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으로 인해 명나라 황제로부터 도독인을 받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렇게 판단하지 않으면 진린과 이순신 두 사람의 관계에서 여러가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숱하게 남기 때문이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작성한 <충무공 행록> 등 일부 사료에서는 포악한 진린이
유독 이순신 앞에서만 얌전한 것은 고금도에 도착한 첫 날부터 대접을 잘했고,
절이도해전에서 얻은 수급을 진린에게 바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배웅 나온 청파 들에서 그렇게 나니처럼 굴며 조선수군의
지휘권을 두고 임금을 협박하던 진린이 겨우 음식 접대 좀 잘하고 절이도해전에서
얻은 왜병 수급 40수를 바쳤다고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류성룡도 진린은 잘해줘봤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사람이라고 <징비록>에서
평가했다
진린이 이순신과 가마를 나란히 타거나 이순신 이름을 절대 부르지 않는 대신
이야라고 부른 것이나, 해전 때마다 판옥선을 타고 이순신의 지휘를 받은 것이나
민폐를 끼친 명나라 군사들에게 직접 군령을 시행하도록 이순신에게 허용한 것도
마찬가지다 조선 고위 장수들을 일개 군졸 취급하던 명나라 장수가 조선 장수에게
이런 예우를 한 적이 없다 더욱이 진린은 조선 조정에서 인정한 나니 아닌가?
이것은 이순신과 진린, 두 사람의 상하관계가 애매한 경우에나 가능하지 결코
접대를 잘해서가 아니다
부하 직원이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고 뇌물을 좀 바쳤다고 해서,
직장 상사가 고마운 마음에 부하 직원에게 이제부터 맞먹자고 제안하는 경우는
없다
인조 2년 11월 17일자 실록에서도 이순신이 중국군에게 접대를 성대하게 잘해서
중국군이 이순신을 이야라고 불렀다는 신하들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인조가 바로 반박하며 이순신이 전사했을 때 중국군도 통곡했는데,
평소에 환심을 얻어서 그렇다고 한다 인조는 '이순신이 마음대로 중국사람들을
부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접대나 환심을 산 것만으로는 이런 일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순신은 실제로 명나라 장수들보다 상급자였던 것이다
진린이 이순신을 이야 혹은 노야라고 극존칭을 쓰고, 이순신이 진린에게 보낸
시에서 진린을 친구라고 부른 것도 이 도독 직함과 관계됐을 것이다
진린의 정확한 나이는 파악이 안 되지만 경력으로 미루어 보아 충무공보다 나이가
확실히 더 많다 그리고 명나라 정 2품 도독첨사인 진린이 제후국인 조선의
정 3품, 혹은 높아야 정 2품에 불과한 이순신을 노야, 즉 어르신이라 부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하급자인 이순신이 상급자인 진린을 부군, 즉 친구라 부르는 예의없는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이순신이 명나라 도독 직함을 이미 받아 명나라 품계가 진린보다
높았기에 가능해진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나라 품계상 이순신이 정 1품 도독으로서 정 2품 도독첨사인 진린보다
훨씬 상급자이다 계사년에 조선에 온 명나라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제독 이여송이
종 1품 도독동지에 불과했고 무술년 명나라 여러 제독들의 품계를 생각하면
도독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이 진린은 물론, 사로병진
작전에서 한 방면씩 맡은 제독 유정이나 제독 마귀보다 품계가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작전권이 명나라에 넘어가 있기 때문에 조명 연합군의 수로대장은
명나라 총병인 진린이 맡아야 했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명나라 관제에서 명령권은 품계보다 직책이
우선한다
그러나 품계가 낮은 직책상 상급자는 품계가 높은 직책상 하급자를 예우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 동서고금에 공통된 현실이다
이순신이 받은 명 수군 도독 직함은 조선 벼슬이 아니라 진린이 보유한 것보다
더 높은 명나라 벼슬이니, 두 사람의 상하관계는 애매모호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진린이 청파 들판에서 조선 국왕을 세워놓고 괜히 조선 관리들에게
행패를 부린 것이나, 수군 지휘권을 놓고 협박한 것이 이해가 간다
품계상의 서열과 작전계통상의 위계질서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을 인식한 진린에게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고 지휘권을 보장받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던 셈이다
정유년에 부총병 양원은 세자 혹은 정승을 접반사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술년에 제독 유정은 마찬가지 고집을 피워 결국 관철시켰다
