때문이라고."
그건 그가 내게 쏟아붙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악담이었으나,
난 그의 어조가 더없이 냉랭하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렇기에 난 그 어느때 보다 더욱 그의 말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확 얼굴이 붉어진 난 그에게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하는데, 순간 내 팔목을 움켜잡는 손.

"그러니까 차라리 나한테 개인 교습이라도 받는건 어때?
그 잘난 후원자들 보다 값은 훨씬 싸게 쳐 줄 테니까."
그 다음 일어난 일에 난 어리둥절했고, 곧 기겁하고 말았다.
그가 내 뒷목을 끌어당겨 내게 입을 맞춘것이었다. 난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으나, 꿈쩍도 하지 않는 그.
가느다란 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사납게 날 끌어안은 그가 내 목에 입술을 묻으며 날카롭게 묻는다.
"싫어? 내가 더러워서 그래?"
".... 이것 놔!"
난 손에 잡히는 것으로 거세게 그의 얼굴을 향해 내던진다.
책모서리에 맞고 찢어진 그의 이마. 그의 창백한 뺨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참동안 숨을 가다듬던 그가, 곧 내게 속삭인다.
"나가."
"........."
"더 하고 싶은거 아니면, 나가라고."
난 주춤하다 결국 그를 뒤로 하고 방을 뛰쳐나왔다.
그 날을 기점으로 우리의 사이는 더없이 어색해지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를 피해 다닌 것 이지만.
그렇게 며칠, 몇 주, 그리고 몇 달 동안 얼굴 한번 마주대지 않은 우리.
난 그동안 울적한 기분을 감출 새가 없었다. 마음속 어디선가 정말로 그를 친구로 여기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멍하니 있을 때면 입술을 어루만지는 버릇이 생긴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난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혼란스럽다.
그리고 졸업이 가까워져 온 시점,
난 그가 아주 유명한 발레단의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매일같이 복도에서 들려오는 그에 대한 소문과 찬사들.
난 먼 발치에서 그가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것을 바라보기만 한다.
그와 더욱 멀어진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난 더욱 이를 악물고 연습에 매진했다.
슈즈 몇켤레가 모두 닳도록. 그렇게 밤 늦게 정신없이 연습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내가 잠시 집중력을 잃고 기우뚱 한 순간, 허리를 강하게 잡아오는 손길.
그가 날 빙그르르 돌리고, 난 그대로 그 새 한 뼘은 더 자란듯한, 더욱 어른스러워진 얼굴의 소년을 마주본다.
"..... 축하해."
난 몇번이고 연습했던 말을 겨우, 그의 얼굴 앞에서 내뱉는다.
그는 그저 덤덤히 그 인사를 받는다.
"고마워. 네 오디션은?"
"... 떨어졌어."
"그것 참, 보는눈이 없네."
난 헛웃음을 터뜨린다. 내 실력이 형편없다고 욕하던것에 누군데.
"네가 내 발레가 볼품없다고 했었잖아? 당연한 결과지 뭐...."
"....알잖아."
그가 조용히, 숙여진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며 속삭인다.
"그건 그냥 널 화나게 하고 싶어서 했던 말이야."
난 울음이 나오려는것을 꾹 참았다. 그가 내 어깨에 두 팔을 올려 내 목뒤로 감싸안는다.
"이번에 내가 성공적으로 데뷔 무대를 마치면, 받게 될 연봉이 제법 어마어마 해.
후원따위는 이제 필요 없을 정도로 말이야."
"......"
"난 당연히 성공적인 것 이상으로 잘 해낼 자신이 있어.
그래서 말인데,"
그의 아주 예쁜 두 눈동자가 내 눈 앞에서 말한다.
"네가 아직 후원자가 필요할 것 같은 느낌인데."
그건 내가 들어본 중 가장 다정하고, 애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난 그제서야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웃음을 터뜨린다.
난 그의 입술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내 발레가 형편없어도 상관 없어?
그러자 그가 내게 입술을 맞대 오며 웃음과 함께 대답하는 것이다.

그런 적 없어.
게다가 말야 사실, 넌 내 파트너 중 가장 예쁜 파드되를 추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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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입니다
'후원자' 라는걸 좀 저급한 방식으로 묘사했는데,
현실과는 명백하게 다릅니다! 부디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세요!!
그리고 발레 쥐뿔도 몰라서 어색한 점이 많을겁니다 ㅠ.ㅠ 양해 부탁드려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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