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1일, 도쿄 인근 사가미 만을 진원지로 한 진도 7.9의 대지진 발생
10만여명이 사망하고 피해자만 약340여만명이 집계
전소한 가옥만 39만채가 넘고 도쿄의 60%이상의 파괴를 안겨준 관동대지진

일제는 관동대지진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수도이전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1940년대에는 식민지의 크기도 점점 커짐에 다라 수도이전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일제는 당시 서울 경성제국대학 근처에 있던 흥아연구소를 통해
만주와 한반도, 일본을 포함한 “대동아 공영권”을 실현할 수 있는 수도이전을 본격적으로 조사 합니다.



비밀리에 추친되었던 계획이 당시 새로운 수도로 꼽혔던 후보지는 모두 3곳이었습니다.
후보지는 일본 내 오카야마와 후쿠오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도시는 식민지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비교적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으나 섬으로 이뤄진 일본본토에 있어서 대륙으로의 확장에 걸림돌이 된다하여 폐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당시 경성이라 불렸던 서울의 남쪽지역이었는데요.
현재의 위치로 보면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계곡 일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실제 그들은 이 지역으로 가서 지역 측량까지 마쳤으며 설계도면까지 작성한 것이 드러났으며 일제는 이 일대에 일왕이 사는 왕궁과 일본 내 청사와 관공서의 대거 이전까지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본토를 포함하여 조선과 만주, 대만에는 지역별 산업지구를 지정하는 방안도 담겨 있었습니다.

반도에는 총 23곳의 지역에 건설하려 했습니다. 또한 부산과 신의주, 서울과 두만강과 접해있는 중국 투먼을 포함하여 대전과 현재 경남 사천시 남쪽지역인 삼천포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했으며 이어서 경부선과 경의선의 철도를 복선화 하고 부산과 일본의 해저터널 건설과 기차 수송방안을 내놓기도 했었습니다. 일제가 계획한 수도이전은 이러한 계획뿐만 아니라 또다른 끔찍한 사실도 담겨져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조선인 200만명을 만주로 강제이주시키고 일본농민 800만명을 그 자리에 다시 채운다는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야심찬 계획은 1945년 미국이 일본에게 선물한 원자폭탄 2방에 의해 모두 폐기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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