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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10/14) 게시물이에요

영조실록 13권, 영조 3년 10월 20일 임인 11번째 기사 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흉역의 서원을 훼철하고 위판을 불사르게 했는데 바로 이행하지 못한 예조의 낭청을 태거시키다

 

또 소회(所懷)를 진달하기를,

 

"남쪽 지방에 적환(賊患)이 치성하여, 근래에는 부안(扶安)과 변산(邊山)에서 적도(賊徒)들이 많이 몰래 점거(占據)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낮에 장막(帳幕)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노략질을 하고 있는데, 변산(邊山)에 있는 큰 절에 적도들이 들이닥쳐 절의 중을 불러서 말하기를, ‘삼동(三冬)에는 밖에서 거처할 수 없으니 너희들이 우선 절을 빌려주어야 하겠다.’ 하자, 중들이 두려워 감히 따지지 못하고 모두 눈물을 흘리고 흩어져 갔다고 합니다. 남쪽에서 온 사람이 호남 어사(湖南御史)의 말을 듣고 와서 이런 사실을 자자하게 전하였습니다. 전주(全州)의 영장(營將) 전순원(全舜元)은 도적을 금하는 행정(行政)이 너무도 소활(疏闊)하니,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또 부안(扶安) 근처 고을의 수령들을 무신(武臣)으로 가려서 차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후(虞?)877) 는 일개 문사(文士)였지만 능히 조가(朝歌)의 도적을 평정하였으니, 무수(武?)878) 를 차송하는 데 대해서는 내가 항상 옳지 않게 여겨왔다. 처음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기곤(飢困)을 견디어 내지 못하게 만들고서는 끝에 와서 또 잡아서 죽이는 것은 형벌을 가지고 강제로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수의(繡衣)를 차견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심(誠心)으로 구제하고 잡역(雜役)을 면제시킨 다음 불러오게 한다면 저절로 안집(安集)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의(繡衣)가 성심을 가지느냐 성심을 가지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니, 특별히 어사(御史)를 신칙해야 한다."

 

[註 877]우후(虞?) : 후한(後漢) 무평(武平) 사람. 한 안제(漢安帝) 때 강(羌)이란 만족(蠻族)이 변경(變境)을 침범하여 살상(殺傷)·약탈(掠奪)을 자행하였는데, 우후가 조가(朝歌)의 장(長)에 임명되어 그 지방의 장사(壯士)를 모집해서 적중(賊中)에 들여보내 위협하고 노략질하게 하고 복병(伏兵)으로 적 수백 명을 죽여 강호(羌胡)를 소탕시킨 고사(故事)가 있음.

 

[註 878]무수(武?) : 무관인 수령.

 

 

 

영조실록 13권, 영조 3년 10월 22일 갑진 2번째 기사 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이광좌가 서울과 지방의 재력이 부족한 것을 진달하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출숙(出肅)하니,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근일에 듣건대, 호남(湖南)의 유민(流民)들이 무리를 모아 도당을 이루어 하나는 변산(邊山)에 있고 하나는 월출산(月出山)에 있는데, 관군(官軍)이 체포할 수가 없어 그 기세(氣勢)가 크게 떨친다고 하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 호남의 수령을 각별히 가려서 차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을 비록 가려서 보내더라도 영장(營將)을 만약 가려서 차임하지 않는다면 실제의 효과를 요구하기가 어려우니, 영장도 각별히 가려서 차임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또 아뢰기를,

 

"살옥(殺獄)에 대해 5일에 1차 동추(同推)884) 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영갑(令甲)885) 인데, 동추관(同推官)이 한 달에 여섯 번을 다른 고을로 간다면 고을 일에 마음을 전일하게 기울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져서 한 달에 1차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한 달에 3차씩 하는 것을 결단코 정폐(停廢)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註 883]갑술년 : 1694 숙종 20년.

 

[註 884]동추(同推) : 관원이 합동으로 추문(推問)함. 지방에 있어서의 사형에 해당하는 범인은 관찰사(觀察使)가 인접 수령(守令)을 동추관(同推官)에 임명하여 관할 고을의 수령과 연석(連席)하여 형추(刑推)를 행하는 것을 말함.

 

[註 885]영갑(令甲) : 법령(法令).

