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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628 출처
이 글은 7년 전 (2018/12/08) 게시물이에요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일 수도 있었다? 일본의 패전 협상과 연합국의 대응 | 인스티즈

2015년 여름 일본에서 항복 70주년을 기념하여 개봉한 하라다 마사토 감독의 《일본 패망 하루전(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 일본에서 가장 긴 하루)》에서는 일본 패망 직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거론되는 것은 전적으로 "국체호지"뿐이다. 영화에서는 비록 모든 것을 포기해도 천황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버릴 수 없다는 지도부의 각오와 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연합국의 처분에 맡긴 천황의 "성단"이 일본 민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말하듯, 태평양 전쟁 말기 연합국의 압박과 패전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도부가 항복을 주저한 것이 과연 천황제 때문일까? 과연 연합국은 천황제를 폐지하려 했는가? 이것은 사실 호도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진주만 기습 이래 승승장구하면서 태평양 전역을 휩쓸던 일본은 1942년 6월 7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단 한 번의 패전만으로 기세가 꺾여 버렸다. 또한 과달카날을 놓고 벌어진 장장 6개월에 걸친 소모전은 태평양 전쟁의 승패를 사실상 결정지었다. 숙련된 선원과 파일럿의 대부분을 상실한 일본 해군은 더 이상 미국과 주도권 쟁탈전을 벌일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항복까지는 2년 반이 더 걸렸지만,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얼마나 더 버티는가의 싸움, 패전을 향한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본 수뇌부는 진주만 기습을 결정할 때부터 자신들의 빈약한 국력으로는 강대한 미국을 상대로 도저히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기보다 더 강한 상대에게 선공을 가한 것은 독일을 믿고 한 행동이었다. 즉, 일본은 자신의 역량이 아닌 독일의 승리에 편승해 보겠다는 기회주의적 야심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상대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 작전과 단기 결전으로 우위를 점한다면 서쪽에서는 독일에게, 동쪽에서는 일본에게 양면 포위를 당한 미국이 알아서 협상을 구걸하게 될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를 했다. 하지만 미드웨이와 과달카날의 패배로 그럴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게다가 독일 역시 스탈린그라드와 북아프리카의 엘 알라메인에서 패전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세에 내몰린 추축국 진영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더 버티는가,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건으로 항복할 수 있을까의 문제가 되었다.


한편, 1943년 1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열린 연합 참모 회의(CCS, Combined Chiefs of Staff Committee)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추축국 진영의 "무조건 항복"을 전쟁 목표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또한 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에서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 삼대 거두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그들이 탈취한 모든 영토에서 축출할 것, 그리고 한반도를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독립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연합국이 인정하는 일본 고유의 영토는 본토 4개 섬(혼슈, 큐슈, 시코쿠, 훗카이도)와 주변 몇몇 도서로 국한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일 수도 있었다? 일본의 패전 협상과 연합국의 대응 | 인스티즈

(카이로 회담에서 삼거두)


일본 지도부는 국민들 앞에서는 여전히 거짓말로 "황군이 이기고 있다"고 떠들면서도 자신들은 패전에 대비하여 연합국과 강화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중심에는 명문 귀족 출신인 고노에 후미마로 前 총리가 있었다. 그는 군부의 눈을 피하여 강화에 찬성하는 일부 정치인들을 모아서 비밀 모임을 만들고 종전 방안을 논의했다. 연합국과의 교섭은 1944년 7월 사이판 전투의 패배로 강경파인 도조 히데키가 총리에서 물러나고 고이소 쿠니아키가 그 뒤를 이으면서 본격적으로 가속화되었다.


첫 번째 교섭 상대는 중국이었다. 신임 총리에 취임한 고이소는 충칭의 장제스 정권에게 비공식적으로 접근하여 화평을 제안했다. 중국 내 일본군의 완전 철군과 점령지의 반환, 왕징웨이 친일 괴뢰 정권을 해체하는 대신, 중국은 중국 내 모든 미군, 영국군을 철수시키고 전쟁을 끝낸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만주와 대만이 빠져 있었다. 중일 전쟁 이후에 획득한 영토는 돌려주더라도 그 전에 차지한 영토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심보였다. 물론 중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또한 일본이 장제스 정권을 통해 연합국 진영과 강화하려 했다는 사실은 미국에게도 알려졌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연합국을 이간질시키려는 일본의 상투적인 술책"이라고 평가절하했고 이들의 진의를 의심했다.


