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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임을 한탄하던 소년, ‘일본 속 조선’을 모으다[김상수칼럼] '조선인'임을 한탄하던 소년, '일본 속 조선'을 모으다: 정조문(鄭照文) | 인스티즈| 기사입력 2013-06-04 16:01
[김상수칼럼] '조선인'임을 한탄하던 소년, '일본 속 조선'을 모으다: 정조문(鄭照文) | 인스티즈
[김상수 칼럼] 上. 일본 교토(京都) ‘고려미술관(高麗美術館)’과 설립자 정조문(鄭照文)

지난 5월 24일 오후, 일본 교토 시내 북쪽에 있는 ‘고려미술관’을 방문하였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이나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 프랑스 파리의 국립기메동양박물관(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등을 비롯한 세계에 잘 알려진 박물관에서도 우리 전통 미술품이나 문화재 가치가 있는 유물들을 볼 수는 있지만, 1700여점의 ‘우리 유물’을 전문 미술관으로 전시하면서 미술관내에 ‘연구실’을 두고 소장품의 조사연구, 연구 강좌실시, 일본국내외 전시교류, 조선고고학연구, 미술사연구, 민속학도서자료수집 및 연구자료 출간 등, 해외 미술관으로는 일본 교토에 있는 ‘고려미술관’이 ‘조선, 한국의 역사유물 전문전시 미술관으로는 유일하다.

특히 일본의 옛 수도로 6,7세기부터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도래인(渡來人)들이 정착하여 8세기에 강력한 불교 신자들이 황실의 직무에 관여하게 되었고, 794년 간무천황(桓武天皇 737년~806년, 재위 781년~806년, 일본의 50대 천황, 백제인의 후손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의 아들)이 도읍을 나라(奈良)에서 헤이안쿄로 옮겨 헤이안시대(平安時代)를 열었고,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 수도를 도쿄(東京)로 이전하기까지, 1000여년에 걸쳐 일본의 수도가 되었던 역사 깊은 도시 교토에 ‘우리의 문화재’를 전시하는 미술관’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미술관 내 모든 소장품이 일본 안에서 수집된 점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미술관이 바로 교토 ‘고려미술관’이다.

교토고려미술관 전경. ©김상수 미술관이자 박물관인 ‘고려미술관’은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곡절 끝에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도 모은 재산을 털어, 일본에 빼앗기고 잃어버린 우리 문화재를 되찾은, 1989년 고인(故人)이 된 재일 조선인 한국인(在日 朝鮮人 韓國人) 정조문(鄭照文 1918년~1989년) 선생의 치열한 인고(忍苦)와 집념으로 설립된 미술관이다. ‘고려미술관’ 방문기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세 차례 신는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멸망(滅亡), 백성들의 이산(離散), 유민(流民), 그리고 기민(飢民)

100년 전의 조선인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제국 13년째인 1910년 융희(隆熙) 4년 10월 1일 한일 강제합병조약이 체결되던 날, 경성부와 수원부, 개성부, 대구부, 동래부 등의 대도시들은 조용하였다. 1907년 마지막 의병이 일어나는데 이를 정미의병(丁未義兵)이라 했다. 정미의병은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령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들이 합세하여 일어났으므로, 그 파급력이 컸다. 그러나 정미의병 이후부터 강제병합 1주년이 되는 1911년까지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한 무장 항전에 참여한 수효는 전체 인구 1천 312만 명 중에서 14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한일 강제합방 무렵 전체 인구 대비 항일 전투 참전율은 1.1%였다. 조선왕조는 무기력했고 백성들은 침묵했다. 한 민족국가가 멸망하면서 이처럼 지도층이 무기력하고 백성이 침묵한 민족이란 흔치 않다.

일본의 정한론 대두시기, 조선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대처했는가

187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엽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개화론자들이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하여 일본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책이나 경제성장의 방법의 일환으로 ‘출구전략’인 정한론(征韓論)을 구체화시키면서 공공연하게 조선을 침공한다는 ‘전쟁’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나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기 동안에 조선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우리는 묻지 않고 있다. 당시 대한제국의 지도층과 고위층의 무능함과 안이한 대 일본 대응은 국가와 민족을 질곡에 빠트리고 말았다.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찢겨져 나갔다. 이산(離散)과 유민(流民), 심지어 굶주린 백성의 기민(飢民) 행렬은 이후 수십 년간 이어졌다.

