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https://instiz.net/pt/5934276주소 복사
   
 
로고
인기글
공지가 닫혀있어요 l 열기
필터링
전체 게시물 알림
유머·감동 이슈·소식 정보·기타 고르기·테스트 팁·추천 할인·특가 뮤직(국내)
이슈 오싹공포
혹시 미국에서 여행 중이신가요?
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l조회 1810 출처
이 글은 6년 전 (2019/1/01) 게시물이에요

들어가며


이전 글에서 '17세기 스페인 쇠퇴론'에 대한 현재의 학계 논의를 살펴보았다(17세기 스페인은 정말로 쇠퇴했는가?). 예전까지는, 16세기 이후로 스페인은 쇠락했으며, 과다한 전쟁으로 인한 파산과 부실한 내수 산업 구조 등이 그 원인으로 지목받아 왔다. 전통적인 반가톨릭 사관(최근 학계의 흐름과 달리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서양사 담론은 아직도 이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다)은 이를 종교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지금도 몇몇 역사 커뮤니티에 관련 글을 올리면 "무적함대가 깨진 이후로 스페인은 망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라는 반응이 종종 나온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은 '17세기 스페인의 쇠퇴' 담론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17세기 스페인이 이런저런 위기를 겪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 이해하던 것처럼 볼품없이 쇠퇴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17세기에 거의 모든 국가들은 크건 작건 위기를 겪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스페인이 16세기가 저물 무렵에 결정적으로 쇠퇴한 것이 아니라면, 스페인 제국이 확연히 그 위상과 국제적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리고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18세기 스페인: 개혁과 부흥


근대 초기 유럽사 담론에서 스페인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을 끝으로 한동안 실종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막 스페인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을 받은 펠리페 5세 앞에는 쉽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일단 길고도 거대했던 이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수습해야 했다.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의 말버러 공작과 오스트리아군 지휘관인 사보이의 오이겐 공작이 이끄는 동맹군에 의해 스페인의 기존 유럽 영토 상당 부분이 점령당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본토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꽤 선전해서 많은 영토를 재탈환했지만, 200년간 지배해 온 스페인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는 오스트리아에게 내주고, 시칠리아는 사보이에게 넘어가고, 나머지 이탈리아 영토들은 종전 회담 결과 역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6세에게 넘어갔다.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은 대체 왜 몰락했는가? | 인스티즈

(펠리페 5세)


이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펠리페 5세는 대수술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런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이전 시기 스페인이 망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이것은 스페인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은 그 거대한 규모와 인력과 물력의 소모로 인해서 참전국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전쟁이 또 벌어진다면 현 체제로서는 감당하기 어렵겠다는 자각도 동시에 주었다. 이것이 18세기가 거의 모든 서유럽 국가들에게 개혁과 진통의 시기가 된 이유였다. 프랑스는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하고 왕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영국은 여러 굴곡에도 불구하고, 18세기가 마무리될 무렵 비교적 성공적으로 체제 개혁을 이루었고, 오스트리아도 마리아 테레지아 이래 3대를 거치면서 역시 비교적 성공적으로 19세기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사례다.


펠리페 5세는 여기에 더해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대신해서 정통성 있는 군주로 신민들에게 인정받아서 왕조 구축을 해야 한다는 과제까지 더해졌다. 16세기 카를 5세가 처음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 외국 출신 군주(카를 5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에 대한 반감이 컸었다는 선례를 잘 알고 있었던 펠리페 5세는 신중하게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정책은 3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된 반면, 개혁 방향은 확고하게 프랑스의 리슐리외와 콜베르의 정책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그 범주도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모든 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것이었다.


비록 한동안 저평가를 받아 오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펠리페 5세가 남긴 치적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가 사망한 해인 1746년의 제국을 전쟁이 막 끝났던 재위 초기와 비교했을 때, 스페인 경제는 건실하게 회복되었고, 행정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전례가 없을 만큼 긴밀하게 결합되었다. 재위 후반기에 그의 개혁 정책들은 이미 확실한 열매를 거두고 있었다. 1733년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에서 스페인군은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재정복했다. 1746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결과로는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회복했다. 이 전쟁들에서 육군은 적어도 그동안 들인 비용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이후 페르난도 6세는 선왕의 재정 개혁을 이어 가는 한편, 정책 방향을 이탈리아보다 대서양 쪽으로 돌렸다. 그 결과 대서양 너머 식민지들과의 대서양 교역에 대한 국가 관리의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이에 맞춰서 해군에 대한 투자도 대폭 늘려, 스페인 해군은 영국, 프랑스 다음으로 강력한 면모를 되찾게 되었다.


