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 서랍의 형식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까지 열었다서랍 속의 서랍 속의 서랍 속까지 닫았다똑같지 않았다다시 차례차례 열었다다시 차례차례 닫았다세계의 구석구석을 끌어모은 검은 아침이 서서히 밝아왔다누군가, 누군가 또 사라지는 속도로이동순, 아버님의 일기장 아버님 돌아가신 후남기신 일기장 한 권을 들고 왔다모년 모일 ‘終日 本家’‘종일 본가’가하루 온종일 집에 계셨다는 이야기다전체의 팔 할이 훨씬 넘는 일기장을 뒤적이며해 저문 저녁침침한 눈으로 돋보기를 끼시고그날도 어제처럼‘종일 본가’ 쓰셨을아버님의 고독한 노년을 생각한다나는 오늘일부러 ‘종일 본가’를 해 보며일기장의 빈칸에 이런 글귀를 채워 넣던아버님의 그 말할 수 없이 적적하던 심정을혼자 곰곰이 헤아려 보는 것이다서정춘, 동행 물돌물돌물돌물이 흘러갑니다 함께 가자함께 가자 어린 물이 어르며어린 돌을 데리고 흘러갑니다 모래무덤 끝으로그리움으로권정우, 빚지지 않고 살려는 이에게 다람쥐는 참나무에게빚진 것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빚지지 않으려 도토리를식단에서 빼지도 않는다빚을 도토리로 갚지도 않는다참나무에게 갚는 것도 아니다 적당한 빚은 사는 이유가 된다갚을수록 느는 빚자식이란 이름의 사랑스런 빚처럼 이 나무 저 나무에 빚지고도 잘 산다 빚지지 않고 살려는 것만큼큰 빚을 지는 일이 없다는 걸알고 있는 것 같다김윤현, 어리연 수면보다 높지 않으려수면에 누워 보네제 스스로 약속한 평형의 삶떠내려갈까 봐수중 깊이 내려가진흙을 꽉 물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