1944년 9월 아사이 신문의 전무였던 스즈키 시로(鈴木史郎)는 개인 자격으로 주일 스웨덴 공사를 찾아가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 중에 획득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고 만주국도 포기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의 제안은 스웨덴 정부와 영국을 경유하여 곧 미 국무성에도 전달되었다. 하지만 미 국무성은 정체도 불분명한 일본인의 말일 뿐, 그가 일본 정부를 대표한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검토할 가치가 없다며 묵살했다. 이후로도 일본은 1945년 초까지 바티칸, 스위스, 포르투갈 등 여러 중립국들을 통하여 여러 차례 연합국과 교섭의 의사가 있음을 전달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일본이 연합국과 제대로 접촉조차 하지 못했던 첫 번째 이유는 그동안의 적대 관계로 인해 서로의 불신이 너무 깊었고 마땅한 대화 채널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주무부처가 되어야 할 외무성이 직접 나서서 연합국과의 대화 채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신분도 불확실하고 아무런 권한도 없는 민간인을 일본의 대표랍시고 앞세우는 식이었다. 이는 연합국과의 강화를 완강하게 반대하는 군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일본 스스로도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합국 입장에서는 일본이 과연 협상에 나설 의지가 있는지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1945년 7월 10일 조세프 그루 미 국무 장관 대리는 "우리는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일본 정부의 화평 교섭을 받지 않고 있다. 일본이 평화를 바란다는 얘기는 세계 각처에서 들어와 있지만 이것이 일본 정부를 대표한다고 볼 만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만약 일본이 진정으로 강화에 나설 의사가 있다면 뒤에 숨어서 떠들거나 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떳떳하게 나서서 밝힌다면 미국도 얼마든지 응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 지도부의 현실 인식 결여였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진영의 전쟁 방침은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이지, 조건부 타협이 아니었다. 연합국 수뇌부는 대서양 선언부터 카이로 선언, 얄타 선언, 포츠담 선언에 이르기까지 2차 대전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전적으로 추축국들의 침략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는 의지를 일관되게 확인했다. 즉, 일본이 강화를 하고 싶다면 일단 항복에 동의한 후 그 다음의 사안은 오직 연합국의 선처를 바래야 했다. 그것이 연합국 진영의 요구 사항이었다. 반면, 일본 지도부는 이번 전쟁에서의 "패전"은 부득이 인정한다고 쳐도 "항복"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식이었다. 이렇게 쌍방의 이견이 너무 컸기 때문에 설령 양측이 정식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손 치더라도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일본이 내건 강화 조건이란, 소위 "국체호지(国体護持)"라 하여 천황제의 존속 외에도, 연합국 군대의 일본 본토 진입 비허용, 일본군의 무장 해제 및 전쟁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은 일본 국내법에 따라 자신들의 손으로 스스로 할 것, 만주 사변 이전에 획득한 한반도와 대만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할 것 등 지극히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것들이었다. 특히 한반도와 대만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 이전에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획득한 영토이므로 그 이후에 무력 침략으로 점령한 중국, 만주, 동남아 지역 등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일본 지도부는 어떻게든 그동안 자신들이 어렵사리 획득한 식민지를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이 일본의 항복이 늦어진 가장 큰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외무 장관이었던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고압적인 태도가 일본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평화 노력에 장애가 되었다"고 했는데, 한낱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현실 착오와 상관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일본 군부는 "1억 총단결"을 운운하면서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항전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상륙 과정에서 연합군이 일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많은 희생을 낼 경우 혹시라도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연합국의 편이지, 일본의 편이 아니었다. 군부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막연한 낙관에 빠진 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1945년 5월 7일 독일은 패망했고, 연합군의 공세는 갈수록 강화되어 일본의 숨통을 조여 왔다. 또한 연합국에서 유일하게 일본과 중립 조약을 맺고 있었던 소련마저 일소 중립 조약의 파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일 수도 있었다? 일본의 패전 협상과 연합국의 대응 | 인스티즈

(도쿄 시가지에 소이탄을 떨어뜨리는 연합군 폭격기들. 이미 승패는 결정났음에도 여전히 항복하지 않고 고집을 부린 이유는 식민지를 끝까지 쥐고 있으려는 일본 지도부의 허황된 욕심 때문이었다.)


