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중해의 여왕"
은 과거 베네치아의 이름을 수식하던 영예로운 별칭이었다. 원래 베네치아는 말라리아 모기가 들끓는 작은 석호섬 위에 세워진 작은 도시 국가였다. 그러나 이 나라는 수익성 높은 지중해 무역에서 우위를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 중 하나로서 군림했다.
13세기 베네치아인은 유럽 경제를 쥐락펴락한 상인들이자, 대륙의 반대편을 탐험한 모험가들이자, 제국을 정복한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베네치아에는 과거 이들이 이룩한 영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때 유럽의 중심이었던 베네치아가 왜 지금은 변방의 작은 도시가 되었을까?

사회: 폐쇄와 안정
1286년 10월 3일, 베네치아의 대평의회에서는 40인회가 제출한 의회 개혁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었다. 40인회가 대평의회 의원 후보를 승인할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40인회는 베네치아 사회의 엘리트 요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기관이었기에, 이 안건의 통과는 사실상 엘리트 계층의 대평의회 장악을 의미했다. 이 안건은 대평의회 의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부결되었다.
이틀 뒤인 10월 5일, 40인회는 수정 법안을 제시했다. 이는 아버지 혹은 조부가 대평의회 의원을 지낸 바 있는 자들에게 자동으로 의원 자격이 주어지고, 그렇지 못한 자들만 도제 위원회가 의원 자격을 승인토록 하는 것을 골자로 했는데, 이 법안은 대평의회에 의해 가결되었다. 12일 뒤에 이 법률은 40인회의 주도 하에 수정되었는데, 이때부터 베네치아에서 아버지 및 조부가 대평의회 의원이 아니었던 자가 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도제, 도제 평의회, 그리고 40인회의 승인을 모두 받아야 했다. 베네치아가 공식적으로 세습 귀족 사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베네치아는 석호의 수면 위에 떠 있는 작은 섬들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도시이다. 본래 이 섬은 아무도 살지 않는 버림받은 땅이었다. 그러나 5세기에 대륙의 전란을 피하기 위해 난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정착하기 시작하여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농업을 경영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땅에는 봉건 지주가 없었고(초창기 원로 귀족 가문이 있기는 했지만 극소수였다.) 따라서 초기에는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회가 통치 기구가 되었다. 공동체가 성장함에 따라 많은 시민들을 결속할 통치 역량이 요구되었고, 이에 민회에 의해 공화국의 국가 원수인 도제(Doge)가 선출되기 시작했다. 초창기 도제들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각국 군주들과 깊은 연줄을 가진 강력한 가문에 의한 도제직 세습이 이루어지자 이에 대한 반발로 1032년에 도제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국가 원수의 권력은 공식적으로 견제받기 시작했다.
1082년 베네치아는 금인칙서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광범위한 상업상의 특혜를 인정받았고, 이로 인해 무역량이 대폭 늘면서 공화국의 경제는 급성장했다. 1171년에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들의 정치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평의회가 창설되었다. 대평의회 의원의 임기는 1년이었고, 매년마다 제비뽑기를 통해 기존 의원들 중 4명의 의원 지명 위원을 선출하였고, 이들 4명에 의해 새로운 의원 100명이 선출되었다. 물론 지명 위원에 의해 지명된 후보들은 무조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평의회는 원로원과 40인회, 그리고 도제 지명 위원회의 구성원을 선출할 권한까지 가졌기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적 요체나 다름없었다. 실질적으로 대평의회는 부를 축적한 상업 귀족과 전문 지식을 갖춘 법조인 등의 중산 계급이 장악했지만, 서민들도 수익성 높은 무역에 종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들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15년 베네치아 정부는 공화국의 공식 귀족 명부인 "황금의 책(Libro d'Oro)"을 편찬하여 13세기까지 사회 주도권을 쥐지 못한 자들의 추가적인 지배 계급 대열에의 진입을 차단했다.
물론 귀족이 되지 못한 다른 유력자들도 대평의회의 이러한 '합법적 체제 전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사회 불만이 증대되고 쿠데타 모의 사건이 일어나자 대평의회는 의원 정족수를 기존의 480명에서 1500여명으로 늘려 다른 유력 계급들과의 타협을 시도했고, 이는 성공을 거두었다. 1323년부터 대평의회 의원직은 종신직이 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 후인 1423년에 (명목적으로)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가장 오래된 정치 기구인 민회가 폐지되었고, 신임 도제의 선출 선서문에서 '시민 여러분들이 원하신다면' 이라는 문구가 삭제되었는데, 이는 그 후 100여년간 베네치아에서 세습 귀족 계층의 정치 및 사회 장악이 보다 더 확고해졌음을 의미했다.
