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은 1554년 충청도 목천현(현재 천안시)에서 태어나 1578년에 24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3년 여진족 이탕개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고,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이때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젊은 혈기에 분개하여 사직한 바 있다.
김시민은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함에 따라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김시민은 진주목사로서 지리산으로 피난갔던 군대와 성민을 안심시켜 진주성으로 함께 돌아와 성채를 보수하고, 군사체계를 갖추어 군사를 훈련시키고 각종 무기를 준비하였다.
김시민은 진주에만 머무르지 않고 경상좌도의 전 지역을 대상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일본군을 토벌한다. 5월 말 일본군이 사천을 점령하고 진주를 침범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곽재우와 이달 등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도중에서 습격하였고, 패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 고성에 있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사천, 고성, 김해 지역을 회복하였다. 김시민은 이러한 공으로 1592년 7월 26일 종5품 판관에서 정3품 진주목사로 파격적으로 관직이 승진되었다. 9월 8일 김시민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1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산(金山, 현재 김천) 서쪽에 진을 쳤고, 9월 16일 사랑암에서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이 김산과 지례에서 물러났다. 또한 김시민은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낸 공로로 당상관인 통정대부 또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다. 즉,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한 달 후인 5월부터 9월까지 김시민은 진주에만 머물지 않고 고성, 사천, 진해, 거창, 김산, 지례 등 경상우도 전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낙동강 건너 영산전투에 참전한 기록도 있다. 이러한 전공으로 판관에서 목사를 거쳐 경상우병사가 됨으로써 실질적인 경상우도 전체의 조선군 작전권을 갖게 된 것이다. 특히 김시민이 진주에서 직선거리 약 150km나 떨어져 있는 김산까지 출격했다는 것은 잘 훈련된 기마병을 적절히 이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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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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