단, 이때 스페인의 부흥을 '영웅적인 개혁 군주 한둘이 망해 가던 제국을 되살렸다'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물론 펠리페 5세와 그가 조직한 정부의 리더쉽이 대단히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7세기 스페인이 몇몇 위기를 겪은 것이 단순히 군주 몇 명이 무능하고 정치가 썩어서 그랬던 것만이 아니었듯이, 18세기의 부흥도 마찬가지다. 17세기는 전 유럽적으로 경제적인 침체를 겪던 시기였고, 좋지 않은 날씨와 기근이 이어지던 시기였으며, 이것이 스페인에 미친 영향이 상당했다. 반면에 18세기 스페인에는 더 이상 대규모 역병도 없었고, 날씨도 대체로 좋았으며 풍작이 이어졌다. 물론 지난번 글에 썼듯이, 이러한 변화는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것이지만(스페인 인구와 경제는 17세기 말에 이미 회복세로 돌아섰다) 그 영향이 확대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펠리페 5세와 그의 관료들은 운의 도움도 상당 부분 받았다. 물론 좋은 조건을 잘 활용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이었으니 그 점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계몽 전제 군주와 그 한계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소위 '계몽 전제 군주'를 자처했던 카를로스 3세가 즉위하게 된다. 두 명의 선왕들의 정책이 당시 유럽의 트렌드였던 '정부의 역할 강화'와 소위 '중상주의'에 맞춰져 있었다면, 카를로스 3세는 여기에 또 다른 트렌드인 '계몽주의'를 더했다.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은 대체 왜 몰락했는가? | 인스티즈

(카를로스 3세)


계몽주의는 사실 대단히 모호한 개념이다. 소위 계몽사상가라는 사람들도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라는 점을 제외하면 서로 의견이 많이 달랐으며, 각 국가별로도 나름의 풍토에 따라 사상들이 달랐다. 그리고 예전에 '계몽사상=시민 혁명의 선구자'로 외우던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은 사실 보수적인 이들도 많았고, 계몽주의자라고 무조건 반군주정, 반교회였던 것도 아니었다. 가령 스페인의 경우 계몽사상을 가장 처음 소개했던 이는 베네딕토회 수도사였던 베니토 헤로니모 페이후 이 몬테네그로(Benito Jerónimo Feijóo y Montenegro)였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계몽사상은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하면 스페인 민중 대다수에게는 큰 호응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낯선 외국 사상'으로 배척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도 카를로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계몽사상에 입각하여 열심히 정책을 추구했다. 그것은 크게 봐서 과학 기술 등의 학문 장려와 교회에 대한 장악으로 나누어진다. 이 역시도 사실 동시대 유럽 군주들의 트렌드에 맞춘 것이었다. 동시대 프랑스 왕들도 본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를 자처했으되, 프랑스 교회는 철저히 자신들이 장악하려 했다. 스페인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정책을 추구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만 보고 '왕권vs교회'라는 이분법적 갈등 구조를 그리는 것은 큰 오산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큰 오해 중 하나가 '가톨릭 교회는 단일 교파라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세력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내부에는 수많은 이견과 충돌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지금도 그렇고, 중세에도 그랬으며, 근대 초에도 다를 바가 없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스페인 교회에도 상당히 다른 의견들이 있었으며, 상당수 성직자들은 카를로스의 의견에 동조했다. 또한 교회를 자동적으로 보수파로 분류하는 것도 잘못된 인식이다. 프랑스 혁명 때도 그랬지만 성직자 내에도 개혁적인 인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문제는 개혁을 추구하는 카를로스 3세의 자세와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소위 '개혁 군주'에 대한 환상은 대부분 개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해한 데서 나온다. 개혁은 한 사람의 양심적인 개혁가의 의지만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몇몇 드러나는 현상만 보고 '저게 문제니까 저거만 때려잡으면 세상이 다 완벽해지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를 초래한다. 그 현상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 인간과 사회 구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한 데서 온 착각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가령, Esdale가 지적하듯이, 카를로스는 스페인 각 지역 공동체의 전통 종교 의식들(자기가 보기엔 꽤 기괴한 의식들)을 단순히 '무지와 미신의 산물'이라고 단정하고 강제로 척결에 나섰다. 본인은 나라를 근대화하고 있다고 뿌듯해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왜 그 공동체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스페인 각 지역의 종교 의례는 그 지역 공동체의 자부심이자 구성원 결속의 수단이었다. 그런 의미를 갖는 유서 깊은 행사들을 강제로 금지당하니 불만이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예는 또 있었다. 당시 교회 장악에 나선 유럽 여러 군주들에게 있어 눈엣가시는 교권 독립의 가장 강력한 옹호 집단인 예수회였다. 이 점도 그렇고, 계몽사상가로서 자신이 왕국의 학문 발전을 선도하는 주체가 되고 싶었던 카를로스 3세는 예수회가 스페인의 교육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예수회가 원주민 보호에 앞장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식민지 지주 세력들이 가세했다. 결국 그는 과라니 전쟁에 예수회가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영화 <미션>에 묘사된 그 사건)을 구실로 삼아 예수회 추방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그가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국가가 학문 발전을 주도하게 되기는 커녕, Maltby의 지적대로, 예수회 추방은 스페인의 교육 시스템을 사실상 붕괴시켜 버렸다. 현상만 때려잡고 보자는 어설픈 개혁의 무서움을 제대로 보여 준 예라고 하겠다. 더해서, 농업과 농민 보호를 위한 개혁 정책 역시 비슷하게 열의만 가지고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 역효과를 냈다.