정치 권력의 장악에 성공한 베네치아 평의회의 의원들은 뒤이어 경제 권력도 장악하기 위해 콤멘다(Commenda) 금지 법안을 가결시켰다. 콤멘다란 초기 형태의 합자 제도로 대체로 부유한 정주 상인과 상대적으로 자산이 적은 모험 상인(Merchant-Adventurer)이 계약의 형태로 파트너쉽/회사(Compagna)를 설립해, 이의 자본 투자 비율 및 수익 배분 비율을 합의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업 이익을 정산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콤멘다는 상대적으로 자본이 적은 신규 상인들이 효과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제도였고, 중세 베네치아의 문건들은 실제로 콤멘다를 통해 많은 신규 상인들이 부유한 상인으로 성장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험 상인의 성공담은 14세기 베네치아에서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베네치아 사회의 권력 집중화 현상은 비단 귀족과 서민 사이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1310년 쿠데타 기도 사건을 계기로 베네치아 평의회는 공공질서를 강화하고자 최초로 경찰 제도를 도입하였고, 사회 혼란의 효과적인 수습을 도모하기 위한 임시 기구로 10인회(Council of Ten)를 설치했다. 10인회는 과거 공화국의 귀족 사회화를 주도했던 40인회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당초 이 기구는 설립 2개월 3주 후에 자동 해산하기로 설정되었으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자들이 모인 이 집단은 구성원들의 권력만큼이나 강력한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10인회는 존속 기한이 갱신되어 갔고 결국 상설 기관화되었다. 이는 기존의 40인회가 수행했던 기능을 사실상 이어받았는데, 달라진 점은 기존의 40인에서 10인으로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점 정도 뿐이었다.
10인회는 긴급 사태시에 법령을 초월할 수 있는 즉결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긴급 사태'의 기준이 모호했을 뿐더러, 14~16세기 베네치아는 자주 전쟁에 휘말렸기 때문에 이는 막강한 의결 기관으로서 존재해 나갔다. 물론 10인회가 고삐 풀린 황소처럼 날뛴 것은 결코 아니었다. 10인회는 자가 폭주를 예방하기 위해 스스로 견제 장치를 마련했는데, 일례로 한 가문에서 동시에 복수의 10인회 의원을 배출하기 못하게 했으며 또한 10인회의 의장직을 한 사람이 맡는 것이 아니라 3인이 맡는 삼두 체제를 확립하여 기관 내의 권력을 분산시켰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강해지는 10인회의 정치 권력은 대평의회의 (상대적으로 권력이 약한) 귀족들의 불안을 샀고, 이는 1457년 10인회의 초법령적인 도제 강제 폐위 사건 때 최초로 가시화되었다. 1468년에 대평의회는 10인회의 권한 발동 조건을 "극도로 긴급한 사태 하(cose segretissime)"로 제한했지만, 그 기준이 불명확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후에도 10인회를 제약하려는 움직임은 여러 차례 일어났지만 이렇다 할 소득을 건지지 못했다.
역동적인 사회에서의 지배 집단은 호수에 고였던 물이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가고 새로 유입된 물이 이를 대체하듯 지속적으로 바뀌어 나간다. 하지만 호수와 연결된 수로를 댐을 건설해 막는다면 호수에 고인 물은 항상성을 가지게 되고 이로부터 안정이 담보된다. 간혹 바람이 불어 잔물결(지배 계층 내에서의 파벌 교체 등)이 일 수는 있지만, 사회의 큰 틀은 이렇다 할 변동 없이 유지된다. 연이은 쿠데타 시도에 따른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일련의 '귀족 사회화' 조치를 통해 사회에 잠재된 권력 쟁탈전 발생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키고 정치 안정을 이루어 훗날 마키아벨리 같은 자들로부터 찬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시대의 베네치아에서는 더 이상 제2의 마르코 폴로가 등장하지 않았다.

경제: 강력한 국가
베네치아 경제는 해양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농토로 쓸만한 땅이 거진 없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석호에 이주한 주민들은 어업과 제염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숙련된 뱃사람들이 무역업에도 뛰어들어 대성공을 거두었기에 베네치아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작은 공동체에서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석호 도시의 경제 성장을 주도한 집단은 두말할 필요없이 상인들이었다. 이들이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각종 위험이 도사리는 바다에 도전하였고 이들의 활동이 무역로의 설립과 상업 노하우의 발달로 귀결된 것이었다.
