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웨이 서부의 긴 해안가에서 수평선 너머에까지 끝없이 펼쳐진 바다, 즉 대서양은 바이킹들의 주요 활동무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많은 수수께끼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북대서양의 탐험에 있어서, 바이킹들은 15세기까지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업적과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남겼다.
그러나 유럽에서 최초로 북대서양 탐험에 나선 자들은 바이킹들이 아니라 아일랜드 수도승들이었다. 이들은 Peregrinatio(순례)라 불리는 신앙 활동의 일환으로 스스로 생활 터전을 떠나 먼 바다를 항해하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브리튼 섬 북쪽에 위치한 페로 제도(Feroe Islands)를 발견하였고, 서기 800년까지 아이슬란드(Thule)를 발견하였다.
스코틀랜드를 약탈하던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이 수행길을 떠나던 운없는 아일랜드인 수도승과 조우했을 것이고, 이를 통해 북대서양의 섬들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바이킹들의 탐험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페로 제도(Faroe Islands) & 아이슬란드(Iceland))
아이슬란드 전승에 의하면, 최초로 북대서양 섬들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노르웨이의 폭군 하랄드 1세의 압제(재위: 872-930)를 피해 이주해 온 자들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아일랜드 수도승인 디쿠일(Dicuil)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최소 서기 825년 이전에 바이킹들은 페로 제도에 발을 들여 이곳에서 은둔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던 아일랜드 수도승들을 위협했다고 한다. 그리고 860년경에 바이킹 탐험대는 아이슬란드에 도달했으며, 그로부터 10년 정도 후에 최초의 바이킹 개척자들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하였다.
다만 아이슬랜드 전승은 하랄드 1세 통치기 노르웨이의 정치적 불안이 바이킹들의 북대서양 섬으로의 이주를 부추겼을 개연성을 암시해 주고 있으며, 실제로 이 기간에 아이슬란드 이주 붐이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페로 제도는 스코틀랜드로부터 북쪽으로 약 400km 정도 떨어져 있다. 페로 제도의 사가[Saga]에 의하면, 최초의 정착자의 이름은 그리무르 캄반(Grimur Kamban)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이름은 명백히 바이킹 기원이 아닌 아일랜드 기원이다. 아마 그는 아일랜드나 헤브리디스(Herbrides) 제도에 머물다 페로 제도로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대부분의 바이킹 정착자들은 노르웨이 본토에서 직행해 온 자들이었다.

(페로 제도 농부들의 건초 수확)
페로 제도는 작물을 재배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섬에는 풀들이 풍성히 우거져 있었기에 방목지로서는 꽤 좋은 땅이었고, 이에 양과 소 방목업이 이 섬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페로 제도의 공동체가 성장하자 본토의 몇몇 귀족 가문들이 이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협의 하에 이 섬의 영토를 분할한 후, 이 땅들을 자신들의 추종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9세기 말엽에 이르러 페로 제도는 노르웨이 왕의 직할령에 편입되었다.
비단 페로 제도들만이 바이킹들이 아일랜드 수도승으로부터 알아낸 북대서양의 섬은 아니었을 것이다. 페로 제도의 북서쪽에 존재한다고 전해지는 미지의 섬을 최초로 탐험한 바이킹은 스웨드족 가르다르(Gardar the Swede)로 알려져 있다. 860년 가르다르는 아이슬란드 섬 동남부에 위치한 파포스 동쪽 곶에 도달하였고, 그곳을 기점으로 시계방향으로 아이슬란드 해안을 일주했다. 가르다르는 이 섬을 정착지로서 유망한 섬으로 여겼고, 이 섬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 가르다르스홀름(Gardarsholm)이라 명명했다.

