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떤 비밀
'선생님'이란 존재에 대해서 가장 강하게 증오심을 품었던 시기가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고 생각된다. 그때 난 1학기 동안 반장을 했었고, 그야말로 '무능하고' '공부 안하는' 반장으로 선생님께 낙인 찍혔었다. 담임 선생님에 대해서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게 된 이유는 내가 반장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혼난 때문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계기가 된 것은 내 짝의 죽음이었다.
당시 정수라는 내 짝은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 혼자서 두 형제를 키우는 가족의 막내아이였다. 그의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번 오후에 그의 집 앞에서 어느 아저씨의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일을 하러(?) -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일하러 가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 분이 일을 하러 가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정수가 자기 어머니가 그때 쯤 으레 일 나가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 나가시는 것을 본 적은 있다. 아마 일용 노동자쯤 된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정수는 집 안에서는 제대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의 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수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한 번은 내 백과사전을 가지고 함께 숙제를 할 때, 내가 그에게 글도 잘 못읽으면서 어떻게 숙제를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정수는 천연덕스럽게도 '보고 그리면 된다'고 대답했었다.
우리 반에서 꼴찌는 걔가 맡아서 했음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의 학습향상을 위해서 6명씩 조별로 앉혔었는데 1번부터 6번까지 매 조마다 아이들에게 번호를 주었다. 물론 1번이 가장 공부를 잘한다는 아이이고 6번이 그 조에서 가장 못하는 아이였다. 그러니까 전혀 우리 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어떤 아이가 자기 조에서 몇번인지만 알면 그 아이의 학력수준을 대강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짝으로 앉혔다. 그러니까 1-6, 2-5, 3-4, 이런 식이었다. 이런 방법은 그때 우리 담임 선생님만 사용했던 방법이 아니라 종종 선생님들 사이에 쓰여졌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5학년 때에도 그런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성적이 떨어지거나 어느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 아이와 함께 그 짝도 같이 손바닥을 맞았었다. 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의 의도는 학력이 좋은 학생과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을 함께 앉혀서 서로 공부를 도와주면서성적을 향상시키려 했던 것 같은데, 그다지 실효성은 없었다. 하여간 우리 조에서는 내가 1번이었고 정수가 6번이었다. 정수를 우리 조에 들어오게 한 것은 반장이 있는 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덕에 정수와 나는 짝이 되었다. 그런데 정수를 사실 괴롭혔던 것은 글을 모르고 공부를 못한다는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나 그 가족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머니도 일해서 먹고 살기 바빴고, 형이란 사람도 그리 학력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글은 읽을 줄 알았던 것 같다. 그 가족은 정수가 글을 모르거나 학교에서 꼴찌를 하거나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학교나 성실하게 다니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건 정수가 성적때문에 혼나는 일은 없다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난 그게 참 부러웠었다.
하여간 공부보다 더 정수를 괴롭게 했던 것은 심장병이였다. 심장병, 그래서 정수는 체육시간에도 그리 과하게 하지 않았다. -중략- 체육선생님은 정수의 사정을 아시고 체육시간에 열외를 인정해주셨다. 그 열외란 것은 체육수업 뿐 아니라 관심에서도 - 선생님이나 우리들이나 - 역시 열외였었다. 난 그가 체육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이 나는 것은 함께 야구시합을 했었을 때뿐이다.
