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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10/08) 게시물이에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 인스티즈


고운기, 문명

 

 

 

귀족들 마차가 거리를 메우자

파리와 런던의 시가지를 온통 말똥이 점령했었다지

마차에서 쏟아지는 말똥이 공해가 되어

가솔린 쓰는 자동차를 만들었다지

말똥보다 가득하고

말똥보다 무서운

배기가스 매연이 나타날 줄 몰랐었겠지

그리운 말똥

먼 훗날에도 시인은 여전하겠지

그리운 매연

이라고 쓰겠지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 인스티즈


정끝별, 밥이 쓰다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 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 인스티즈


문정희, 율포의 기억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뽑혀 밀려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 인스티즈


김형영, 노루귀꽃

 

 

 

어떻게 여기 와 피어 있느냐

산을 지나 들을 지나

이 후미진 골짜기에

 

바람도 흔들기엔 너무 작아

햇볕도 내리쬐기엔 너무 연약해

그냥 지나가는

이 후미진 골짜기에

 

지친 걸음걸음 멈추어 서서

더는 떠돌지 말라고

내 눈에 놀란듯 피어난 꽃아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 인스티즈


김광규,

 

 

 

낡은 혁대가 끊어졌다

파충류 무늬가 박힌 가죽 허리띠

아버지의 유품을 오랫동안

몸에 지니고 다녔던 셈이다

스무해 남짓 나의 허리를 버텨준 끈

행여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물에 빠지거나

땅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던 끈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나의 허리띠를 남겨야 할

차례가 가까이 왔는가

앙증스럽게 작은 손이 옹알거리면서

끈자락을 만지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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