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36년간의 일제 통치기간 동안 조국 해방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내놓았다
특히 1910년대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박상진 의사는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상진 의사는 대한제국 최초의 판사였지만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하자 판사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5년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국내무장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910년대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가장 엄혹했던 시기여서 국내에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한 것 자체가 크게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다 대한광복회는 1917년 경상북도 최고 친일파인 장승원을 처단했는데 이로인해 일제에 체포를 당했고 1921년 대구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여담이지만 박상진 의사는 광복회의 부사령관으로 김좌진을 임명했고, 그 덕에 만주에서 청산리 대첩과 같은 승리를 일궈낼 수 있었다
이후 박상진 의사의 자손들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낙인찍혀 힘들게 살아야 했다 광복 이후에는 정부에서 아무런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대부분의 자손들이 중졸과 초졸을 면치 못하며 극빈층으로 살아나가야만 했다 원래 박상진 의사의 부인은 경주 최씨 집안이어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사촌인 최준(영남대를 건설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줬다는 그 최준 맞음)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는 비극을 겪기도했다

한편 박상진 의사에게 처단당한 장승원은 세명의 아들을 뒀는데 그 중 한명이 우리가 야인시대로 많이 알고 있는 장택상이다 장택상은 해방 후 국내로 들어와 수도경찰청장과 외무부장관이 되며 승승장구했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에게 죽은 것에 대한 복수로 대표적 친일경찰인 노덕술을 시켜 김원봉을 체포했고, 여운형의 죽음에도 상당히 관여했다
더욱 황당한건 해방 후 건국훈장 수립에서 박상진 의사는 가장 낮은 3등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훈장 심사를 친일파와 장택상과 같은 친일 후손들의 영향력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이후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2등급),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1등급)가 받은 서훈 등급을 생각하면 해방 후 역사야 말로 우리가 지닌 가장 오래 된 적폐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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