몰락한 정삼품대부(正三品大夫)의 손자, 정조문

이렇듯 식민지의 경험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혹독하고 처참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대 일본 패퇴는 곧 국가체제의 멸망(滅亡)이었고, 정조문의 조부 정건모(鄭健模)가 대한제국의 정삼품대부(正三品大夫)의 벼슬이었지만 37살의 낙마로 타계한 이후, 정씨 집안의 몰락과 국가의 운명은 같이하는 상황이었다. 정조문의 아버지 정진국(鄭鎭國)이 6세에 아버지 정건모를 잃고, 이후 줄곧 가시밭길 삶을 살아야 했던 건, 그 시대 수많은 동포들의 처지와도 유사했다. 성년이 된 정진국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의 지휘로 정조문의 부친 등 상하이의 애국청년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에 전념했지만, 젊은 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당시 조선에 있는 각자 집안의 개인재산이었다. 조선의 본가에서 논밭을 팔아 자금을 댄다는 것은 이내 한계가 있었다. 정진국은 하는 수없이 조선으로 돌아와야 했다. 열차가 압록강 철교를 건너 국경을 지나 신의주역에 도착했을 때 세 명의 일본국 특별고등경찰이 요주의 인물로 정진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과 함께 6년 만에 경상북도 예천 고향에 돌아온 정진국 앞에는 귀족의 칭호까지 받았던 어머니의 쇠락한 모습과 처 유순영과 장남 정귀남, 처음 만나는 차남인 6살의 정조문, 그리고 철저하게 몰락한 가세였다. 재산을 팔아 잡화점을 시작했지만 특별고등경찰의 괴롭힘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고향에서의 생활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상태로 내몰렸다.

차라리 일본으로 가자

정진국은 1925년 5월 어머니를 모시고 두 명의 아들과 아내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을 데리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6살의 정조문은 ‘조국’이란 개념 자체를 아직 느낄 수 없는 나이였다.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 가까운 곳에 6조와 4조반 2칸의 연립주택을 빌려서 정진국은 아내와 같이 베 짜는 일을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베를 짰지만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만든 물건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흠집 있는 물건’으로 취급당하면서 반값 이하의 싼값으로 사려고 했다. 사상범을 단속하는 특별고등경찰은 매일같이 집을 드나들었다. 가족은 비지를 죽으로 끓여 끼니를 이었다. 가족 모두 지쳐갔다. 정조문의 아버지 정진국은 마음은 나라의 독립운동에 가 있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속박된 상황과 현실의 생활고를 술로 달랬다.

정조문 소년에게 ‘조국’이란 무엇인가?

일본으로 건너온 지 2년이 지나 8살이 된 정조문은 교토시내 직물점 수습공이 되었지만 가게 일본사람들로부터 받는 냉대와 따돌림과 매질에 집으로 도망쳐왔다. 그 때 할머니는 어린 손주를 아무 말 없이 꼭 껴안아 주었다. “아무리 못 먹더라도 좋다. 어린아이를 고용살이로 내보내는 것은 그만두자”라고 할머니가 말하자 정진국은 “어머니,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정조문은 가난해서 학교에 갈 생각은 감히 생각도 못했다. 4학년부터 겨우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소학교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만이 정조문이 받았던 학교 교육의 전부였다. 정조문은 공부하는 것을 기뻐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교과서를 빌려 독학, 1년 동안에 동급생의 학력을 따라 잡았다.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조센징’ 따돌림은 여전했다.

역사 수업이 끝나면 “조선을 징벌하자”며 5,6명의 학생들이 매일 교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정조문이 교문을 나오면 일제히 돌을 던졌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년~1611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년~1598년)의 조선정벌 이야기가 어린 일본학생들을 우쭐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휴식시간에는 “이놈, 조선. 양손을 들어 납작 엎드려. 조선 정벌하겠다”라고 하며 정조문을 때렸다. 그것을 본 담임선생은 일본제국이 말한 내선일체(內鮮一體)로 “지금은 조선인도 같은 훌륭한 일본인이다. 조선인이라고 따돌리는 것은 안된다”라고 말했다.