그런데 진린은 부총병 양원보다 높은 총병이면서도 대신급 접반사를 대동시켜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겨우 종 2품 가선대부 남복흥이 전직 관료로서
접반사가 됐는데도 조선 조정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이것도 진린이 각종
사료에 묘사된 것과 달리 예의바른 사람, 최소한 위아래를 따져 그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임을 증명한다 물론 이 인간이 전공 욕심은 많다
고금도에 도착한 진린은 이순신을 이야라 부르고 매사에 이순신의 의견을
존중하는 등 명나라 장수치고는 매우 신중한 행보를 계속했다
이순신은 진린이 매번 제지해 왜적을 치기 어렵다고 장계를 통해 불만을 토로
했지만, 노량해전에서 보듯 진린은 싸우러 나가는 이순신을 전혀 제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따라갔다 그 전에 벌어진 예교성 전투에서도 진린은 이순신에게
매번 끌려 다녔다
왜군과 싸우는 것을 기피한 당시 명나라 장수들 분위기로 봤을 때 비록 이순신에게
끌려 다니기는 했지만 유독 진린만은 예외적으로 열심히 싸운 편이었다
무인으로서 개인적인 존경이나 접대 문제를 떠나 이순신이 명나라 관직체계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모든 일들이 가능했다고 본 사관은 감히
판단한다
그런데 본 사관은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도독이라 해서 녹봉을 받고 명나라
병력을 지휘하는 실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명예 관직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개국 초부터 여진족 여러 추장들에게 도독첨사 레벨의
명예직 벼슬을 뿌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도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화의를 주서난 공을 평가받아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도독첨사 관직을
받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받은 도독 직함은 약간 예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순신은 명예직이 아니라 정식 도독직을 수여 받았는지도 모른다
5군 도독부 중의 좌도독이나 우도독이 아니라 수군도독이란 전혀 새로운 직함을
받은 사실이 더욱 그런 의심을 자아내게 한다
선조 임금의 말처럼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재조지은을 입은 것이 아니라,
명량대첩으로 인해 명나라가 조선으로부터 재조지은에 버금가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정유년 7월, 조선 수군의 패전 이후 명나라가 받은 엄청난 충격을 감안하면
이런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명나라 황실 입장에서는 명나라 수군 몇 만을
동원하고 천진과 산동 등에 해안방어 병력 및 십 만을 투입해도 불안한 일을
이순신과 소수 조선 수군이 대신했기 때문에 이순신에게 도독 직함 정도는 충분히
줄 만하다
<난중일기> 계사년 5월 5일에 명나라 황실에서 이순신에게 은청금자광록대부라는
높은 직품을 하사했다는 소문을 선전관 이순일이 한산도에 와서 전한 사실이
기록됐는데, 이것도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 수군을 보는 태도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충무공이 전사한 지 50년 동안 도대체
무엇때문에 조선에서는 충무공이 명나라 수군도독 직함을 받은 사실을 숨겼을까?
도독 직함을 받은 사실은 선조실록에도 없고 충무공을 기리는 행록, 행장, 시장에도
나오지 않는다 <백사집>이나 <징비록> 등 임진왜란 직후에 작성된 저작물에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도독인은 분명히 임진왜란 말기부터 실존하는데 받은 기록은 한참 나중에,
도독인을 하사했다는 신종 황제가 죽고도 몇 심년 지난 다음에야 등장한다
본 사관은 그 이유가 당시 조선 국왕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신종 황제는 조선에 보내는 사신에게 1품명복을
수여해 조선 국왕과 대등한 예를 행하도록 했다
엄밀히 대응되지는 않지만 조선 국왕이 명나라 1품 예우를 받는 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선 신하가 높은 명나라 품계를 받아 조선 국왕과 맞먹는다면 그 자체가
불충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임금과 그 아들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충무공 관련
문서에 감히 수군도독이라고 명시하지 못한 것 같다 난중일기 무술년 9개월 분량이
빠진 것도 이와 관련되지 않았나 싶다
어쨋든, 대명 수군도독은 진린이 아니라 이순신이다
-김경진의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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