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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이즈 영훈ll조회 953l 1
이 글은 7년 전 (2017/8/03) 게시물이에요

명나라의 철령위설치는 단순하게 고려와 명나라의 국경선확정 에 머무르지 않고 고려의 고토회복에 가장 큰 장애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이 철령위설치를 어떻게 막아내느냐에 따라 원에게 빼앗겼던 고토를 찾을수 있을지 없을지가 되는 중요한 사안이 된 것이다. 

고려시대 국경은 중국 요동지역 | 인스티즈
▲ 복기대 교수     ©브레이크뉴스

고려는 이 중요한 사안을 결국 명나라와 전쟁으로 해결하고자 요동으로 군사를 출병시켰다. 이것은 결국 철령위가 요동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국학계에서는 철령위가 중국의 요동이 아닌 한반도의 원산만지역으로 비정하여 한국사의 큰 혼란을 자초하였다. 물론 이런 견해의 나쁜은 한국학계가 아니고 일본학계의 시작이었다. 과거 대일항쟁기에 일본학자들이 한국사를 식민사관에 의하여 한반도안으로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오늘날 강원도와 함경남도 경계에 있던 철령지방을 찾아내어 그곳에 철령위를 동쪽경계라고 주장을 하였고, 한국학계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아예 철령위위치를 원산만부근으로 고정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려말선초의 국경뿐만 아니라 전체 고려시대 국경선과 조선시대국경선 획정에 큰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이에 글쓴이는 여러 가지 자료를 고증하여 고려와 명나라간의 가장 큰 문제였던 철령위는 오늘날 중국 요녕성 본계시 일대라는 새로운 고증을 하였다. 

보충적인 연구가 뒤 따라야 하겠지만 철령위 위치가 오늘날 중국땅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면 이와 더불어 쌍성총관부문제도 다시 검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인식되어온 쌍성총관부자리는 그간 알고 왔던 한반도내의 철령위자리였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령위위치와 쌍성총관부 자리는 연결시켜 연구를 해봐야 할 것이다.  

이들 문제들과 아울러 기회가 된다면 우리학계에서는 고려시대 국경선연구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쓰여진 고려사에는 고려시대국경선이 북으로는 선춘령, 서로는 고구려를 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 기록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시대 국경선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 머리말

고려는 서북방의 국경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고려 왕조의 멸망과 조선왕조의 건국은 한국사의 한 획을 긋는 분수령이다. 즉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는 고려와 인접한 지역에 명나라의 군대를 주둔시키겠다는 공문을 고려 조정에 보냈다. 고려는 여러 방면으로 명나라의 제안을 철회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고려의 의견을 무시하고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강행하자 고려는 결국 군사행동으로 맞섰다. 고려 내에서는 명나라에 대한 군사행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과 소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로 나뉘었고, 그들은 격렬하게 대립하여 결국 소극적인 참여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 결과 고려는 멸망하였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처럼 고려후기에 발생한 철령위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므로 한국통사를 읽는 과정에서 이 사건은 늘 의미를 두며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발견하였다.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철령위자리가 오늘날 함경도 원산만일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철령위를 공격하러 간 고려의 군대는 함경도로 가는 것이 아니고 중국 땅으로 가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모순된 일이다. 필자는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관련기록을 확인해보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철령위와는 다른 지역임을 발견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한반도내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 중국 요녕성 동부지역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단순하게 철령위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고려시대의 서북국경선을 다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선행연구를 분석해보고 새로운 자료를 통하여 시론적으로 철령위 위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2. 한국학계의 철령위 위치에 대한 이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명나라의 철령위설치 건은 한국사의 한 시대를 구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에 따라 현대의 국민적인 감정에서도 민족주의와 사대주위를 나누는 하나의 기준이 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학계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관심의 방향은 철령위를 통한 왕조교체이지, 그 설치 배경과 그 위치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학계 일부에서는 철령위 위치에 대하여 계속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동안 학자들의 관심과 최근 이해방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근대에 들어 철령위에 대해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은 국내학자들이 아니라 외국학자들이었다. 일본의 하야시 다이스케(林 泰輔)는 '철령위는 압록강 근방에 있었다가 후에 그 서북으로 옮기었지만 그 지명만은 옛날의 명칭인 철령위를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하야시가 말하는 서북으로 옮긴 철령위는 지금의 심양, 무슨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에 들어 철령위의 위치를 처음으로 고증한 것으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뒤를 이어 일인학자들이 계속하여 여말선초의 고려와 명나라와 관계를 조명하면서 이 철령위에 위치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케우치 히로시(池內 宏)는 명이 처음 설치한 철령위의 위치를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로 비정하였는데(지도1 참조)그 근거는 명나라 병사 천 여명이 강계로 와서 고려의 서북면도사 최원지에게 철령위를 설치를 통보한 것을 근거로 하였다. 그는 비록 철령위의 시작은 집안시 일대지만 각 10리마다 역을 설치하고 한 역에 100호씩주둔케 하는 총 70곳을 설치하겠다는 내용이다. 이케우치는 이를 근거로 위(衛)의 첫 시작은 길림성 집안시이지만, 마지막 위치가 오늘날 강원도와 함경도 사이에 있는 철령이기 때문에 위(衛)의 명칭을 철령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케우치는 이어서 설명하기를 명이 그렇게 구획을 한 것은 명이 고려에 보낸 통지문에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원래 원의 영토는 모두 명에 귀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철령 땅은 원래 원의 쌍성총관부의 관할이었기에 때문에 이곳까지 명으로 귀속되어야 했기 때문에 철령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케우치의 이 견해는 후에 철령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에는 이케우치의 견해와 비슷하게 전개를 하고 있다.