[김상수칼럼] '조선인'임을 한탄하던 소년, '일본 속 조선'을 모으다: 정조문(鄭照文) | 인스티즈
진구(神功) 황후의 삼한(三韓)정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 등, 이러한 역사교육에 기초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이란 일본 및 그 식민지에 사는 주민들에게 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교육 정책으로,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타이완인, 남양 군도 주민 등 식민지 주민들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동남아시아 점령지의 원주민들, 그리고 아이누(오늘날의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의 도호쿠 지방(東北地方), 러시아의 쿠릴 열도, 사할린 섬, 캄차카 반도에 정착해 살던 주민이다. 일본 민족과는 다른 북방 몽골리안의 한 민족으로, 역사적으로 개별적인 부족 국가 형태를 지녔으며, 독자적인 언어인 아이누어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일본의 근대화 이후 대동아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에 편입되었다)와 류큐인(琉球人)도(오키나와 현과 가고시마 현 등에 주로 정착해 살아오고 있는 민족을 뜻하는데, 오키나와인이라고도 하며 홋카이도와 마찬가지로 근대 일본의 대동아 정책에 따라 강제적으로 일본에 편입되었으며, 2차 대전에서는 태평양 전진기지로서의 전쟁의 한복판에 놓였다. 전후에는 미국에 의한 강제적인 기지화가 진행되어 한때는 전 국토의 85%까지가 미군기지로 쓰였으나, 현재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 때문에 점차적으로 미군기지를 축소하고 있다. 약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 본토로 가기 위해서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기도 했다. 소수 류큐인들에 의해 류큐 공화국 성립을 위한 류큐 민족 독립 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강제적인 동화 정책의 일부로서 일본인이 되었다.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 1세대 소년 정조문은 이 황민화 역사교육에 의해 문화적인 열들감을 가지게 되었다. 소년 정조문의 후일 한국과 일본에 상관하는 역사에 대한 탐구와 추적은 이때 경험한 따돌림 등, ‘조센징’ 상처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는가? 곧 자기정체성(Identity)의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소년, 마라톤을 완주하다.

몹시 마른 한명의 소년 정조문이 어른들과 같이 마라톤 경기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거리 30Km 구간이다. 마라톤을 뛰어본 적은 없지만 상품으로 쌀과 채소를 준다고 하니 완주하면 쌀을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교토고려미술관 정원. 사진=고려미술관 끝까지 뛰어가는 소년은 정조문 밖에 없었고 나머지 주자는 다 어른들이었다. 그 어른들도 하나하나씩 탈락했다. 정조문은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반드시 쌀을 받아야 한다” 겨우 5명의 어른들만 남은 여섯 번째의 주자로 정조문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달리자, 마을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소년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어른 중에 한 사람이 탈락하여 정조문이 5위로 들어왔다. 곧 탈수증세로 의식불명이 됐다. 집으로 옮겨진 정조문은 가위에 눌리면서도 “살, 쌀”하고 를 계속했다.

소년의 가슴속에는 이미 엄청난 집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생긴 오른쪽 무릎의 통증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게 된다.

가족과의 헤어짐, 1945년 아버지의 귀국과 이듬해 1946년 아버지와의 사별

정조문은 소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서 졸업식 답사를 읽는다. 중학교로 진학하여 “좀 더 공부하고 싶다”라는 생각 속에 답사를 읽고 연단을 내려온 정조문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험난한 인생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7년 여름, 형 정귀문과 자신 정조문, 누이동생 정청자, 그리고 일본에서 태어난 어린동생 정혜문을 남기고 어머니 류순영이 돌아가셨다. 과로가 원인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주기가 지나고 아버지 정진국은 재혼하였다. 그 후 형 정귀문은 집을 나갔다. 아버지 정진국은 도야마현(富山県)의 아는 사람을 따라 교토를 떠났다.

정조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정조문은 할머니와 누이동생과 막내를 대리고 오사카로 이주를 했다. 정조문은 항만노동, 토목공사, 인력거꾼, 하천공사를 하며 공사현장을 돌아다녔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실행되었다. 일상에서도 조선어 사용은 금지됐다.