일본은 항복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비록 중국 본토와 동남아, 태평양의 점령지는 포기하더라도, 만주와 한반도, 대만만큼은 어떻게든 내주지 않기 위해 온갖 술수를 구상했다. 특히 마지막까지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한반도였다. 독일이 항복하고 소련의 참전이 초읽기에 들어간 1945년 5월 말에야 참모 본부 일각에서는 "소련의 참전을 막으려면 과감하게 청일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 만주와 한반도, 사할린까지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으로 나왔다. 하지만 묵살되었고 주변의 온갖 매도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 일본 지도부는 패망이 코앞으로 다가온 7월 14일에도 스위스를 통한 교섭에서 여전히 한반도와 대만은 내놓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7월 18일에 외무성에서 제출한 "대소 교섭안"에서는 대만은 빠졌지만 한반도에 대한 영유권 요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당시 연합국이 일본과의 개별 협상은 없으며 오직 "무조건 항복"만이 있다고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도부는 이런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물론 몰랐을 리는 없다. 문제는 연합국 진영의 의지와 강한 결속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지도부는 미, 소가 비록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손을 잡기는 했지만 일시적인 합종연횡일 뿐, 근본적인 모순과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한, 결국 동맹은 균열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균열을 파고들 기회를 노렸다. 즉, 미국과 소련의 분열은 필연적이며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완전히 몰락시키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히틀러 역시 마지막까지 품었던 실낱같은 희망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물론 전쟁이 끝난 뒤 미소의 냉전이 실제로 현실화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미소의 갈등과 모순이 추축국이 기대하는 것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이는 상대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연구 없이 막연한 선입관과 편견으로 탁상공론적으로 접근하는 사고가 얼마나 무모한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소련은 이미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에게 대독 전쟁의 종결과 함께 일본에 선전 포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일본은 1945년 6월에 와서야 소련과의 대화에 나섰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모스크바 주재 사토 나오다케 주소련 대사는 일본이 연합국과 교섭할 수 있도록 소련이 중재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묵살되었다. 또한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에게 "일본이 연합국을 이간질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서 일본의 교섭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미 소련이 대일 참전을 약속하고 유럽 전선의 소련군이 동쪽으로 대규모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했음에도, 일본은 여전히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사토는 소련의 참전이 임박했음을 비로소 깨닫고 1945년 7월 20일 도쿄로 긴급 전문을 보내, "천황제만 보존할 수 있다면 다른 조항은 모두 버리고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일본 지도부는 연합국이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왜 고집스럽게 식민지, 특히 한반도를 쥐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는 일본의 인구가 이미 과잉 상태라 식민지가 없이는 자신들이 생존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에도 지나 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은 육군부에 전문을 보내 "일본의 영토를 본토 4개 섬에만 국한시키겠다는 것은 과거 일본의 인구가 3천만 명이었을 때로 돌아가라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은 인구가 7천만 명이니 우리가 생존하려면 반드시 조선과 대만을 소유해야만 한다"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식민지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당시 대다수 일본 지도부의 사고방식이었다.


한편, 미국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사실 일본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양 생각하는 소위 "국체 문제", 즉 천황제의 존속은 미국 입장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천황제 폐지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의 의사를 존중할 것임을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밝혔다. 진짜 첨예한 문제는 한반도를 비롯한 일본 식민지에 대한 처리였다. 이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추축국에 대해서도 그동안 침략 전쟁으로 획득한 모든 해외 영토를 포기하도록 했는데, 일본만 예외로 둘 수는 없으며 그럴 이유도 없었다. 또한 카이로 회담에서 이미 "일본 제국의 해체"와 한반도의 독립을 인정한 바 있었다.


그런데 5월 28일 트루먼과 회담한 후버 前 대통령은 일본과의 조기 종전을 주장하면서 일본 정부를 해체시키지 말 것과 한반도와 대만을 일본의 영토로 인정할 것을 건의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일본이 내건 강화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얘기였다. 또한 후버는 스팀슨 전쟁 장관에게도 일본을 철저하게 패배시킬 경우 극동에서 소련을 견제할 세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세력을 어느 정도 보존하여 극동의 새로운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제안은 트루먼 행정부 내에서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사실 트루먼 입장에서는 후버의 제안을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또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고수하여 전쟁을 질질 끌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여 끝내는 것이 자신들의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도 더욱 유리했다.


그러나 3성 조정 위원회 전략 정책단의 단장인 조지 링컨 준장은 이미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미국이 일본 제국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점에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의 주장은 마셜 참모 총장의 지지를 받았고, 결국 트루먼과 스팀슨 전쟁 장관은 이들의 주장을 채택했다. 그리고 더 이상 여기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7월 26일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은 "중요 지역을 여전히 영유하려고 획책하는" 일본의 요구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또한 다른 연합국들도 포츠담 선언을 통하여 "일본의 영토는 카이로 선언과 같이 본토 4개 섬과 연합국이 결정한 인접 소도서로 국한한다"는 원칙을 재차 확인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연합국과 일본의 협상 대상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일본은 소련의 만주 침공과 두 방의 원자 폭탄을 맞은 뒤 무조건 항복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남지 않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 조지 링컨 준장은 38선을 그은 장본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의 해체이지, 일본으로부터 한반도를 빼앗아 자신들이 차지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한반도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단지 연합국이 공동으로 신탁 통치를 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면 된다는 식의 막연한 구상만이 있었다. 트루먼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츠담 회담에서도 일본과 한반도를 분리시키겠다고 결정했지만 그 다음의 계획은 없었다. 따라서 막상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한 뒤, 미국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관동군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자, 트루먼 행정부는 부랴부랴 한반도에서 세력권을 나눌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8월 11일 밤 마셜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은 링컨 준장은 벽에 걸린 지도가 눈에 들어왔고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38선에 연필로 선을 주욱 그었다. 그렇게 38선은 결정되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병주고 약준 셈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이 항복을 질질 끌었던 진짜 걸림돌은 이들의 허황된 욕심에 있지, 천황제 때문이 아니었다. 연합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을 뿐, 천황제를 폐지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이는 별개의 얘기다. 그럼에도 엉뚱한 쪽으로 방향을 끌고 가는 것은 결국 전쟁 책임을 희석시키고 자신들의 침략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일 수도 있었다? 일본의 패전 협상과 연합국의 대응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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