한국학계에서 직접적으로 철령위에 대한 연구는 김용덕의 구체적인 연구가 있었다. 김용덕은 철령위 설치 배경과 그 위치를 논하면서 철령위 자체는 존재하지 않고 도상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학계는 철령위의 존재를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한반도 함경도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기백, 한영우, 이현희 등이 계속 언급하였다. 그리고 현행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글뿐만 아니라 지도도 삽입하여, 학생들에게 철령위의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고려시대 국경은 중국 요동지역 | 인스티즈

이와는 다르게 『고려사』를 국역한 팀에서는 철령위의 위치를 평안북도 강계 부근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견해도 제기하였다. 

위에서 확인해 본 바와 같이 그간의 연구 결과들은 일본학자들은 철령위가 압록강변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동해안의 철령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철령위의 북쪽 땅은 모두 명의 영토로 귀속시키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한국학자들도 철령위의 위치에 대하여 대다수가 함경도의 원산만 일대로 비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일부 학자들은 철령위가 쌍성총관부자리에 설치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 중에서 빠진 것은 '원산만 일대가 정말 철령위인가'하는 점이다. 그에 대한 다른 의견을 제시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될 것이다. 

첫째, 일인학자들의 말대로 오늘날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 함경도 원산만까지 국경선을 긋는 작업이 철령위였다면 『고려사』지리지에 나타난 고려시대 북쪽 국경선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즉 일본학자들의 주장과 『고려사』지리지를 비교해보면 일인학자들은 고려의 영토를 반으로 줄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 철령위라는 것은 군대의 단위인데 명나라가 한반도 원산만일대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면 그 설치 목적인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동해바다를 수비하기 위함도 아닐 것이고 고려에 군사적 위협목적을 가하고자 하였다면 바로 고려의 중심지역 가까운 곳에 하면 되는 것인데 바닷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군사적 목적으로 철령위를 설치하였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셋째, 고려의 철령위 정벌과정이다. 만약 원산만에 있었다면 고려의 원정군은 바로 원산만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동으로 출병을 시켰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철령위를 설치하고 조종하는 요동도사부터 휘어잡기 위하여 요동으로 출병을 하였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다. 고려의 입장에서 요동도사를 공격한다는 것은 전체적인 명나라와 전면전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고려가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명나라, 더구나 외교문서상에 나타난 것을 보면 명에 한수 접고 들어가는 입장에서 바닷가의 작은 군영을 찾기 위하여 명나라와 전면전을 각오하고 요동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넷째, 원나라의 쌍성총관부자리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더욱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쌍성총관부는 공민왕 때 이미 되찾은 곳이다. 즉 이미 고려 영토에 들어 온 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면 고려가 명에 할양을 했거나 아니면 고려와 명이 전쟁을 하여 고려가 져서 빼앗겼던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양을 했거나 명에게 빼앗긴 기록은 그 어디도 없다. 그렇다면 쌍성총관부자리는 이미 고려의 영토인데, 그리고 그곳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였다는 논리는 절대로 성립할 수가 없다. 
 