1941년에는 강제징용으로 도쿄 하네다(羽田) 군수물자 공장으로 정조문은 보내졌다. 고사포(高射砲)를 제조하는 그 공장에서는 1장에 10톤 무게의 철을 녹였다. 위험한 작업이었다.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 때 정조문은 도쿄에 있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친 다음 날 아침, 높은 언덕에 올라가 보니 도쿄는 불에 탄 들판으로 변하고 아무 것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오사카에 있었던 이버지 정진국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빨리 돌아와” 정조문은 오사카로 갔다. 형 정귀문도 도착해 있었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아버지 정진국은 아들들에게 신문에서 오린 기사를 품에서 꺼내어 펼쳐 보여주었다. “김구 선생, 상하이에서 귀환”, 아버지 정진국은 입을 열었다. “김구선생이 조국으로 돌아오셨다. 나도 조국 재건을 위해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가서 안정되면 곧 연락할 것이니 너희는 언제라도 귀국할 수 있도록 기다려라”고 말했다.

아버지 정진국은 아내와 후처에서 난 자식 3명과 함께 오사카의 타이쇼오바시(大正橋)에서 어선을 타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후에 형 정귀문은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동생 정조문과 자주 이야기하였다.

[김상수칼럼] '조선인'임을 한탄하던 소년, '일본 속 조선'을 모으다: 정조문(鄭照文) | 인스티즈
“아버지는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닐까. 새로운 기족과 살기 위해 우리를 두고 간 것은 아닐까?” 두 형제는 이런 의구심으로 술자리에서 자주 충돌하였다.

아버지가 떠나고 정조문은 짐을 정리하여 형과 함께 아버지가 부르기를 기다렸다.

1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전보가 왔다. 아버지가 대구에서 폭동에 휘말려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대구 10·1 사건(大邱 10·1 事件)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 영역인 대구 지역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 유혈 사건이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10월 대구 폭동, 10월 폭동, 대구 폭동, 옹호하는 측에서는 10월 인민항쟁, 대구 10월 항쟁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광복 이후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 시기의 남한 내 민중들의 삶은 굶주리는 처지였다.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콜레라가 창궐한 대구의 굶주림은 특히 더 심했었다. 대구, 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해버린 탓이었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 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했다. 당시 돈이 있다 해도 쌀을 구할 수 없었다. 또한 국립경찰로 채용된 과거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일제시대 방식 그대로 농민들의 쌀을 강탈하다시피 공출해갔다. 친일출신 경찰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매우 커져갔고, 경찰은 이에 대해 보복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었다. 이런 가운데 대구, 경북 일대의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 1946년 9월에 철도노동자, 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의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본격적으로 미군정과 정면충돌했다.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즉흥적인 폭력 사태로 발전되어 버렸다. 대구 10.1 사건 참가자의 시각에서 이 사건은 전국적인 규모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대중 운동이다. 주도 세력은 조선공산당이며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조직이 활용되었으나, 당시 공산당 고참 간부들은 사태를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이 사건은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공무원 사망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대구 경북지역에서만 관청 건물 4동과 일반 건물 6동이 불에 타 전소되기도 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선산군 구미 지역에서 경찰과 시위대를 중재하던 중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사망하였다. 10월 사건의 근본원인은 일제 강점기의 지배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미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 미군정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 사냥,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권력 복귀 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게 되면서 민중들의 분노에 그 원인이 있었다.-

정조문은 아버지를 잃은 것으로 조국과 연결되었던 실이 툭하고 끊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형 정귀문과 정조문은 안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유녀시절을 보냈던 경북 예천 우망리(憂忘里) 마을이 자신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생각으로 일본에서 60년을 보냈다.

정조문은 자신이 끝내 고향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뼈를 묻게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코가게 개업, 조선백자와의 만남

교토고려미술관 설립자 고 정조문 선생과 문화재 수집인연이 된 17세기 조선백자. 사진=고려미술관 1951년 33세인 정조문은 교토에서 코 가게를 열고 사업을 시작했다. 코 사업은 해가 갈수록 잘 되었지만 폭력배의 간섭이나 경찰의 급습이 늘어나면서 운영에 차질을 빚자 정조문은 재일동포의 경영자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교토재일조선인유기업조합(京都在日朝鮮人遊技組合)’을 만들고 일본경찰을 의식해 일본인을 끌어다가 ‘교토부유기업연합회(京都府遊技業聯合會)’를 새롭게 결성하여 코사업을 일본경찰에 이해시키는 것에 주력했다.