전통적인 베네치아의 주력 무역 루트는 베네치아와 동지중해의 여러 항구들을 잇는 선이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의 이탈리아 공화국들은 이 동지중해 무역로를 통해 동방의 사치품들을 자국의 수도에 집적하였고, 이들 상품은 육로를 따라 알프스 너머에 있는 샹파뉴 정기시에 운반되어, 그곳에서 다시 저지대나 브리튼, 라인란트 지방에 재수출되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에 제노바의 항해사 형제가 지중해와 북해를 직접 잇는 항해로를 개척함에 따라 유럽의 무역 판도는 크게 바뀌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베네치아 상인들도 신규 무역에 뛰어들었고, 새로운 무역로가 번영함에 따라 기존의 샹파뉴를 축으로 하는 육상 무역로는 쇠퇴하고 북해 무역도 해상 무역이 주된 형태로 바뀌었다.
무역 질서가 재편되자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나라에는 문제가 발생했다. 과거에는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업자들이 베네치아나 제노바에 거의 필수적으로 기항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무역으로부터의 관세 수취가 원활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중해와 북해를 잇는 직항로가 개설됨에 따라 더 이상 무역선들이 이들 항구에 '필수적으로' 기항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일례로 모로코 북부에서 백반(직물업에 필요한 염료)과 설탕을 수입해서 잉글랜드에 수출하는 무역업자의 경우 해당 무역로를 한번 왕복한 후 다른 교역품을 싣고 제노바에 기항할 수도 있었지만, 해외의 상관에 머물면서 그 무역로만 여러 번 왕복해도 사업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는 종래의 무역 체계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관세 수입을 창출하지 못함을 의미했고, 실제로 14세기부터 제노바에서는 거상을 포함한 해양 세력들은 잘 나가지만 본국의 정부는 쪼들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베네치아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다. 바로 무역의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1314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정부 소유 선박들을 수익성 높은 동지중해 무역에 투입함으로서 국가 통제 무역의 첫 발을 뗐다. 1324년부터는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에게 높은 세금이 부과되었고, 이 정책에 의해 무역업의 국가 통제 수준은 점점 높아졌다. 1347-1348년에 흑사병과 대지진이라는 양대 재앙이 겹치자, 1349년 베네치아 평의회는 긴급 사태 대응이라는 명목으로 상인들의 동지중해를 포함한 원양에서의 무역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로서 베네치아의 무역업은 완전히 정부의 손아귀 하에 들어갔다.
국가 주도의 베네치아 무역은 정부가 수출 품목 및 수량, 납기일 등 무역의 제반 조건을 모두 결정했고, 정부 소유의 갤리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공공 무역 함대는 무역을 수행한 후 베네치아 항구에 기항해야 했다. 정부는 이 무역선을 1회 이용할 권리를 경매에 부쳤는데, 이는 최고 입찰가를 제시하는 자가 권리를 낙찰 받는 시스템이었기에 기존에 부를 축적한 귀족 계층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덕분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성공적으로 무역을 정부 소유로 귀속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근육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국력에 자신감이 생긴 베네치아는 막대한 재정에 기반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본토의 영토들을 차례로 귀속시킴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유일하게 대륙의 통일 왕조들과 경쟁할 수 있는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풍족한 국고를 가진 베네치아 의회는 이 도시를 비단 외적만이 아닌 내적으로도 위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유럽에서 최초로 국가에 의한 공공 의료 제도를 확립한 나라로, 1335년 베네치아 의회가 공공 병원을 설립했는데, 이 병원에는 해부학에 정통한 12명의 상주 의사들이 배치되었고 모든 베네치아 시민들은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1368년에는 국립 의학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이탈리아의 수석 의사들을 포섭하여 그 명성을 떨쳤다.
베네치아는 법률학 분야에서도 그들의 우수성을 과시했는데,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이 베네치아인 법관을 스카우트해 가는 일이 워낙 많아서 1306년 베네치아 원로원은 베네치아 법관들이 그들의 동의 없이 외국의 공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까지 했다. 베네치아의 법관들은 귀족과 평민, 부자와 빈민, 베네치아인과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한 판결과 처분을 내리기로 유명했고 이는 유럽인들에게 있어 베네치아를 정의로운 국가로 보이게 했다.
