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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12/26) 게시물이에요







 긴 밤을 앓는다 | 인스티즈


양현주, 나무를 읽다

 

 

 

내가 나뭇잎이었다면

한 계절 나무를 떠날 수 있었을 텐데요

봄이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초록 눈물 뚝 뚝 흘리며

당신 발등상에 무릎을 꿇더라도

지금 떠날 수 있었을 텐데요

 

나는

당신이에요

단단한 박달나무 주위를 빙빙 돌다가

짐승처럼 울고

숲에 갇혀 나무가 된 나는

당신 속안에

늘어나는 줄을 긋던 하얀 나이테

 

날마다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당신을 읽어요

당신을 떠날 수 없었던 나는

해마다 동그랗게 당신 가슴 안쪽을 읽어요







 긴 밤을 앓는다 | 인스티즈


최광임, 불멸의 사랑

 

 

 

화분 위에 숯덩이 하나씩 올려놓고

숯을 피해 화분에 물을 주곤 하였는데

깊은 밤, 톡 톡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마디 하나하나 추스려 뼈를 세우는 것일까

침대 옆 벤저민 화분 위

스멀스멀 기어오른 수분만으로도 금세

제 몸에 물길을 내고

생의 뿌리 움켜쥐고 한때 푸르렀던 나무

푸석한 몸뚱이 흔들어 깨워 뼈와 살을 채우며

장작 타는 소리 내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뼈마디 곧추세워

아득히 되살아나는 불

여한 없이 태우고도 한 토막 숯으로 앉아

나머지 소신공양을 준비하는 것인가

죽어서도 죽지 않은 삶의 화분이 되는 날이면

긴 밤을 앓는다, 벤저민 잎들 무성하다







 긴 밤을 앓는다 | 인스티즈


오규원,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긴 밤을 앓는다 | 인스티즈


정호승, 눈발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날은 흐리고 우리들 인생은 음산하다

북풍은 어둠속에서만 불어오고

새벽이 오기전에 낙엽은 떨어진다

언제나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가는자여

다시 날은 흐르고

낙엽은 떨어지고

사람마다 가슴은 무덤이 되어

희망에는 혁명이

절망에는 눈물이 필요한 것인가

오늘도 이땅에 엎드려 거리낌이 없기를

다시 날은 흐리고 약속도 없이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긴 밤을 앓는다 | 인스티즈


권선환, 이연(異緣)

 

 

 

강 건너 맞은편

한결같은 수평인데

쉬이 건너지 못하는 안타까움

갈꽃 흩날리는 둔치에서 나뒹구네

 

강물은 무던히도 흘러

언 계절도 가벼운 듯 밀어내며

바다와 간간한 밀어를 나누는데

밤마다 외로움 안고

강을 가로지르려 뛰어든 별은

내내 한 자리 파르르 떨기만 하네

 

닿을 듯 다가 설 수 없는

아득한 그리움

평행한 강폭 따라

시린 겨울서리로 굳어가고

 

마주한 침묵만

강 복판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지쳐 돌아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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