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그린 기린, 봉황, 공작, 학, 용,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단학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한반도로 건너온 종군승(從軍僧) 제다쿠(是琢)는
'조선일기'에서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을 상세하게 적었다.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때인 1592년 5월의 경복궁은 왜승의 눈에도 이토록 아름다웠다.
이 기록은 또 "왕실과 관료들이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에 입성하기도 전에, 우리 백성들이 궁중에 침입해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했다"는 '선조실록'과 유성룡의 '서애집'의 기록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한다.
왜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성에서 퇴각하면서 종묘와 궁궐에 불을 놓고
백성을 상대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유성룡이 참담하게 불탄 궁궐을 목격한 것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1593년 4월 20일이다.
문화재청이 내놓은 '경복궁 변천사'에서 경복궁의 변천과정을
집필한 경주대 문화재학과 이강근 교수는 '선조실록'과 '서애집'의 기록에 대해
"전쟁으로 입은 피해의 심각함에 놀란 나머지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인 지배층의 단견이 담긴 사료들"이라고 평했다. .
경복궁은 태조 3년(1394년)에 창건된 뒤 1553년 큰 화재를 겪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됐으며 270년이 지난 1865년에야 중건을 시작해 1867년 완료됐다.
하지만 1873년과 1876년에 또 다시 화재를 겪고 일제 시대에는 일부 건물을 제외한
4천여칸이 민간에 방매(放賣)됐으며, 조선총독부 건립과 조선박람회 개최 과정에서
많은 건물들이 헐리면서 궁궐의 영역도 축소됐다.
해방 이후에도 건물이 헐려 이전되고 새 구조물이 들어서는 등 변형과 훼손은 계속됐다.
기사원문: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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