의회는 도시의 미관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13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베네치아는 건축물의 대다수가 밋밋한 '수수하기 짝이 없는' 도시였다. 그러나 재정의 여유가 생긴 베네치아 의회는 정부의 후원 하에 다수의 랜드마크들을 건설하고 정원을 조성하여 베네치아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탈바꿈시켰다.
1400년경에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번영과 진보의 상징이자 모든 유럽인들의 경외와 찬탄, 그리고 시기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막대한 부를 효과적으로 활용함에 따라 대륙에서 정점에 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뒷받침해 주는 부가 사라진다면 공화국이 이룩한 진보와 번영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위험 또한 도사리고 있었는데, 이미 15세기 초에 베네치아 경제 모델의 허점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시스템: 방대함과 정교함의 극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해양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선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보다 더 효율적인 선박 건조 기술 및 시스템을 가진 세력이 해양에서 우위를 점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당연한 논리일 것이다.
이러한 사고 하에 1104년 베네치아에서는 국가 주도로 조선소가 건립되었는데, 이 조선소가 바로 베네치아 아르세날레(Arsenale di Venezia)이다. 아르세날레는 14세기에 원래 규모의 4배로 확장되었고, 16세기에 현재 규모에 이르렀다.
전성기에 베네치아 성인 남성 인구의 1/3에 이르는 16,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이는 전근대 시대에서는 최대의 단일 산업체였다. 아르세날레에서는 선박뿐만이 아니라 돛, 로프 등 기본적인 선박 장비와 대포와 포탄, 석궁 등의 전투 장비는 물론, 수통과 빵과 같은 해양 활동에 필요한 부수적인 물자까지 모두 생산하는 하나의 거대한 산업 단지였다.
아르세날레에서는 고도의 분업화된 생산이 애덤 스미스가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강조하기 600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아르세날레는 석호 동부 지구에 건설한 운하의 양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도크에 건조 중인 선박에 작업 인부들이 찾아가 작업을 하는 전세계의 여타 조선소들과는 달리, 배가 운하를 따라 이동하면서 공정 순서에 따라 운하의 각 구획에 배치된 작업팀들의 활동에 의해 선박이 완성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러한 생산 방식은 20세기 초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 발명 이전에는 베네치아 아르세날레 이외의 그 어떤 집단도 시도하지 못한 시스템이었다.
베네치아를 방문한 프랑스 왕 앙리 3세가 아침에는 용골(배의 뼈대)만이 앙상했던 배가 저녁에는 완성되어 있었던 것을 보고 감탄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해서 경제사 서적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에피소드이다. 왜냐하면 유럽의 다른 조선소에서는 같은 작업을 하는 데 1~2개월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아르세날레의 초창기 건립 목적은 해군력 증강이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해양 무역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각종 위험이 도사리는 바다와 해외 영토에서 자국 상인들의 안정적인 항해와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에 비례하는 막강한 해군력이 필수불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베네치아 아르세날레는 자연스럽게 갤리선을 건조하는 조선단지가 되었다. 유럽에서는 고대 시대부터 군용선으로는 갤리선, 상선으로는 범선이 주로 쓰였는데 그 이유는 갤리선은 많은 전투원을 수용할 수 있었고, 기동력이 좋으며 아직 대포가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적선에 효과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충각 전술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상인들은 범선, 당시로서는 원형선(Round Ship)을 선호했는데, 비록 속도는 갤리선에 비해 느리지만 풍력을 주 추진 동력으로 하는 범선 특성상 갤리선에 비해 훨씬 적은 인원으로도 항해가 가능했고, 따라서 운용비가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서 범선의 건조는 민간 조선업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3세기 북해 항로의 개척은 갤리선이 상업용 선박으로도 각광받는 계기가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북해 직항 항로의 개척은 중세 유럽의 무역 질서에 일대 변혁을 가했는데, 이제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무역 함대는 지중해뿐만이 아닌 북해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범위가 비교적 좁고 각 요충지에 베네치아의 기지가 설립되어 있는 동지중해와는 달리, 북해 항로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길었으며, 항로 중간에 공화국의 기지나 통상 호위 임무를 담당하는 순찰대가 없었다. 그렇기에 북해 항로를 항해하는 상선대는 해적이나 사나포선 등의 습격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확실한 무역 환경 하에서 갤리선으로 구성된 무역 함대가 좋은 대안이 된 것이다. 갤리선은 대량 적재는 불가능했지만, 당시 북해 무역의 주력 아이템인 향신료는 수량이 적고 부피 단위당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비용 효율적으로 수송하는 것보다는 안정적으로 수송하는 편이 오히려 예상되는 수익이 더 높은 것이 주된 이유였다.