다섯째, 만약 철령위가 원산만 일대에 설치되었다면 그 북쪽은 명나라 땅이 되거나 명의 영향권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조선 세종이 4군6진을 개척하여 오늘날 한국의 영토가 확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원산만 일대의 철령위가 명나라 땅이었다면, 세종의 4군 6진은 명나라와 전쟁을 하여 빼앗거나 할양을 받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세종은 명에 사대외교를 잘 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임금이 명나라를 공격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런 것을 볼 때 철령위는 원산만 일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명의 철령위 설치 지역은 다른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3.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의 배경 

고려는 공민왕의 재위에 오르면서 원나라와 관계를 다시 설정하기 시작한다. 공민왕은 많은 내외 정책을 시행하는데 많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중에 국내적으로는 친원파들을 제거하고 국외적으로는 원에 빼앗긴 영토를 다시 찾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성과가 쌍성총관부이다. 이렇듯 공민왕의 정책 성공은 국내에서 새로운 세력들의 협조와 국제적으로 명나라와의 공조의 결과들이 한 몫을 한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명나라와 협력하여 고려의 옛 영토를 찾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여기서 옛 영토회복 즉, 원에게 빼앗긴 고려의 옛 땅을 찾는 것은 당면한 문제로 공민왕, 우왕 모두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나라의 협조였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원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건재한 세력이기 때문에 원나라의 반란세력인 명이 어느 정도 세력을 키워 주느냐가 고려의 옛 땅을 찾는 중요한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명은 계속 세력을 확장하였고 고려는 이 틈에 원을 공격하여 많은 땅을 되찾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고려와 명의 관계는 원나라가 거의 무너지면서 명의 힘이 너무 커지게 되었고, 결국 공민왕 때 못 찾은 땅은 명과 협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고려는 원나라를 대할 때처럼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외교력으로 영토를 되찾고자 노력 하였다. 그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사절요』 제33권

○ 박의중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표문에 이르기를, ‘철령(鐵嶺)의 인호(人戶)에 대한 일은 조종(祖宗) 이래로 문주(文州)ㆍ화주(和州)ㆍ고주(高州)ㆍ정주(定州) 등 고을이 본래 고려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였으니, 왕의 말대로 하면 그 땅이 고려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나, 이치와 사세로 말하면 그 몇 고을의 땅을 지난날에는 원 나라에서 통치하였으니, 지금 요동에 예속되어야 마땅하고, 고려가 말하는 것을 경솔히 믿을 수 없으니, 반드시 끝까지 살피고야 말겠다. 또 고려는 큰 바다로 막히고 압록강으로 한계하여, 일찍이 옛날에는 따로 나라를 이루었으나, 중국의 역대 조정의 정벌을 자주 입은 것은 분쟁의 단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고려는 외교를 통하여 원래 고려 땅을 찾고자 노력하였으나 명나라의 회신은 고려의 노력을 무시였다. 외교적인 노력이 무산되어 결국 양국 간에 무력대결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결국 고려와 명나라가 외교적 마찰이 일어난 것은 원나라가 지배하였던 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투는 과정에서 일어난 영토 전쟁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비록 원나라와 전쟁에서 져 고려 땅 일부를 원나라에게 점령당하였지만 언젠가는 이를 되찾기 위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려에서 인식하는 서북방의 영토는 어디까지였나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계가 우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절요』辛禑[三]