 

 

영조실록 14권, 영조 3년 11월 21일 계유 2번째기사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호남 별견 어사 이광덕이 호남의 진휼 곡식을 구할 방안을 아뢰다

 

인하여 변산(邊山)의 도둑에 관한 일을 물으니, 이광덕이 말하기를,

 

"근래 거듭 흉년을 만나 곳곳에 도둑이 있으나 이는 좀도둑에 지나지 않으며, 원래 황소(黃巢: 당나라의 도적)의 도당(徒黨)이 산중에 웅거(雄據)한 데 비교할 바가 아니니 전(傳) 한 사람의 잘못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당시 변산(邊山)에 출몰(出沒)하는 도둑의 일로 요망한 말들이 어지럽게 퍼져서 도성(都城)의 인심이 흉흉(洶洶)하여 심지어는 피난차로 떠나는 자도 있었다."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16일 병인 8번째기사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출신 이징관의 아노가 공술하다

 

어영 기찰 장교(御營譏察將校)가 의심스런 사람인 출신(出身) 이징관(李徵觀) 및 아노(兒奴) 귀금(貴金)을 성밖에서 잡아 대궐로 올려보냈다. 국문하여 한 차례 형신(刑訊)했으나, 불복하였다. 귀금을 문초하니, 공술하기를,

 

"상전(上典)은 직산(稷山)에 사는데 전립(氈笠)을 쓰고 환도(環刀)를 차고 적당(賊黨)에 들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적은 변산(邊山) 정도령(鄭都令)과 갈원(葛院) 권진사(權進士) 등으로서 장군(壯軍)을 모집하여 군복(軍服)을 만들었으며, 박창급(朴昌伋)은 그 일족이 매우 많은데 모두 적중에 들었습니다. 이번 15일에 경성을 포위하고자 하여 이른바 정도령이 구만리(九萬里) 권생원(權生員) 집에 와 상의하였는데, 능히 둔갑(遁甲)·부작(符作: 부적) 등을 잘한다고 합니다."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19일 기사 11번째기사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민관효와 신광원을 대질시키다

 

민관효(閔觀孝)를 문초하였으나 불복하였으므로, 민관효와 신광원(愼光遠)을 대질시켰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이달 초여드렛날 네가 어찌 ‘우리 무리가 장차 모조리 죽게 되었다.’라고 하지 않았으며, 네가 또 이하(李河)와 함께 우리 집에 오지 않았느냐? 네가 주머니에 은(銀) 40냥, 견설금(犬舌金) 12편(片), 기은(?銀) 3편을 넣어서 나에게 주면서 양성(陽城) 권서린(權瑞麟)의 집으로 가서 무리들을 먹이라고 권하지 않았느냐?"

 

하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허무맹랑한 말이다."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네가 ‘이 은은 강상(江上)의 창산군(昌山君)168) 집에서 가져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창산군의 아들이 네 집에 오자, 네가 ‘이는 말을 숨길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를 양성으로 가라고 권할 때 너와 이하가 힘써 권하였고, 어찌 창산군의 인마(人馬)를 보내 주지 않았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양성에 갈 때 이하가 어찌 권서린에게 편지 쓰기를, ‘그 일은 이 벗에게 물으면 알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근래에 네가 이하를 만나서 혹 한 말이 있었느냐? 나는 원래 수작한 바가 없다. 창산군 집은 종실(宗室) 중에서 가난한 집인데, 어떻게 은자를 마련하겠느냐?"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네가 매양 이유익(李有翼)의 자(字)를 일컬으면서 ‘성례(聖禮)는 마땅히 태평 재상(太平宰相)이 될 것인지라, 내가 늘 일을 의논하고 있다. 이인좌가 이달 10일에 군사를 일으켜 14일에 모두 안동(安東)에서 만나고, 권서린(權瑞麟)은 13일에 양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15일에 모두 청주에서 모여 충청 병사를 참(斬)하기로 하였다.’라고 하고는, 네가 나를 시켜 이런 소식을 양성에서 탐지하도록 하지 않았느냐? 권서린이 13일에 출발하고자 하였는데 이인좌가 약속한 기일에 이르지 않아 고민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태징(南泰徵)의 일은 너와 이하에게 들었다."

 

하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네가 온 세상을 일망타진하려 하는구나."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초여드렛날, 내가 과천(果川)에 있을 때 네가 종을 보내 나를 불렀기 때문에 배를 타고 현석(玄石)에서 왔는데, 그날 빗속에 창산군의 아들이 와 돈을 내어 돼지 고기를 사 먹었다. 그때 네가 ‘이제 곧 사람을 평안 병영으로 들여보내 40금(金)으로 말을 사서 기다리고자 한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민관효를 1차 형신하였으나 불복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남태징·신광원·민관효·이세룡을 진문(陣門) 밖에서 참(斬)하라."

