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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ll조회 1404l
이 글은 5년 전 (2018/11/06) 게시물이에요

2018년 11월 4일 일요일은 호주 동쪽 섬 뉴칼레도니아에서 독립 투표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틈틈이 남태평양과 인도양의 섬들에 대한 글을 써왔는데, 독립 투표를 계기로 뉴칼레도니아 글을 올려봅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1. 쿡 선장은 남태평양의 한 섬을 보고 왜 스코틀랜드가 떠올랐을까?


남태평양의 섬 뉴칼레도니아는 호주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섬 크기는 18,576 평방킬로미터로 제법 큰 편입니다. (참고로 제주도 면적이 1,845 평방킬로미터)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 뉴칼레도니아의 위치


그런데 프랑스 해외 영토로서 프랑스에서 무려 2만 km나 떨어진 이 섬의 이름에, 고대 로마 시대 스코틀랜드를 지칭하던 "칼레도니아"가 붙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럽인으로서 섬을 처음 발견한 제임스 쿡 선장 때문이었습니다. 쿡 선장은 두 번째 모험 중이었던 1774년 9월 4일 이 섬을 처음(엄밀하게는 유럽인 중에서) 발견했는데 스코틀랜드가 떠오른다며 섬 이름을 뉴칼레도니아라고 명명하였습니다. FT에 따르면, 울창한 키 큰 소나무들과 웅장한 산을 보고 스코틀랜드가 연상되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사실 뉴칼레도니아에는 이미 기원전 1,600년까지 올라가는 오랜 거주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2. 천국과 거리가 멀었던 남태평양의 섬들: 향기가 진한 나무 Sandalwood와 헤드헌터 그리고 빠삐용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뉴칼레도니아는 고급 휴양지로 낙원처럼 보이지만 18-19세기 남태평양의 섬들은 결코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쿡 선장의 발견 이후 간헐적으로 이 지역을 찾았던 사람들은 포경선의 선원들이나 또는 희귀한 특산물을 찾아 돈을 벌려던 모험가들이었습니다. 이전 글 바운티 호의 반란에서 1787년 블라이 선장이 이끈 바운티 호가 빵나무를 찾기 위해 타히티에 왔던 것처럼 뉴칼레도니아에는 향기가 진해 오일 추출로 향수의 원료로 쓰이는 sandalwood를 찾는 이들이 종종 왔다고 합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 Sandalwood(백단향?)


하지만 당시 뉴칼레도니아 원주민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바운티 호의 반란 사건에서 블라이 선장 일행이 반란으로 작은 보트에 의존한 채 나침반과 지도도 없이 장장 6,701km를 47일 동안 노를 저어 가면서도 물과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인근 섬들을 처음 한 번(결국 유일한 희생자가 생김)을 빼고는 절대 들르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나중에 블라이 워터라고 불리게 된 호주 대륙 동쪽의 섬들에서는 당시 카니발리즘이 창궐해 있었습니다. 1849년 미국 선박 Cutter호는 뉴칼레도니아 원주민에게 붙잡혔는데 선원들 모두 잡혀먹혔다고 합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 1880년 두 명의 Kanak 전사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 블라이 선장의 죽음을 건 대여정과 카니발리즘이 횡행해 붙여진 '블라이 워터' 해역


따지고 보면 원주민들만 잔인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명인들을 자처했던 백인들이야말로 더 참혹한 상흔을 남태평양에 남겨놓았으며 지금도 이로 인한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입니다. 시간이 흘러 Sandalwood 교역이 감소하면서 뉴칼레도니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지만 곧 백인들은 엄청난 자원이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절실히 필요로 하는 노예들이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처럼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워낙 사람이 희귀한 지역이다 보니 'blackbirding'이라고 불리는 강제 노역자 수집 붐이 남태평양 일대 섬에 불어닥쳤습니다.