코사업을 기반으로 정조문의 사업은 선술집, 고깃집, 초밥집, 찻집을 개업하면서 사업을 확장시켰다. 사업이 정상화되고 조합활동도 안정되어 가던 어느 날, 정조문은 혼자서 교토 산조(三条) 뒷골목을 산책하다가 고미술 거리로 발걸음이 갔다. 어느 한 상점에 여러 점의 백자 항아리가 진열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무런 장식이나 채색도 없이 다만 곡선만이 이름답게 강조되어 보였다. 정조문은 그림도 그려지지 않은 순백의 도자기를 보며 묘한 매력을 느꼈다.

도자기 가격에 정조문은 놀랐다. 항아리가 50만엔? “뭐가 그렇게 비쌉니까?" 골동품상 주인의 말이 이어졌다. “이조백자입니다. 이 정도의 것은 좀처럼 없습니다” “이조라면? 조선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맞습니다”, 주인은 자신 있는 얼굴로 답했다. “일본사람들이 조선의 항아리를 좋아합니까?”

훗날 1983년 6월 정조문은 오사카 ‘일본 학교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의 교육을 생각하는 모임’이 발행하는 ‘재일조선인 학생 교육을 생각하기 위한 자료집 2’권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였다.

“일본의 지식인은 조선의 문화재를 매우 즐기고, 이름답다고 극찬하는 반면에 그것을 만들거나 전승해 오는 조선이나 조선 사람을 멸시하는 모순에 빠져있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왜 조선인으로 태어났는가!” 한탄하던 소년이 만난 ‘조선의 자랑거리’

정조문은 주인과 협상하여 돈은 일 년간 월부로 갚아나가기로 하고 그 항아리를 손에 넣었다. 소학교-초등학교-에서는 조선정벌을 배웠고, 노동현장에서는 ‘조센징’이라고 하여 임금을 떼이기도 했다. 어디서도 자랑거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조선’이 고미술 상점에서는 가장 높은 가격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어릴 때 동네 마라톤 대회에서 목숨을 걸었던 집념이 다시 살아났다. “나도 문화재를 수집해 보자, 일본 속의 ’조선‘을 모아 자신을 잃었던 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스러움을 보여주자”라고 생각한 정조문은, 이렇게 해서 고려와 조선의 고미술품 수집에 열정을 띠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조문은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스스로 언제인가 일본인에게 앙갚음 해야지 하면서 이제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로 앙갚음 한다는 것은, 개인이 금전적으로 성공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하며 정조문은 마음속에 ‘정당한 앙갚음’을 되새겼다.

“재일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을 보여주자”, 정조문은 재일동포와 자라는 2세 아이들에게 ‘진품’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정조문은 그때부터 고미술을 관계하는 교토 오사카 골동품상은 물론이고 일본 전국의 고미술 상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조선의 것’과 ‘조선의 문화재’ 관련 일이라면 어디든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김상수칼럼] '조선인'임을 한탄하던 소년, '일본 속 조선'을 모으다: 정조문(鄭照文) | 인스티즈
여기서 정조문은 재일동포 자녀들의 민족교육의 중요성에도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자신이 가난 때문에 소학교 3년만 다녔던 일, 자신이 받은 3년의 교육기간 동안에는 조선어가 박탈당하고, 조선의 역사가 말살당한 것에 대한 아픔이 있었던 그는 사업을 통해 번 돈을 조선과 고려의 고미술품을 사들이는 일과 ‘민족학교’를 세우는 것에 투자하고 열중하기 시작했다.

16살 조선소년의 죽음 앞에서 정조문은 조선학교설립에 매진하다.

시간을 뒤로 돌려 1948년 4월 26일, 일본정부의 결정으로 재일조선인 민족학교 폐쇄령을 내린 오사카 지사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재일동포 3만 명이 오사카부청 앞 오사카성(大坂城) 광장에 모여 항의 데모를 했다. 정조문도 현장에 있었다. 경찰대와 데모대는 팽팽한 대치상태였다.

그 때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한 소년이 정조문 앞에서 쓰러져 그 자리에서 숨졌다. 16살의 김태일 소년이다. 정조문은 충격을 받았다. 소년의 죽음을 가슴깊이 새기는 것과 함께 자신의 아이들을 황국사관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족교육을 실행해야 한다는 집념을 그는 불살랐다.