○ 우리 태조가 변방을 편안히 하는 계책을 올렸다. 아뢰기를, “북계(北界)는 여진ㆍ달달ㆍ요동ㆍ심양의 지역과 서로 연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중요한 땅입니다. 비록 일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하겠는데, 이제 그 곳 주민들이 매양 저들의 풍속에 접하여 서로 물자를 교역하고 날마다 서로 친압하여 혼인을 맺기까지 하여 그 족속들이 저들에게 유인 당하여 가고, 또 앞잡이가 되어 들어와 약탈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은 동북 한 방면의 걱정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 상소를 보면 당시 고려와 원의 국경선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어느 지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요동과 심양 지역과 연접한다는 기록으로 봐서, 요동은 어디라고 집어서 말하기 어려우나, 지금우리가 알고 있는 광의의 요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구체적인 지역명인 것이다. 왜냐하면 광의의 뜻이었다면 ‘요동’이라는 표현으로 충분하지 굳이 ‘심양’이라는 지명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상소의 내용은 요동, 심양을 한 축으로 놓고 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고려와 원나라의 국경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압록강에서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요양, 심양, 개원을 잇는 선과 맞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학자들도 그들의 태조가 올린 상소였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소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원나라 당시 고려의 영토는 이미 지금의 압록강을 넘어 요양, 심양과 가까운 곳에 원나라와 접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고려는 지금의 압록강 너머에 국경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고려는 원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고려는 명이 갓 왕조가 성립되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지, 명에게 반환을 요청했던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원나라가 지배하였던 동녕로 땅은 본래 고려의 영토였으니 그대로 돌려받아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입장은 달랐다. 이에 대하여 명나라는 역사적인 연고권은 인정하나, 지금의 명나라가 원나라 지역을 모두 지배하였으니, 당연히 옛 원나라 땅은 모두 명나라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것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와 명나라의 현안을 풀기 위하여 당시 명의 수도인 남경으로 박의중을 보냈고, 그는 명 황제의 답신을 가지고 돌아 왔다. 고려는 좋은 말로 영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는데, 명이 이를 거부하고 그들 나름대로 이유를 달아 반환거부의사를 분명히 할 뿐만 아니라, 철령위를 설치할 것임을 결연하게 표했다. 명나라의 이런 태도에 고려는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고려사절요』戊辰辛禑4

○ 최영이 여러 재상과 함께 정요위(定遼衛)를 칠까, 화친을 청할까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을 따랐다. 이때 요동 도사가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 방을 붙이기를, “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해 있던 군민(軍民)ㆍ한인(漢人)ㆍ여진ㆍ달달ㆍ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이것은 명나라가 고려에 선전 포고해온 것에 대한 대책회의 기록이다. 이 회의에서는 전쟁보다는 화친을 하자는 쪽으로 결말이 났다. 그러나 명나라는 신속하게 행동을 하였다. 이 내용을 분석해 보면 명은 고려까지도 복속시키고자 하였다. 고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고, 많은 고민을 한다. 이때 명나라에 갔던 설장수가 돌아와 구두로 명황제의 말을 전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 설장수(偰長壽)가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구두로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하였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고, 개원ㆍ심양ㆍ신주(信州) 등처의 군사와 백성은 생업을 회복하도록 들어주라" 하였다.

이 말에서는 '고려는 요동에 속한다'는 말은 빠졌지만, 명나라는 꾸준히 철령 이북을 자국에 귀속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다시 한 번 회의를 열었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최영은 백관을 모아 철령 이북을 명나라에 바칠 것인가를 물었다.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우왕은 최영과 비밀리에 요동을 칠 것을 정하였다.

당시 수시중(守侍中)이었던 최영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물어보았다. 이 회의에서는 당연히 고려 땅이었던 철령 이북 땅을 명나라에 내주는 것에 모두 반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명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서북면 병마사가 급보를 해온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사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강계에 이르러 장차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여 요동(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역참(驛站) 70군데를 두었다." 하였다. 우가 동강에서 돌아오다가 말 위에서 울며 이르기를, “군신들이 요동을 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고려에서 철령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한참 의논하고 있는 차에, 명에서는 확실하게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 고려왕은 자기의 계획에 따라주지 않은 신하들을 원망하며 바로 팔도에 징집령을 내렸다. 이것이 요동정벌의 나쁜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박의중을 통하여 명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통보하였다. 여기에 명나라 후군도독 왕득명을 통하여 고려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보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 대명(大明)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우가 병을 칭탁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판삼사사 이색(李穡)이 백관을 거느리고 득명을 맞이하여, 돌아가 황제께 잘 아뢰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득명이 말하기를, “천자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하였다. 최영이 노하여 우에게 아뢰고,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이른 자를 죽이니, 죽은 자가 모두 21명이나 되었다. 단지 이사경(李思敬) 등 5명만이 남았는데 영을 내려 그 지방에 머물러 두고 단속하게 했다.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당시 고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인 철령위를 설치하였다고 전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명나라 황제에게 다시 한 번 설득해줄 것을 당부하였는데, 사신인 왕득명은 거부하였다. 이에 최영은 우왕에게 보고하고 철령위 설치하겠다고 통고한 자들을 죽였다. 이때 죽은 자가 21명이었는데 고려는 중국 사신단을 죽인 것이므로 이는 곧 명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철령뿐만 아니라 철령 주변의 많은 땅이 원래 고려의 것이었지만, 대몽항쟁기에는 원나라 관할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나라가 기울자 고려는 그 땅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은 원나라를 대신한 것이 명나라이기 때문에, 원나라가 다스리던 땅은 바로 명나라의 땅에 속하는 것이므로 돌려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는 군사적인 행동은 피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였다. 요동에서 처음 사단이 났을 때만 하여도 고려는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화친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명황제의 확고한 의지를 알고 고려도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왕득명 일행을 처단하는 것으로 명에게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외교상으로 명나라를 설득시키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력을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명나라가 무리하게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보하는 바람에 고려는 군사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4. 철령위 위치에 대한 고증