일부 선장은 흉년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작은 섬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착지를 소개해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이들을 꾀어 멀리 페루의 플랜테이션 농장 등에 팔아먹었지만 상당수 원주민 강제로 배에 태워져 타히티의 사탕수수 농장 등에 팔려갔습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Loyalty 섬 어린이들을 부모로부터 빼앗아 Grand Terre 섬 농장으로 보내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영국은 1807년 자국 식민지에서의 노예 무역을 금지하면서 남태평양 섬사람들의 노예화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프랑스 영향력에 있었던 뉴칼레도니아는 헤드헌터들의 인간 사냥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뉴칼레도니아가 프랑스의 공식 식민지로 편입된 것은 1853년 나폴레옹 3세 시절인데, 이 남태평양의 곧 넘쳐나는 본국의 죄수를 받아들이는 유형지로 인기를 끌게 됩니다. 1973년 영화 빠삐용(Papillon)을 보면 살인 혐의를 받은 죄수들이 남아메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기아나로 유형을 떠나는데, 사실 뉴칼레도니아야말로 프랑스의 최대 해외 유형지였습니다. 1864년부터 뉴칼레도니아는 본국의 죄수를 받는 유형지가 되었는데 1897년 그 역할이 끝날 때까지 22,000명의 죄수와 정치범이 뉴칼레도니아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 중에는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정부에 맞섰던 정치범들도 많았는데 1873~1876년 사이 동안 4,200명의 정치범들이 뉴칼레도니아에 왔다고 합니다. 이 정치범 중 40명은 섬에 정착했지만 1879년과 1880년 대사면령이 내려지자 대부분은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3. 2차 세계대전 중 드러난 섬의 존재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식민지 정착 프랑스인들


뉴칼레도니아가 본격적으로 그 존재감을 내보인 시점은 공교롭게도 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1940년 6월 프랑스는 허무하게 독일에 항복하고 친독 비시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놀랍게도 저 멀리 남태평양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의회는 만장일치로 망명 정부를 지지하기로 하고 비시 정권의 총독을 인도차이나로 내쫓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식민지 프랑스인들이 본토에 비해 더 민족적 성향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뉴칼레도니아가 반 독일을 내세우자 곧 연합국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1942-1943년 기간 뉴칼레도니아 수도 Noumea는 미 함대의 남태평양 기지가 되었고 한때는 섬 인구 전체에 맞먹는 5만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었다고 합니다. 뉴칼레도니아 덕분에 미 해군은 태평양 전쟁의 주요 분수령이 되었던 산호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4. 니켈 붐과 커져가는 갈등


사실 뉴칼레도니아는 전자 산업에 필수적인 니켈의 섬으로도 유명한데, 세계 니켈 매장량의 무려 1/4이나 섬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섬에서 니켈이 처음 발견된 때는 1864년으로 1876년부터 본격적으로 채굴이 시작되었고 1969~1972년에는 세계적인 니켈 붐이 불면서 섬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19세기 말부터 니켈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베트남, 인도네시아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사람들이 이주해왔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섬의 부와 인구가 크게 늘어났음에도 오히려 불만이 커져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바로 토착 원주민들인 Kanak이었습니다. 외지인들이 크게 증가하면서 Kanak은 아직 최대 인종임에도 상대 비중은 계속 감소하여 현재는 28만명 전체 인구 중 39.1%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니켈 광산의 이익도 대부분은 백인들의 몫이었기에 Kanak은 경제적으로도 소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5. 신 대신 피를 택한 남자의 등장과 대통령 선거 직전 벌어진 대공격


사실 Kanak에 대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대우는 개척 시기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비슷했습니다. 아이들을 강제로 빼앗겨 농장의 강제 노예로 보내야 했으며 살던 지역에서 쫓겨나 보호 지역에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백인들이 옮겨온 천연두와 홍역으로 Kanak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는데, 1878년 6만명이나 되던 인구가 1921년에는 27,100명으로 감소했습니다. Kanak의 인구는 1930년대까지도 증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운명이 점점 코너에 몰리자 Kanak들도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1878년 중앙 부족들을 규합한 Kanak들이 프랑스인들을 공격해 200명이나 살해하는 봉기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진압으로 천명이나 되는 Kanak들도 살해되었습니다.


1917년 제2차 봉기가 벌어졌는데 역시 프랑스군의 진압으로 다수의 Kanak들이 사망했으며 이 과정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집으로 보내져 종교의 힘 속에 문명인(?)으로 키워졌다고 합니다. 고아 중에는 Wenceslas Thi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후일 가정을 꾸리고 나서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은 문명화된 Kanak이 되어 1970년대 초 소르본 대학에서 유학을 하며 가톨릭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신부의 이름은 Jean-Marie Tjibaou으로 1970년대 중반 섬으로 돌아와서는 Kanak 지식인으로서 시장과 고위 관직을 맡기도 하지만 서서히 민족적 자각을 하면서 Kanak의 비참한 현실에 눈뜨며 결국 사제직을 버리고 Kanak에 의한 뉴칼레도니아 독립을 주장하는 분리주의 단체 FLNK(카낙 사회주의민족해방전선)의 수장이 됩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 가톨릭 신부에서 사회주의민족해방전선의 수장이 된 Jean-Marie Tjibaou