정수가 죽은 것은 여름방학을 하기 전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애가 죽고 난 다음날 반 '대책회의'에서 - 그 회의의 사회는 내가 보지 않았었다. 선생님과 가깝게 지내는 아이가 진행을 했었다. - 내가 전에 보았던 만화책을 흉내내어 정수를 위한 시를 써서 회의를 진행하는 아이가 읽어주었었고, 담임 선생님이 날더러 정수 어머니께 선생님과 아이들 몇이 찾아간다고 연락을 드리라고 하였는데, 그 때 나는 선생님이 나를 시킨 건 내가 시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반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 날은 정수를 잃은 슬픔보다도 선생님에 대한 증오가 강하게 심겨진 날이었다. 문제는 그 날 아침부터였다. 나는 전에 정수에게 빌린 샤프심을 계속 갚지 못해서 그 날 그것을 갚을 양으로 샤프심 한 통을 사가지고 교실에 들어갔었다. 정수는 오지 않았었고 아이들을 통해서 '이상한' 이야기가 간간이 교실 안에 퍼지고 있었다. 곧 선생님은 오셨고 오면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은 앞의 몇 아이들에게 정수의 소식에 관해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침울하거나 심각한 것이 아니라(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이 매우 힘들다. 그 당시의 정감이 미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고 또는 오히려 더 과장될 수도 있어서) 그냥 '지나쳐 가시면서'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앞쪽에 앉았던 여자 아이와 새로 하신 머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는 거울을 보시며 머리를 만지시는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그 날 선생님은 머리스타일이 바뀌셨었다.) 그 모습이 유난히 내 머리 속에 남아있고, 또 그것이 너무도 원망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내 자리가 바로 선생님 책상의 앞이었기 때문이다. 그 얘기는 '새로 생겨난 빈 자리'도 역시 거기에 같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선생님은 그 빈 자리가 한 번도 보이시지 않으셨을까. 선생님이 정수의 자리를 보셨는지 안 보셨는지, 슬픔을 느끼셨는지 안 느끼셨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정수의 자리를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죽음'이란 것을 멀리서만 경험해서 잘 알지 못하는 한 아이가 그 때 선생님에게 느꼈던 것은, 친구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는 그것을 너무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은 한 어른의 태도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리고 철없는 원망은 당연스레 '편애'라는 것으로 이어졌고. 상희나 명림이(얘네들이 주로 선생님께 칭찬을 듣고 가깝던 아이들이었다.)가 죽었어도 저렇게 하실까라는 그야말로 '어린' 생각을 했었었다. 그 날 오후 선생님과 우리는 정수의 집을 방문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몇명만 가라고 하셨는데, 나는 내가 잘 어울리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갔었다. 물론 선생님 가시는 저 뒷쪽에 몰려서 갔지만.
정수네 집에 가자마자 나는 마구 울었었다. 왜 그렇게 울음이 쏟아져 나왔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울음이 복받쳐 오르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아직도 그런 경험은 다시 해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서 바보같이 울었다고 선생님께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었다. 정수는 그 전날 동네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죽었다고 한다. 막 뛰어가다가 차가 빨리 달리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은 언덕에 걸려서 넘어졌는데, 그 후 입에 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아마 심장에 충격이 왔었던 것 같다. 그 어머니도 일하시다가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가셨는데 그 후 새벽즈음에 정수가 죽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정수가 뛰어 놀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그 전에 정수에게 관심이나 더 쏟아주시지. 선생님이 가신 뒤에는 함께 온 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고, 우리는 주인 없는 음식상을 앞에 놓고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정수 어머니가 오열하셨고, 우리도 다 울었다. 뭐가 슬픈지도 몰랐다. 그냥 막 울었다. 옆에서 우니까 따라 울고, 뭐, 그냥 그렇게 계속 울었다. 정수네 집을 나와서는 서로 웃으면서 헤어졌던가, 그건 기억이 안난다. 정수가 죽기 전에 내 백과사전을 숙제한다고 빌려간 것이 있었는데, 정수는 그걸 돌려주지도 않고 먼저 갔다. 정수네 집에 가서 그 책을 돌려받아와야 하는데 그게 매우 힘들었던 것 같다. 정수 어머니께 '정수'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너무 죄송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한 3주 정도 지난 후에 친한 친구 하나랑 같이 가서 겨우겨우 말씀드리고 책을 돌려 받았다. 책을 돌려 받고는 금새 그 집을 뛰쳐 나왔었다. 왠지 모르게 있어서는 안될 곳 같았었나보다.
정수가 죽은 다음 날에 우리 반 대책회의에서 내가 썼던 시는 여름방학 일기에 다시 삽입을 했었다. 밀린 일기숙제도 채우고, 또 선생님이 보시고 양심에 가책 좀 받으라는 의미였다.
🌫일천구백구십오년 이월 오일 밤 아홉시 사십칠분 사초 지나면서....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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