지금까지 위에서 고려와 명의 영토 전쟁의 과정을 정리하여 보았다. 이 과정에서는 철령위의 위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를 않는다. 다만 앞에서 보았던 명의 황제 주원장이 보내온 문서를 다시 보면 

『고려사절요』 제33권

○ 박의중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표문에 이르기를, ‘철령(鐵嶺)의 인호(人戶)에 대한 일은 조종(祖宗) 이래로 문주(文州)ㆍ화주(和州)ㆍ고주(高州)ㆍ정주(定州) 등 고을이 본래 고려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였으니, 왕의 말대로 하면 그 땅이 고려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나, 이치와 사세로 말하면 그 몇 고을의 땅을 지난날에는 원 나라에서 통치하였으니, 지금 요동에 예속되어야 마땅하고, 고려가 말하는 것을 경솔히 믿을 수 없으니, 반드시 끝까지 살피고야 말겠다. 

여기에 나오는 문주, 화주, 고주, 정주 등이 어딘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케우치의 글이나 『조선사』에는 이곳의 구체적인 현재의 지명을 모두 현재 북한의 함경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케우치는 이곳들이 철령위라 말하지 않고 철령위의 본부는 오늘날 집안 지역에 설치하고, 그 끝이 오늘날 함경도 철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서를 보면 전혀 다른 기록들을 볼 수 있다. 『명사』에는 철령위 설치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들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明史』 遼東都指揮使司

철령위. 홍무 21년 3월 옛 철령성 자리에 설치하였다. 26년 4월 옛 은주 땅으로 옮겼다. 지금의 치소이다.

여기에는 간단하게 철령위는 홍무 21년(1388년)에 옛 철령성 자리에 설치하였다가 홍무 26년(1393년)에 옛 은주 땅으로 옮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를 하였는데 옛 철령성 자리에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며, 그리고 이전한 것까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구체적인 기록들이 있다.

『盛京通志』

철령현은 명나라가 철령위로 고쳤다. 옛날에는 철령성이 철령위 치소 동남 오백리에 있었는데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홍무 21년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했다가 그 후 홍무 26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옛 은주 땅이다. 거듭 철령위라 이름하였다. 중. 좌. 우 3천호를 거느렸고 요동도지휘사사에 소속되었다. 요지(요사)에는 은주(嚚州)가 없다. 마땅히 은주 (銀州)이니 지금의 철령현이 그곳이다. 

이 기록은 청나라 때 기록인데 철령위의 연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분석해보면 홍무 21년(1388년)에 설치한 철령위는 철령성 자리에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볼 때 몇 가지 사실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원래 철령성 자리에 철령위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명칭이 철령위라는 명칭으로 쓰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원래 철령위 위치는 고려와 경계를 접한 곳이다. 
 
셋째, 홍무 21년에 설치한 위를 홍무 26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고, 그 지역은 요 ․ 금 시절에는 '은주'였다. 철령위를 이곳으로 옮겨오며 그 명칭도 가져와 철령위라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지적은 홍무 26년에 옮긴 철령위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떨어진 곳에 홍무 21년 철령위가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시 홍무 21년에 설치한 철령위자리가 고려와 경계지역이었던 것이다. 

