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6월 19일,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때였는데 당시 조선은 명군이 계속해서 자국 내에 주둔하여 일본의 재침에 대비한 전력을 남겨주기를 바라고 있었고 이에 반면 명군은 이러한 조선의 요구를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1599년 10월, 경리 만세덕이 조선 주둔 명군에 대한 안을 조선에 제시했으며, 지상군은 모두 빼는 대신 수군 8,000명을 조선에 남겨두도록 하는 것이었고 군량은 모두 조선 측이 부담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국왕인 선조는 대신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으나 전쟁이 막 끝난 조선의 재정 상태로는 3,000명의 병력도 유지하기 힘들 지경이라고 보고했으며 명에게 이러한 사정을 설명했으나 명 역시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해 전쟁 기간 동안 공여해준 것처럼 더 이상은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답신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00년 6월 19일, 부산진을 비롯하여 경상도 남해안 일대의 조선 수군 및 명 수군 진영을 강타한 태풍은 무척이나 궤멸적이었습니다. 거의 와해된 지상군보다는 그런대로 전력을 갖추고 있던 조선의 함대가 이 태풍 한 방으로 절반 이상의 전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 태풍으로 인하여 입은 인명 피해는 조선군과 명군을 합하여 2~300여 명이나 되었고 조선 수군의 함선 85척 중 절반 이상이 침몰하거나 크게 파손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부서진 배 조각이 해안 몇십 리에 가득하고 물에 익사한 수군 병사들의 시신이 해안에 가득 밀려왔다는 장계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죠. 무엇보다도 함선에서 쓸 화약과 탑재 장비들을 대부분 유실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명군 지휘관은 선조에게 보고하면서, 부산진에 보관하던 화약이 모두 물에 쓸려가거나 젖어서 사용이 불가능하고, 화포류 역시 유실된 것이 너무 많아 조사하기조차 어려우며 갑주와 무기 역시 죄다 쓸려나갔다고 보고할 지경이었습니다.
심지어 부산진의 명군 수군 지상기지에 수심이 무려 1장, 즉 현대식 수치로 약 3m 가량이나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보통 심각한 태풍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조선군 역시 함대의 절반을 상실하며 장비류를 심각할 정도로 잃어버리면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명의 함대가 태풍으로 인하여 심각한 손실을 입으면서 더 이상 조선에 명군을 잔류시킬 방법은 없었고, 결국 명군은 완전히 조선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조선군 역시 전체 함대의 절반을 잃어버렸으니 상당하게 고생을 하게 되죠.
그나마 여러 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함선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곧바로 파손된 함선들에 대한 재생 및 폐기 처분도 이루어지면서 1604년에 들어서서 다시 전력을 회복합니다.
다만 칠천량 해전 이후로 조선 수군이 가장 궤멸적인 타격을 준 것은 바로 1600년에 들이닥친 태풍이었으며 전체 전력의 50%를, 명군 함대에도 비슷한 피해량을 안겨줬던 것을 상기하면 전근대 시대의 태풍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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