 

하였다. 남태징은 평소 경박하고 어리석었는데,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에게 붙어서 통제사(統制使)에 제수되고 차례로 장임(將任)에 올랐다. 호남 괘서(掛書) 사건이 일어나자 훈장(訓將) 이삼(李森)이 기찰(譏察)을 보내도록 권고했는데, 핑계해 미루고 응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전주영(全州營)의 기찰하는 장교(將校)가 변산(邊山)의 적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까지 지어내어 이삼을 공갈했다. 14일에 상변(上變)하기에 이르러서는 남태징이 이삼을 와서 보았는데, 평지(平地)에서 세 번이나 넘어져 사람들이 그의 마음이 동요되어 있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모역한 형상이 환히 드러나자, 임금이 그냥 두었다가는 변이 생길까 염려하여 신광원 등과 함께 빨리 죽이게 하니, 이로부터 인심이 조금 진정되고 적의 기세 역시 크게 꺾이어 모두 임금의 독단(獨斷)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하(李河)를 문초하였으나 불복하므로, 임금이 이하와 신광원을 대질(對質)시키도록 했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초여드렛날 네가 비를 맞으며 와서 양성(陽城) 권서룡(權瑞龍)의 서찰에 대한 일을 묻지 않았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11일에 민관효가 은을 가지고 오고 이하가 권서린에게 보내는 글을 지어가지고 와서 이어 신을 시켜 임서호(任瑞虎)를 가서 보게 하였는데, 그의 집을 몰라서 가서 보지 못하였습니다. 임서호는 바로 임서봉(任瑞鳳)의 아우입니다."

 

하고, 이하는 말하기를,

 

"민관효를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민관효가 어느 날 왔기에 사는 곳을 물었더니, 민관효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근일 영남에 큰 거조(擧措)가 있다.’ 하기에 내가 무슨 거조냐고 물었더니, 민관효가 ‘영남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기로 하였다. 그대가 박필현(朴弼顯)과 친한데 이 일을 어찌 모르는가?’ 하였습니다. 그후 민관효가 세 번 와서 신광원의 일을 말하기를, ‘양성의 대적(大賊)이 영남의 적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만약 이하에게 물으면 어떻게 우리집에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이하가 말하기를,

 

"내가 민관효에게 묻기를, ‘누가 양성을 왕래하고 있는가?’ 하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그런 사람이 있다.’라고 하여 함께 신광원의 집에 가서 서로 만나보고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이하가 말하기를, ‘내가 원룡(元龍)대감을 만나 상의할 일이 많은데, 그 집은 이목이 번잡해 내가 가서 만나볼 수가 없어 피차 모두 늦추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이하가 말하기를,

 

"원룡은 남태징(南泰徵)의 자(字)인 듯합니다."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영남과 호남에서 회합할 기약을 어기자 이하가 나를 시켜 임서호에게 가서 물어보도록 했는데, 그 사람을 모르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하를 1차 형신하니, 이하가 공술하기를,

 

"신은 박필현과 중년에 서로 친하게 되었는데, 박필현이 말하기를, ‘영남과 서울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너도 그 무리에 들고자 하는가?’ 하기에, 신이 누구누구가 들어 있는가 물었습니다. 박필현이 말하기를, ‘영남 및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군사를 일으켜 들어오면, 일이 성취될 것이다. 함께 일하는 자는 나와 한세홍(韓世弘)·이인좌(李麟佐), 동계(桐溪)169) 의 자손인 정가(鄭哥)로 이름을 모르는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박필현이 장차 태인(泰仁)으로 부임하려 할 때 말하기를 ‘양성에 정세윤(鄭世胤)이란 자가 있어 충청도 일을 주관한다.’고 하였는데, 하루는 정세윤이 신의 집에 와서 묻기를, ‘박평중(朴平仲)170) 을 아는가?’라고 하므로, 신이 안다고 하였습니다. 정세윤이 말하기를, ‘평중을 안다면 내 일도 알 것이다. 내가 이제 군사를 모아 모반(謀叛)하려 하는데 영남이 모두 일어나고, 양성의 최경우(崔擎宇)·권서린(權瑞麟)도 군사를 모으는데 괴수(魁帥)는 바로 나다. 서울에서는 이유익(李有翼)·양명하(粱命夏)가 일을 주관하는데 남태징 역시 참여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영남의 군사는 정세윤의 무리가 안에서 일어나고 평안 병사가 군사를 일으켜 들어오면 반드시 일이 성취될 것이며, 남인(南人)은 민관효(閔觀孝)가 주관하고, 소북(小北)은 양명하가 주관하며, 소론(少論)은 박필현·이유익·윤덕유(尹德裕)가 주관하는데, 박필현이 비록 읍재(邑宰)로 나가 있지만, 사실상 괴수(魁帥)이며, 창산군(昌山君) 역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내병(內兵)은 창산군이 그 집 종들을 모으고 양성의 군사 절반을 서울로 올라오게 해 쓰며, 한유(韓游)·한순(韓洵)·한광(韓光)·윤천경(尹天擎), 정가(鄭哥)로 자(字)가 백통(伯通)인 자, 윤연(尹?)·윤수(尹邃)·남태적(南泰績)·이정(李檉) 역시 그 가운데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박필현과 한광의 말로서 신은 그 얼굴을 모르며, 한음(漢陰)의 자손 이지인(李志仁)은 바로 신광원(愼光遠)의 주인(主人)인데, 이지인의 4촌인 이흥인(李興仁)은 어떤 사람은 들었다 하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박필몽의 큰 아들과 무겸(武兼)으로 황씨(黃氏) 성을 가진 자와 사인(士人) 이사백(李師白)이 평안(平安) 병영으로 간 것은 대개 이 일을 위해서인데, 가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민관효가 양성의 군사를 호궤(?饋)하기 위해 처음에 돈 3백 냥을 보냈고, 재차 보낸 은(銀)은 몇 냥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외에도 들어간 사람이 없지 않은 듯하나 전한 말이 자세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2차 형신하니, 이하가 또 공술하기를,