이후 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1955년 교토 민족학교 건립에도 거액의 지원을 하고 ‘교토조선중고급학교’와 ‘교토조선제3초급학교’ 건립에 건설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정조문의 2남 3녀는 모두 이 학교를 졸업했다.

1989년 운명할 때까지 정조문의 국적은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아닌, 1925년 당시 도일(渡日) 때의 조선적(朝鮮籍) 그대로였다.

정조문은 50년대와 60년대 당시 재일동포들의 일반적인 분위기도 그러했지만 조선인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일깨운다는 취지를 앞세우는 조총련(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에 가담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하는 일이 교육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조총련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대신 일체의 정치활동은 삼갔다. 남과 북이 분단된 상황을 서로 정당화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직 민족학교 건립에 많은 수고와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학교설립에 간섭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조문과 같이 실질적인 자금을 지원하는 사람이란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정조문이 조총련과 관계가 틀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1969년부터 발행한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잡지를 그만 낼 것을 조총련이 강박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을 시정하고 재일동포의 지위향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무리를 하면서 발간하고 있는 잡지를 그만 내라고 하는 조총련의 압박을 정조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문제의 적(敵)은 얘기치 못한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정조문은 조총련의 교토본부에 불려갔다. 이유를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조총련의 간부는 “잡지를 발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1971년 무렵부터 더 강한 압력이 시작되었다. ‘재일본교토조선인상공회의’ 부의장과 ‘교토조선신용조합’의 이사를 강제사임하게 했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잡지발행에 대한 보복이었다.

당시 이런 일화가 있다. 교토회관 1층에서 조총련 교토부 대회가 열렸던 때의 일이다. 단상에는 조총련당 중앙원장인 한덕수가 앉아있었고 조총련 교토의 직원들은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그중에 정조문도 있었다. 이 대회에서는 우선 김일성 장군을 선창하며 따라하는 것이 통례다. 기립해서 선창하는데 정조문은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있었다. 단상에서는 교토위원장이 기립할 것을 재촉했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문화사업에 대한 반이성적인 조총련의 압력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위행위였다.

이 사건은 일본 전국의 조총련사회에서는 큰 문제가 됐다. 정조문은 북조선으로부터 받았던 공로상인 ‘국기훈장’ 박탈과 조직으로부터의 모든 지위를 빼앗겼다.

정조문의 국적은 죽을 때까지 ‘조선적’이었다. 그것은 북조선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적도 아니었다.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조약인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52년에 발효되자 재일동포의 모든 권리를 ‘외국인’으로 규정시켰다. 보험, 연금의 관리, 징병 군인들의 급료는 박탈되었다.

모든 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일본에 왔다’는 식이었다. 거기에는 강제노역이나 종군위안부 문제 등을 역사의 뒷그림자로 숨겨버리려는 의도가 짙었다.

그리고 ‘영주권 신청’문제였다.

‘자신들이 스스로 일본이란 외국에 왔으니까 영주권이 필요하다면 한국 국적으로 바꾸라’고 일본 정부는 말했다. 그러나 정조문은 국적변경을 하지 않았다. 1925년 일본에 건너올 때 그대로인 ‘조선적’을 그대로 지켰다.

‘조선적’으로 그대로 있는 것이 잘못된 일본 정부의 처사에 저항하는 수단이었고, 남과 북으로 갈라진 내 나라의 현재를 용인하지 못하겠다는 민족주의적 발로였고, 갈라지지 않았던 하나의 국가이고 민족 공동체였던 ‘조선적’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일념이었다.

[김상수칼럼] '조선인'임을 한탄하던 소년, '일본 속 조선'을 모으다: 정조문(鄭照文) | 인스티즈
더구나 재일조선인으로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종내는 남인가? 북인가? 그리고 조총련인가? 재일본대한민국민단(在日本大韓民国民団)인가? 하는 물음 앞에 어느새 정조문은 ‘나의 조국은 분단되지 않은 하나의 조국이다. 분단된 남북 어느 쪽도 나는 가지 않는다’라는 강한 의지를 지니게 됐다.