홍무 26년에 옮긴 철령위는 현재 중국 요녕성 철령시로 그대로 남아 있다.(지도4참조) 이 도시는 북으로는 개원, 남으로는 심양의 중간에 끼어 있는 도시이다. 이 도시에 대하여 『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철령위」

도사성(都司城=요양성) 북 240리에 있다. 옛날에는 철령성이었고 지금의 철령위 치소 동남 오백리에 있었다.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 홍무 21년에 철령위를 그곳에 설치했다가 26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즉 요나라, 금나라 시대의 은주 옛 성이다.

고려시대 국경은 중국 요동지역 | 인스티즈

여기서 철령위의 위치가 요양성의 북쪽 240리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요양성(=都司城)은 오늘날 요녕성 요양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요양에서 북쪽으로 240리에 철령위가 있다면 이것은 오늘날 요녕성 철령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현재의 철령위는 홍무 26년에 원래 철령위에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철령위자리는 아니다. 

이것을 근거로 위에서 말한 『성경통지』에 나타난 원래 철령위 자리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성경통지』에서는 홍무 21년 철령위는 홍무 26년 철령위에서 동남쪽으로 500리인 곳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가보면 먼저 현 철령시에서 동남 방향으로 가야 한다. 『성경통지』에 기록된 것을 참고로 한다면 정확하게 어디라고 찍을 수는 없지만 어림으로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 어디쯤으로 볼 수 있다.(지도5. 참조)

이것을 볼 때 하야시나 이케우치, 그리고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조선사에 나타난 현 길림성 집안지역은 철령시와 거의 같은 위도이기 때문에 철령위가 될 수 없다. 지금의 철령시에서 동남으로 5백리라는 기록을 가지고 환산해 보았을 때 한반도지역은 아예 나올 수가 없는 거리이다 그러므로 그간의 학설들이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확인해봐야 할 것은 그동안 일본이나 한국의 학자들이 주장하였던 쌍성총관부자리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는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중국측 어느 사서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대다수가 쌍성총관부자리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고 주장한 것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 국경은 중국 요동지역 | 인스티즈

위에서 확인해본결과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명의 철령위 위치는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두 지도로 비교해보면 훨씬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국경은 중국 요동지역 | 인스티즈

이것을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철령위자리는 정반대 방향에 있었던 것이다.(지도6, 참조) 우리학계와 교과서에 실린 철령위 위치는 다시 그려져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고려시대 국경은 중국 요동지역 | 인스티즈
▲ 복기대 교수     ©브레이크뉴스

글쓴이는 이 글에서 고려의 명운을 갈랐던 명나라의 철령위 위치가 그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오늘날 한반도 동해안 지역이 아니고 오늘날 중국 요녕성 본계시 어디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글쓴이는 그간 철령위를 연구하게 되면 반드시 인용해야 할 몇 자료를 근거로 새롭게 주장을 한 것이다. 글쓴이는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선행연구자들이 철령위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왜 명사나 명일통지, 또는 성경통지 등의 사서를 보지 않고, 오직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또는 요동지만 보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하게 철령위는 명나라가 설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측 사료에 더 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 측의 중요한 자료를 참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령위 자리를 오늘날 한반도에 비정하게 된 것이다. 

이는 분명하게 다시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단순하게 철령위 문제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의 전체와도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 고려시대의 서북국경선은 서로는 압록강을 넘지 못하고, 북으로는 함경도중부지역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 근거는 일인학자들이 한국사를 손대면서 시작된 한국사의 비극이었다. 특히 일인학자들이 고증한 철령위위치와 쌍성총관부의 위치는 오늘날 고려사뿐만 아니라 전채 한국사의 지리 범혁을 한반도안으로 넣는 결정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사서들이나 중국의 사서를 볼때 고려시대 국경선은 절대로 한반도 안지역이 아니었다. 『고려사』지리지에 나타난 그대로 북으로는 멀리 선춘령이고, 서로는 중국 요동지역이었다. 이런 기록이 있었음에도 고려 국경선을 한반도안으로 넣은 일인학자들의 행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는 시론적으로 접근한 고려시대 후기의 국경선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이것을 계기로 고려의 서북국경선뿐만 아니라 전체 한국사의 서북국경선을 다시 확인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글쓴이는 이 글을 쓰면서 공자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봤다. 

“믿기를 좋아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그 폐는 적으로 나타난다.”

이 말을 깊이 새겨봐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王朝實錄』
『明一通志』
『明實錄』
『遼海叢書』
『盛京典制備考』
『盛京通志』
『遼東志』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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