 

"모의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문관(文官) 조상(趙?)이 누락되었습니다. 이지인(李志仁)은 장사(壯士)여서 신광원과 친한 장사가 이지인의 집에 많이 모이는데, 만약 신광원에게 물으면 그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지인의 조카가 있어 ‘원룡(元龍) 대감’의 말을 조카와 수작하였는데, 내용은 ‘일이 이루어지면 훈장(訓將)은 점칠 수 있는 것인데, 이삼(李森)의 어머님 병이 바야흐로 중하니, 만일 상을 당한다면 내가 마땅히 훈장을 차지할 것이다.’고 한 데 불과했을 뿐입니다. 영남의 군사는 숫자가 도합 8천 명이요, 양성의 군사는 3천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3차 형신하니, 처음 문초할 때와 같이 불복(不服)하였다. 인엽(人燁)을 문초하니, 인엽이 공술하기를,

 

"신은 민관효와 사촌 남매(?妹)간입니다. 정월 사이에 민관효가 은냥(銀兩)을 요청하기에 80냥을 빌려 주었지 40냥이 아닙니다. 말은 8, 9일 전에 민관효가 보령(保寧)으로 간다고 와서 빌리기에 신이 과연 빌려 주었는데, 은자는 지금 호군(?軍)하는 데 썼고 말을 빌린 것이 양성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신이 몰랐습니다. 신광원은 한 차례 민관효의 집에서 만났으나 대화한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윤연(尹?)을 문초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윤수(尹邃)를 문초하니, 윤수가 공초하기를,

 

"신이 별시(別試) 초시(初試)를 보기 위해 이유익(李有翼)과 동접(同接)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이유익을 길에서 만나 내려가 여염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들어오기에 물으니, 이하(李河)였습니다."

 

하였다. 한광(韓洸)·한유(韓游)·한순(韓洵)·최봉소(崔鳳韶)·이세록(李世祿)을 문초하였으나, 모두 불복하였다. 안호(安鎬)와 막실(莫實)은 석방하였다.

 

 

[註 168]창산군(昌山君) : 이름은 상(相).

[註 169]동계(桐溪) : 정온(鄭蘊)의 호.

[註 170]박평중(朴平仲) : 평중은 박필현의 자(字).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3일 계유 6번째기사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성탁 공술

 

성탁(成琢)을 문초하니, 성탁이 공술하기를,

 

