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판관(慶州判官) 박의장(朴毅長)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파잠(巴岑)에서 왜적 2천여 명과 마주쳤는데 진격하여 격파하였다. 15리를 추격하여 31명의 수급과 말 1백 23필을 빼앗았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1593년 4월 15일 기사로, 지금의 경상북도 대구시 수성구 파동에서 조선군 300명과 일본군 2,000명이 조우하여 교전한 기록입니다. 300명에 불과한 조선군이 2,0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어떻게 격파했는지는 사실 기록이 단편적이라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이 1593년으로 넘어가면서 특유의 유격전과 매복전을 통해 일본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비슷한 전술로 절대 다수인 일본군을 보기 좋게 격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목할 것은 말을 무려 123필이나 노획했다는 점인데, 이들이 일본군의 기병대를 상대했는지 혹은 단순한 물자 수송부대를 상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엇이 되었든 이들의 전과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판관 박의장의 전공을 눈여겨보았고, 이후 종5품 판관직에서 파격적으로 정3품 당상관으로, 무려 6계단이나 승진시켰고 이후에도 전과를 세우면 더 진급을 시키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사실 박의장이 지휘하던 부대는 상당히 정예부대였던 모양입니다. 6월 6일 기록에도 보면
-경주 박의장(朴毅長)은 정용(精勇)한 관병 이경룡(李慶龍) 등 1백 명을 선발하여 먼저 양산군 사화령(沙化嶺)에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군 2백여 명을 만나자 붕정(棚丁)·포수(砲手)들로 하여금 길 양쪽에서 활과 총을 난사하게 하여 수급 53과를 참획하였고-
라는 기록이 있는데, 2배에 달하는 적을 만나서 기습 작전으로 적의 1/4을 사살하여 참수했다는 전과입니다. 휘하 부대 자체가 워낙에 잘 싸우던 정예부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6대 1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려 6km나 쫓아가며 123필의 말을 노획한 것은 대단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보통 사상자와 전사자 비율이 3대1 정도로 나오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군의 실제 피해는 상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참고로 나중에 저 박의장이라는 사람은 경상좌병사까지 진급했다고 하는데 실록 내내 지상전에서 괄목할 만한 전과를 가져왔던 것을 보면 상당히 노련한 지휘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P.S. 판관에서 당상관 진급이 어느 정도냐면, 현대 기준으로 소령급에서 소장급으로 진급한, 그야말로 매우 파격적인 승진입니다. 그만큼 큰 전공을 세웠다고 조정에서 인정한 셈인 것이죠.
조선왕조실록 선조 1593년 4월, 6월 기록
300명으로 2,000명의 일본군을 격파한 경상도의 조선군|작성자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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