(아마 가르다르가 보았을 아이슬란드 섬의 풍경)
반면 이 섬을 탐험한 다른 바이킹인 플로키 빌게르다르손(Floki Vilgerdarson)은 같은 섬에서 다른 체험을 했다. 그도 가르다르와 마찬가지로 아이슬란드 동해안에 진입한 후, 해안선을 따라 아이슬란드 서해안으로 향했다. 겨울이 다가오자 그는 아이슬란드 섬 서북부의 바튼스피요르드(Vatnsfjord)에서 겨울을 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겨울 사료를 제대로 채집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그가 겨울나기 식량으로 데려온 가축들이 굶어 죽어버렸다. 결국 플로키는 탐험을 중지하고 회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돌아가던 도중 악천후로 서해안의 흐비타(Hvita) 강 하구에 일시 정박하다 날씨가 개자 페로 제도로 향했다. 플로키의 아이슬란드 탐험은 그리 기분좋은 여정이 되지 못했고, 이 탓인지 그는 이 섬의 이름을 '얼음의 땅'이라는 뜻의 이슬란드(Island), 즉 오늘날의 그것으로 명명했다.

(아마 플로키가 보았을 아이슬란드 섬의 풍경)
부정적인 뉘앙스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탐험이 이루어진 지 얼마 안 되어 아이슬란드 섬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최초의 아이슬란드 개척자는 젖형제인 잉골푸르(Ingolfur)와 흐요를레이프(Hjorleif)였다. 870년경에 그들은 아이슬란드 섬 동쪽의 피오르에 상륙하여 정착지로서의 최적의 장소를 물색하기 위한 정찰에 나섰다. 비록 개척 초년의 겨울에 흐요를레이프가 그의 아일랜드인 노예에 의해 살해당했지만, 잉골푸르는 정찰에 나선 지 3년 만에 남서해안에서 훌륭한 정착지를 찾아냈고, 그는 그가 세운 정착촌의 이름을 레이캬비크(Reykjavik)라 명명했다.

곧 정착민들의 행렬이 뒤따랐다.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노르웨이 서부 출신들이었지만 데인인들과 스웨드인, 그리고 스칸디나비아계 헤브리디스인 이민자들의 수도 무시하지 못할 규모였다. 900년에 섬에서 최초의 지방 의회[Thing]가 설립되었고, 930년에 국가 의회[Althing]가 설립됨으로서 유럽인들에 의해 건설된 최초의 '이주민 국가'가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서남해안가 지역에 정착했다. 이외 다른 지역들의 개척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나마도 대부분 해안가 지역에 한정되어 이루어졌다. 서기 1000년에 아이슬란드 국가 의회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의 기독교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에 북구 신앙은 아이슬란드에서 비교적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린란드 & 빈란드
930년경까지 아이슬란드 섬의 좋은 목초지들은 이주자들에 의해 완전히 점유되었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프론티어였던 아이슬란드의 사회는 이제 인구압에 직면했고, 뒤늦게 이주 대열에 합류한 아이슬란드 이민자들은 최초의 이주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땅을 생활 터전으로 하여 살아가야만 했다.
"붉은" 에이리크(Eirikr)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살인 범죄를 계기로 노르웨이에서 도주하여 아이슬란드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의 노예가 이웃 농장에 산사태를 일으키는 실수를 범했다가 살해당했고, 이에 화가 난 에이리크는 그의 노예를 살해한 자를 똑같이 살해해 버렸다. 에이리크에게 당한 피살자의 친척들은 지방 의회에 에이리크의 추방을 탄원했다.
다시금 터전에서 내쫓길 위기에 몰린 에이리크는 보험으로 새로운 터전을 물색하던 중, 과거 다른 바이킹이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서쪽의 섬에 솔깃했다. 그는 서쪽으로 항해한 끝에, 오늘날 그린란드 동부에 해당하는 얼음이 전혀 없는 피오르를 발견했다. 그는 이 섬을 '녹색 땅'이라는 의미의 그뢴란드(Groenland)라 명명했다.
그린란드의 발견에 고무된 에이리크는 아이슬란드로 돌아가 함께 그린란드를 개척할 사람들을 모집했고, 3년 만에 25척의 배에 꾸릴 규모의 개척단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항해 도중 25척 중 11척이 난파되었고, 14척 만이 페어웰 곶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이만으로도 두 개의 정착지를 펼 수 있었다.
그린란드는 문자 그대로 녹음의 땅이었다. 이 땅에서 목축업은 활기를 띄었고, 심지어 곡물까지 재배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수렵 자원도 풍부했기 때문에 여기서 바이킹들은 바다코끼리의 상아와 북극곰의 가죽을 얻어 에스키모 및 다른 바이킹 친척들, 그리고 북미 인디언들에게 수출할 수 있었다.
바이킹들은 그린란드에 정착한 지 얼마 안 가 돌풍으로 인한 표류를 계기로 북미 대륙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북미 인디언들과 접촉했다. 그린란드로 향하다 우연히 미지의 땅에 표류했던 바이킹의 정보를 근거로, 서기 1000년경 레이프 에이리크손(Leif Eiriksson)은 표류했던 바이킹의 항해로를 따라 북미 대륙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두 종류의 땅을 각각 마르클란드(Markland)와 빈란드(Vinland)라 불렀는데, 마르클란드는 레브라도르임이 거의 확실하지만, 빈란드는 포도 재배의 북한계선 이남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정확히 어디인지 불분명하다. 얼마나 많은 바이킹들이 빈란드에 정착했는지 또한 확실치 않다. 현재까지 발견된 북미의 바이킹 거주지 유적은 뉴펀들랜드 북부 랑스 오 메도우즈(L'Anse aux Meadows)의 그것이 유일하다.


