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근대시기 여성의 지위는 현재 여성의 지위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희생을 당해야 했다.
고대에는 남성들이 자신의 권력, 부를 과시하기 위해 축첩을 많이 두었다.
지아비를 모시는 아내로서, 축첩을 두는 남편을 보며 여성들은 속을 끓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발해의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남편이 축첩을 두는 것에 전전긍긍한 소극적인 여성이 아니라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낸 남성들이 축첩을 두지 못하도록 한 자주적인 여성들이었다.
남송시대 쓰여진 『송막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인들은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 대씨는 다른 성씨와 서로 연계하여 10자매를 이루었는데 이들이 번갈아 가며 남편을 감ㅅ기하여 남편이 첩을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다른 여자와 연애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인은 반드시 독을 넣어 남편과 사귄 여자를 죽이려고 한다. 나머지 아홉 사람이 모두 일어나 그를 꾸짖으면서 다투어 증오하는 것을 서로 자랑으로 여겼다
남송은 주자학이 지배하고 있던 나라였다. 위의 송막기문은 다분히 남성의 시각에서 쓴 것이다. 그렇기에 투기가 심하다는 식으로 기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 발해는 가족제도로서 1부1처제가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발해의 무덤에서 확인된다.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사회가 바로 발해였다. 참고로 고구려는 재혼이 허물이 되지 않는 사회였다. 고구려 9대 태왕인 고국천왕이 죽자 그의 왕후인 우씨는 고국천왕의 둘째동생 연우(산상왕)와 다시 결혼을 했다. 한 나라의 국모로서 이같은 행위는 조선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고구려는 개방적인 나라였다. 그리고 우씨가 재혼을 했음에도 백성들이 크게 반발을 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가 재혼에 자유로운 사회였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화랑세기에 의하면 신라의 선덕여왕은 남편이 세 명이 있었다. 이는 삼서제도라는 신라 고유의 제도에 기인한 것이라 한다.
고려시대에는 여성이 호주가 될 수 있었고, 여성이 제사를 받들고, 아들과 차별없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물론 재혼도 가능했다. 이런 우리의 풍속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사림의 집권과 주자학이 조선에 자리잡으면서 우리의 전통은 사그라져갔다.
물론 고대 부여에서는 여자가 투기하면 여자를 죽여 시체를 버리고, 만약 여자 집에서 시체를 거두어갈 때 남자 집에 재물을 바친다는 법률조항이 있는 등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지만 대체로 고대 우리민족은 중국과 달리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남녀가 결혼할 때 여자가 남자 집에 가는 것을 친영, 남자가 여자 집에 가는 것을 반친영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혼례를 올릴 때 친영례를 고집했지만, 우리는 항상 반친영을 고수했다. 특히 우리역사에서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선에서조차 말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면밀히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p.s.
그런데 발해의 결혼풍속과 관련하여 『송막기문』에는 약탈혼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게다가 금나라 세종은 1177년 12월 발해인의 약탈혼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발해의 옛날 습속에는 남녀가 혼인을 할 때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많아서 먼저 남자가 여자를 훔쳐 달아나서 혼인을 하니 조서를 내려 이를 엄금한다. 이를 범하는 자는 간통한 것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는 앞서 내가 언급한 『송막기문』의 가족제도와 배치된다. 그래서 난 위 기록이 발해의 보편적인 결혼제도가 아닌 발해에 부속된 유목민족의 혼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발해 역시 많은 종족을 거느린 국가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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