북해 항로가 개척된 시기쯤에 베네치아는 무역을 국유화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조류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내부 상황이 맞물려 베네치아는 아르세날레에서 북해 무역용으로 새롭게 건조한 대형 갤리선(Galea Grossa)을 무역에 아무런 문제 없이 투입할 수 있었다. 즉 14세기부터 아르세날레는 군선뿐만이 아니라 무역선 건조업도 관장하게 되었고, 기존의 아르세날레의 규모는 팽창하여 베네치아의 거의 유일한 해양 산업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갤리선의 우위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고 머지않아 범선이 다시금 상선으로서의 우위를 되찾기 시작했다. 해양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범선의 기동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데다 화약 무기의 발전으로 범선의 방호력도 높아진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베네치아의 전통적인 라이벌인 제노바 공화국은 보다 더 진보한 형태의 범선인 카락선(Carrack)을 개발하였는데, 15세기 대형 카락선의 적재량은 최대 1,500톤에 이르렀다. 반면 베네치아 대형 갤리선의 적재량은 그의 1/10 수준이었다.
대형 갤리선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150~180명의 노잡이들이 필요했고, 이에 10~20명의 파수 역할을 겸하는 궁사들이 더해졌다.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이탈리아 도시 국가 선박의 모든 노잡이들은 (최소 16세기 전반까지는) 자유민들이었다. 이들은 넉넉한 급료를 받았고, 이에 더해 자신의 물품을 들고가 행선지에서 사무역을 할 권리도 주어졌다. 물론 노잡이들의 사무역에 대해 공화국은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선박에서 빵과 물은 물론, 생선, 햄, 식초, 포도주를 포함한 풍부한 식단을 섭취하여 대항해시대에 이베리아와 북유럽 선원들을 오래동안 괴롭혔던 괴혈병이라는 질병의 존재를 모르고 선상 업무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들을 한 척당 200명이나 운용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일이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갤리선의 고유 이점들이 없어지자 베네치아의 갤리 상선대는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15세기에 베네치아는 북해 및 서지중해 무역에서 제노바에 의해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훗날 갤리선 무역선단을 지탱하는 향신료 무역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더욱 가시화되었다.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갤리선 위주의 중개 무역을 했던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범선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전 유럽으로부터 방대한 정보를 상시로 수집하던 베네치아인들 또한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는 다음 세기에도 여전히 새로운 체제에 대한 적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그 원인은 바로 아르세날레에 있었다.
베네치아 아르세날레는 고도로 분업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분업화는 갤리선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르세날레에서 범선을 비슷한 효율성 하에 생산하기 위해서는 모든 공정과 시스템의 대대적인 일신이 필요했다. 갤리선과 범선은 기본 구조가 완전히 다를 뿐더러, 선박을 구성하는 부품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갤리선용 노만을 제작해 온 장인에게 갑자기 로프를 생산하라고 해봤자 어차피 안 될 이야기이지 않겠는가? 고도의 정교함은 엄청난 효율을 일구어 내지만, 가외가 없는 고도의 정교한 체제는 이를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만 빠져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이를 혁신하기 어려웠다.
또한 이는 규모가 매우 거대했다. 베네치아 노동 인구의 1/3 가량을 고용하고 있던 아르세날레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량 해고가 불가피했는데, 이를 추진하는 데는 엄청난 정치적 리스크가 따랐다. 오늘날에도 만약 특정 정치인이 노동 인구의 1~2%를 점하는 일자리들을 구조 조정하여 대량 실업 및 연쇄적 경기 침체를 일으킨다면 그는 엄청난 정치적 비난 및 지지율 하락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체제로부터 수혜를 입고 있는 베네치아 공동체의 불복종 및 도제 개인의 신변 위험을 감수하고 이와 같은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1667년에 아르세날레는 역사상 최초로 영국의 그것을 모방한 전열함을 건조하였는데, 상기한 바와 같은 문제로 대량 생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대한 조선단지가 건조한 범선의 비용 대비 효율은 떨어졌고, 이와 같은 시도는 베네치아의 기술적 후진성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과거 베네치아는 극도로 효율적인 아르세날레 시스템 하에서 막강한 해양 역량을 이룩하였으나, 시대가 변하자 과거에는 효율적이었던 시스템이 과잉 투자 문제가 야기되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바뀌었고, 이에 발목을 잡혀 공동체의 지속적인 번영에 필요한 혁신을 창출하지 못했다. 과거의 힘의 원천이 오늘의 짐짝이 된 것이다.