그리고 이런 의지는 통일된 조국이 되어야 조국을 방문하겠다는 그의 신념에 따라, 정조문은 죽을 때까지 조국 땅을 밟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든 하는 고향 방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가려고야 한다면 갈 수 있었지만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끝내는 통일조국을 보지 못하고 이국땅인 일본에서 눈을 감아야했다.

국외 소재 한국문화재 실태와 ‘교토고려미술관’

2011년 3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0년 한해 국외 소재 한국문화재 실태조사결과, 기존의 116,896점에서 23,000여 점이 늘어난 140,560점(20개국 549개 기관, 개인 포함)이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각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이 65,000여 점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미국으로 38,000여 점, 독일 10,000여 점 순으로 나타났다.

고려미술관을 관람하는 관람객들. 사진=고려미술관 교토고려미술관 전시실. 사진=고려미술관 일본 내 한국문화재 현황은 집계된 것만으로도 6만 5천여 점이 된다. 집계되지 않고 민간인이 보관하거나 신고하지 않은 문화재까지 염두에 둔다면 10만점을 훨씬 넘는 숫자일 것이다.

큰 컬렉션만 일람해보자면, ‘일본도쿄국립박물관’에 현재 집계로만 4천 895점, ‘일본국궁내청’에 4천 678점, ‘도쿄국립국회도서관’ 지부 ‘동양문고’에 4천 998점, ‘일본도쿄내각문고’에 2천 434점, ‘도쿄국립박물과’ 내 ‘오쿠라콜렉션’ 1천 856점, ‘일본존경각’ 1천 369점, ‘일본오타니대학’ 5천 605점, ‘일본교토대학문학부박물관’ 2천 254점, ‘일본교토대학부속도서관’ 2천 496점, ‘일본교토남선사’ 1천 830점, ‘일본교토상국사’ 1천 965점, ‘일본덴리대학덴리도서관’ 5천 711점, ‘일본오사카부립도서관’ 4천 746점, ‘일본나고야시교육위원회’ 1천 386점, ‘일본아이치현서미시립도서관’ 1천 859점,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418점, ‘도쿄국립국회도서관’에 1천 750점, ‘일본도쿄민예관’에 1천 603점, 그리고 정조문이 설립한 ‘교토미술관’에 1천 700점 등이 일본 내 주요 콜렉션이다.

나는 여기서, 재일 조선인 한국인 정조문이 혼자 힘으로만 모은 1천 700여점이라는 ‘교토고려미술관’의 컬렉션 숫자에서 새삼 정조문, 그의 각고(刻苦)의 필사적인 수집노력이 어떠했는가에 주목하게 된다.

한국의 문화재청은 이제부터라도 ‘교토고려미술관’에 어떤 협력과 도움을 보탤 것인가를 심사숙고, 정책으로 집행해야 할 때다. 일개 개인이 눈물 겹게 수집하고 지키고 가꿔온 문화재 지킴이로의 진실한 노력은 국가의 정당한 협력으로 신장(伸張)되어야 옳다.

“무지하면 비굴하게 된다”

정조문이 ‘조선백자’의 발견으로 조선역사에 눈을 뜨고,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면, 즉, ‘무지하면 비굴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을 시정하는 방법으로 일본식민지시절 강탈당하거나 어리석게도 건네준 일본국내에 산재한 조선 문화재의 발굴에 진력하게 된 이유에는, 특히 재일조선인을 강하게 하여 일본인들에게 이유 없이 경멸당하고 멸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자각과 실천에 있었다. 문화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공동체로의 자존이 비로소 세워진다는 것은 그의 일생의 깨달음으로 득(得)한 제일의의 원칙 때문이었다.

우리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재일 조선인 한국인 정조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는 남북으로 갈라진 재일교포사회 어떤 조직의 힘도 빌리지 않았고,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우리의 유물을 전시하는 미술관 박물관을 세웠다. 그것도 일본의 정신적 수도인 교토에.

(중, 하편으로 이어짐)

[참고, 인용도서(參考, 引用圖書)]

<정조문과 고려미술관> ‘재일동포의 삶과 조국애’ 정조문 정희두 편저(編著)

최선일, 이수혜, 김희경, 손은미, 강미경 편역(編譯)

김상수 작가·연출가 [email protected]

 


[김상수칼럼] '조선인'임을 한탄하던 소년, '일본 속 조선'을 모으다: 정조문(鄭照文)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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