(뉴펀들랜드의 바이킹 정착지 모형)
북대서양 탐험 시대의 종언
11세기경, 아이슬란드의 인구는 약 6만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린란드 식민지는 이만큼 번성하지는 못했지만, 한때 4,000명 규모의 군락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12세기경의 소빙기는 북대서양 공동체에게 크나큰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기후의 대격변으로 인해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식민지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그린란드였다. 풀이 우거져 있던 '녹색 땅'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하얀 죽음의 땅으로 바뀌어 갔다. 농업과 목축업이 급격히 쇠퇴함에 따라 이 지역의 바이킹 식민지에 기근이 만연했고, 북부에 위치해 있던 에스키모들도 소빙기의 영향을 받아 남하했다. 악화되는 섬의 생활 조건이 그린란드를 터전으로 하는 두 집단의 관계를 과거 평화로운 무역 관계의 그것에서 사생결단의 그것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이 두 집단의 격돌은 바이킹 측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1200년경에 에스키모들은 북부의 황금 수렵장을 접수했으며, 14세기에 서부 정착지와 중부 정착지가 에스키모에 의해 파괴되었다. 결국 15세기경, 그린란드의 바이킹은 멸망했다.

(그린란드의 바이킹 유적)
빙하기와 1104년 헤클라 산의 분화로 인해 아이슬란드 또한 수확량의 감소를 경험해야 했다. 이로 인해 영세농들이 몰락하였고, 국가의 권력은 소수의 귀족 가문들에 집중되었다. 이들 야심만만한 귀족 가문들에 의해 13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아이슬란드의 정치적 안정은 결국 깨졌고, 내전이 발발했다. 이 이주민 국가는 분열되어 약화되어져 갔다. 노르웨이의 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슬란드에 정치적 압력을 가했고, 결국 아이슬란드 대귀족들은 노르웨이 왕을 자신들의 주군으로 인정했다. 북대서양의 프론티어 시대는 그 종말을 고한 것이다.
바이킹들은 최초로 신대륙을 탐험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오랜시간동안 뭍혀져 왔다. 중세 ~ 근대 초에 아이슬란드의 바깥 세계에서 그린란드는 잊혀졌었고, 빈란드 사가(Saga)는 근래까지 허구로 여겨져 왔으며, 오늘날에도 바이킹의 탐험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는 될 수 있어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훗날 - 다른 무리의 유럽인에 의한 - 신대륙 탐험의 전조는 당시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에 의해 드러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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