베네치아의 추락: 양날의 검에 베인 공화국?
16세기만 해도 베네치아는 여전히 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정부는 여전히 연간 수백만 두카트(Ducat)에 달하는 세수를 올리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본토의 인구만 200만명에 달했다. 베네치아의 금화인 두카트는 유럽의 기축 통화였는데, 이는 과거에 비해 떨어진 입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네치아만큼 경제적으로 신뢰를 받는 국가가 유럽에 없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제도들은 국가의 경제에 대한 간섭 수준이 매우 높았고 전통적인 방법을 버리는 결정을 내리기 힘들게끔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전환기에도 체제를 전환하지는 못했다. 베네치아 정부는 베네토 지방의 부족한 삼림 자원으로 인해 아르세날레가 자재 부족 현상을 겪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목재를 아르세날레에 우선적으로 할당되게 하였고, 민간 조선소에는 높은 세금을 물렸는데,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16세기 베네치아는 선박 수입 국가로 전락하였다.
또한 민간 경제의 성장을 억압했기 때문에 이로부터의 혁신이 일어나기 어려웠다. 근대 초기 세계 무역을 주도한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합자 형태로 설립되었다. 개인이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막대한 비용이 들며 리턴이 불확실한 항로 및 식민지 개척 사업을 혼자 떠맡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는 정부가 합자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업들이 설립될 수 없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은 초기 항해 사업을 국가 주도로 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당시 오스만의 서진에 대항해 동지중해의 기지들을 지키기에도 벅찼던 베네치아에게 그러한 사업을 서유럽 강국들과의 또다른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추진할 여력은 없었다.
정치 또한 세습 계층이 장악하여 신흥 계층의 진입을 막았다. 대체로 혁신은 신흥 계층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베네치아의 정치 제도는 혁신에 불리하게 작용했을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본토에 대농장을 보유한 기존의 귀족들은 구태여 정치적 논란에 휘말려 가며 상업을 재흥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18세기에도 여전히 베네치아의 상선들은 동지중해를 항해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굼뜬 상선들은 이제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적들이 가장 선호하는 타겟이 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의 추락한 위상은 외해에서만 드러났던 것은 아니었다. 본래 아드리아해는 베네치아의 영해(Mare Clausum)였고, 과거에는 '베네치아만'이라고도 불렸던 곳이었다. 아드리아해에 진입한 모든 선박은 의무적으로 베네치아에 기항해야 했지만, 훗날 이 조건은 완화되어 아드리아해를 항해하는 모든 선박은 아드리아해를 순찰하는 베네치아 해군 선박에 화물 검사를 받고 이에 상당하는 관세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면 공화국의 이러한 규정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1702년 베네치아 석호 근해에 프랑스 전함이 출몰한 사건을 계기로 연례 행사인 승천제가 취소되었다. 그 이후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군함들이 공화국의 항의를 무시한 채 아드리아해를 항행하였으며, 상선들은 느린 베네치아 순시선들을 조롱하듯 따돌리며 아드리아해의 다른 항구들에 기항했다.
1719년 오스트리아는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를 자유항으로 지정하였고, 1732년 교황령은 안코나를 자유항으로 선포하였는데, 아드리아해 연안 경쟁국들의 조처로 인해 베네치아 항구는 트리에스테 항구에 물동량에서 추월당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물의 도시의 주민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암운이 드리우자 베네치아는 오래된 보호주의 정책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평의회의 결정에 따라 1736년부터 베네치아는 자유 무역항이 되었다. 이 조치 덕에 한때 베네치아를 떠났던 외국 상인들이 다시 돌아왔고 리알토 항의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창고가 증축되어 공화국은 간만의, 그리고 마지막 경제 회복을 맛보았다. 한때 베네치아는 향신료 무역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18세기 말의 베네치아는 주로 아드리아해 연안의 지역산품인 와인과 과일, 올리브유, 명반 등을 취급하였다. 하지만 베네치아 항구는 그 어느때 못지않은 활기를 되찾았고, 이에 힘입어 상업항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베네치아는 이미 경제 강국의 지위에서 멀어져 일개 변방의 도시로 전락한 상태였으며, 대륙의 거대한 국민 국가의 진격을 막아낼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진격해 오자 베네치아 평의회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해 찬성 512표, 반대 20표, 기권 5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공화국 폐지안을 가결하였고, 천년 공화국 베네치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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