FLNK는 1976년부터 무력 투쟁으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1984년 FLNK는 농장(아마도 백인 농장)을 점령하고 임시 정부를 구성했으며, 1985년 지방 선거에서는 4개 지역 중 3곳에서 승리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러자 1986년 프랑스의 중도우파 정부는 Kanak의 요구를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토지를 분배해 백인이 2/3를 차지하도록 만들었고 Kanak에는 1/3도 안 되는 토지가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FLNK는 1987년 말 도로를 점거하고 프랑스 헌병경찰(gendarmes)에 총격을 가하는 등 무력 투쟁 수준을 높였으며 급기야 1988년 4월 22일 지역 선거와 프랑스 대통령 1차 선거가 있기 이틀 전 프랑스 헌병경찰대를 공격해 4명의 헌병경찰을 살해하고 23명을 납치하여 동굴에 인질로 가두어 두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프랑스 대선 정국은 2만 km나 떨어진 식민지에서 전해온 소식으로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당시 양대 유력 후보는 현직 대통령인 사회당의 미테랑과 현직 총리로 좌우 동거 정부의 한 축을 맡았던 시라크였습니다. 치안의 책임이 있던 시라크 총리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협상을 통한 해결을 주장하던 대통령의 의지와 달리 특공대를 급파하여 조기에 인질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재를 하겠다고 나섰던 치안판사마저 인질로 잡히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대통령 결선 투표가 있기 사흘 전 프랑스 특공대가 인질 구출 작전에 돌입하였고 양측의 자동소총 교전 속에 1주일 이상 동굴에 잡혀 있던 23명의 인질들을 구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다만 작전 중 2명의 특공대원이 사망하였고 분리주의자들은 15명이 현장에서 사살되고 3명은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시라크 총리는 작전 성공에 크게 고무되었지만 결선 투표의 벽을 넘지는 못하였습니다.




6. 지도자가 배신자로 불리며 암살되다! .... 관광 명소로 재탄생한 Jean-Marie Tjibaou


1988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벌어진 뉴칼레도니아의 유혈 사태는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을 크게 끌 수밖에 없었고 미테랑 정부가 적극 중재 의지를 내보임으로써 1988년 6월 26일 Matignon Agreement가 체결되어 10년 동안의 안정기를 갖기로 하였으며 1998년 5월 Noumea 협정을 체결하여 20년 이행 기간을 거쳐 독립을 묻는 투표를 2018년 말에 치르기로 합니다. 한편 Kanak의 정체성 수립과 독립을 이끌었던 민족 지도자 Tjibaou는 섬의 평화를 위해 프랑스 정부와 협상에 나섰는데 1989년 5월 4일 인질 사태 1년을 맞아 추모식에서 Kanak의 다른 지도자였던 Djubelly Wéa의 총에 암살되는 비운을 맞습니다. 그런데 Tjibaou의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름을 딴 문화 센터의 건립으로 이어졌고 현재는 뉴칼레도니아 수도 Noumea의 주요 관광 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  독특한 모습의 Tjibaou Cultural Center



7. 첫 투표의 결과가 바뀔 수 있을까?  인구 구성도 바뀐 남태평양 최고 부자 섬의 운명


다시 2018년 11월 4일의 독립 투표로 돌아오면 80%가 넘는 투표율 속에 프랑스 잔류를 원하는 비율이 58.6% 독립은 부결되었습니다. 물론 1998년 협정으로 2022년까지 두 번 더 독립을 묻는 총 투표를 할 수 있고 Kanak의 민족적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으며 경제적 소외도 여전하다고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달라진 인구 구성 비율(39%의 Kanak을 제외한 27%의 유럽계와 나머지 아시아계 대부분 잔류 지지)이나 매년 15억 달러나 되는 프랑스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하는 현실과 어찌 되었든 남태평양 섬 중에서 가장 부자가 된 현 상황이 유지되는 한 다수의 주민들이 프랑스와의 단절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 남태평양 섬들의 GDP와 1인당 GDP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 BBC의 자료 화면

<독립파: 프랑스는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어 노예로 만들었으며 아무것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잔류파: 30년의 평화가 지켜져야 합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그런데 섬의 부 대부분은 27%에 불과한 백인들의 차지임>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프랑스 본국보다 더 민족주의적인 섬 백인 주민들: 우리는 과거 비시 정권도 쫓아낸 적이 있다는 당당한 표정>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원주민 여성: 우리는 학교도 있구요. 병원도 있어요. 정말로 프랑스가 필요합니다.>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 인스티즈

<투표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프랑스 정부의 입장: 2018년 5월 뉴칼레도니아를 방문한 마크롱 대통령은 뉴칼레도니아가 독립하면 프랑스는 약간 덜 아름다워질 것이라며 잔류를 호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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