"3월 13일 신이 중미(中彌) 주막에 이르니, 김옥성(金玉成)이 뒤아 이르러 주막 사람과 서로 말을 나누었습니다. 신이 옆에서 그 말을 들으니, 김옥성이 말하기를, ‘어제 아침 소사(素沙)·갈원(葛院) 사람들이 흩어져 달아났기에 나 역시 그곳에서 도망해 돌아온 것이다. 이는 바로 이곳 의병장(義兵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 ‘내 이름 역시 적의 성책(成冊) 가운데 들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김옥성에게 말하기를, ‘의병장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하니, 김옥성이 말하기를, ‘이곳의 20명이 변산(邊山)·지리산(智異山)의 적과 화응(和應)하여 이번 3월 16일에 한 사람마다 1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는데, 기일이 점차 임박하자 갈원과 소사 백성으로 적의 성책에 들어 있는 자들이 모두 스스로 놀라 흩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적장들 역시 모두 도주해 적소(賊所)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김옥성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는 바로 적병(賊兵)인데 의병(義兵)이라고 말하니 너무 무식하다.’ 하였더니, 김옥성이 말하기를, ‘적병이냐 의병이냐를 논할 것이 없이 일의 기미가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이어 스스로 적중의 사정을 분명하게 안다고 칭하기 때문에 신이 즉시 붙잡아 고발하고자 하였으나, 강하고 약함이 같지 못하고, 그곳이 적도들이 출몰하는 곳 같기 때문에 계책을 써서 유치(誘致)하여 청파(靑坡)에 이르러 붙잡아 고한 것입니다.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에 대한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며, 원래 지휘하거나 모의한 일이 없습니다."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7일 정축 3번째기사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정희량에 관한 글

처음에 국청(鞫廳) 여러 적의 초사에 모두 정희량(鄭希亮)이 괴수가 되었다고 하여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정희량을 잡기 위해 순흥(順興)에 도착하니, 부사(府使) 이성지(李聖至)가 도사를 도둑이라 하여 잡으려 하였다. 또 부내(府內) 사람으로 정희량이란 이름이 없다고 서로 한나절을 버티다가 비로소 포졸을 내어 체포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정희량은 이미 집에 없었고 그의 자질(子姪) 역시 도망하였다. 안무사(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순흥에 이르러 이성지를 엄히 책망하여 정희량의 어미와 처를 가두게 하고, 장계로 이성지를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성지가 두려워하여 정희량의 자질(子姪)로 도망한 자를 잡아 바쳤는데, 후에 조정에서 이성지를 나문(拿問)했으나 풀려났다. 정희량이란 자는 고(故) 명신(名臣) 정온(鄭蘊)의 후손이며 참봉(參奉) 정중원(鄭重元)의 아들로, 처음 이름은 준유(遵儒)이다. 정중원이 대대로 안음(安陰)에 살아 성명(盛名)이 있었고, 온 도(道)에서 그 호부(豪富)함이 알려졌으며, 장획(臧獲)211) 과 전택(田宅)이 매우 많았다. 정중원이 만년에 순흥(順興)으로 이사하여 막 죽었다. 정희량이 이인좌·박필현·한세홍(韓世弘)의 무리와 체결(締結)하여 영남에서 거사하여 서로 응하기로 약속하고는 거짓으로 조묘(祖墓)를 이장(移葬)한다고 일컬으면서 안음 옛집에다 전곡(錢穀)을 쌓아두고 가동(家?)과 민정(民丁)을 모집하고는 기병할 때에 미쳐서는 부석사(浮石寺) 뒤에다 장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승도(僧徒)들이 금지하려 하기 때문에 변(變)에 대응하기 위해 쌀과 돈을 주고 민정을 모았다고 핑계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정미년212) 가을 사이에 도하(都下)에 소문이 널리 퍼졌는데, 한 시골의 풍채 좋은 거사(居士)가 건장한 말을 타고 종복(從僕)과 자장(資裝)을 매우 성대하게 하고는 여사(閭舍)에 와서 그 주인으로 하여금 저자 백성을 불러서 각색 채단(綵緞)을 혼수(婚需)로 사겠다고 약속하고, 먼저 은(銀) 한 봉(封)을 내어 맡기고 수십필을 가지고 오게 하여 빛깔과 품질을 보고는 내일 아침 공평한 값으로 사들이겠다고 약속하니, 시장 사람들이 믿고서 물건을 두고 갔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가서 보니 그 사람이 그 채단을 모조리 가지고 새벽을 틈타 도망해 간 곳을 몰랐다. 그가 잔 곳을 수색해 보니 다만 한 궤짝에 돌멩이를 두터운 종이로 싸서 가짜 은으로 꾸민 것 몇 덩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때에 변산(邊山) 적의 풍설이 한창 무성해지므로, 도성 사람들은 혹 변산 적도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하였는데, 정희량이 난을 일으키기에 미쳐서 그 채단으로 만든 깃발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가 패하자 적당들의 공초에 이르기를, ‘정희량이 서울 저자의 채단을 훔쳐와서 이것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註 211]장획(臧獲) : 노비.

[註 212]정미년 : 1727년 영조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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