물론 이런 측면만 보고 '이것이 스페인 쇠락의 원인이구나'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잉글랜드도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 이후 비슷하게 교육이 황폐화되었지만, 결국 어떻게든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카를로스 3세는 한계도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이상의 능력과 지성을 가진 군주인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재위 기간 내내 열심히 일함으로써 온 성과도 분명 있었다. 특히 상공업과 무역에 대한 투자는 상당한 성과를 내서 카를로스 3세의 치세에 스페인의 수출량은 놀라울 정도로 급증했다. '스페인은 식민지에 있는 은을 수탈하는 데만 의존하다가 결국 망해 버린 낙후된 제국'이라는 흔한 인식과 크게 대조되는 현상이다. 다만 분열의 씨앗을 상당 부분 뿌려 놓았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Maltby의 말대로, 1788년 12월에 죽음을 앞둔 카를로스 3세는 자신의 치세와 개혁이 총체적인 성공이었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외견상 그의 치세를 거치면서 국왕의 권력은 강해졌고, 수입은 늘어났으며 국가도 전체적으로 부유해졌다. 그리고 '이성'의 이름으로 옛 합스부르크 시대의 '비이성적'인(본인이 보기에) 유산들과 비능률적인 행정을 청소해 냈다고 본인은 뿌듯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치세 30년 동안 열심히 메스를 들이대면서 그는 합스부르크 시대가 물려준 통치 구조의 장점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얼핏 보기에 비효율적이고 미신으로 가득한 것 같은 그 체제에 '군주 한 두 명의 무능이나 예기치 못한 재난 등에 쉽게 붕괴하지 않는 안정성'이라는 장점이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그저 과거의 잔재로만 여기고 청소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당장은 그의 에너지 넘치는 활동과 가시적인 성과에 가려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국왕과 신민, 정부 사이에 깊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후손들이 치러야 했다.




18세기 말의 스페인


Esdale의 표현대로, 1788년 시점에서 스페인은 여전히 세계적인 강대국이었으며, 강대국의 모든 요건을 가지고 있었다. 영토는 여전히 광대했으며, 군사력은 상당히 먼 곳까지 투사 가능했다. 18세기 유럽 국력의 중요한 척도인 해군력을 본다면, 1788년에 스페인은 76척의 전열함과 51척의 프리깃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당시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함인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구조적인 문제가 상존했다. 교역과 상공업에 대한 투자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지만, 그 발전은 지역별로 불균등했고, 부유해진 곳들도 많았으나 국가의 많은 지역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식민지 유지비는 점점 더 국고에 부담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해군력은 강력했으나, 인력을 유지하는 것은 늘 어려웠다.(단, 스페인은 영국과 달리 대규모 상비 육군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해군에만 집중 투자할 수는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카를로스 3세의 계몽 정책은 성과도 있었지만, 앞서 보았듯 동시에 사회 분열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가 전혀 없는 행복한 시대는 없다. 우리는 종종 전성기는 완벽한 시대고 그게 끝나면 다 망가져서 쇠퇴가 시작된다는 인식을 가질 때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특정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구조적 문제는 대부분 건국 당시부터 상존해 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잠재적 문제점들이 비교적 잘 조절되거나 관리되고 있다가, 여러 가지 내·외부적 요인이 겹쳐져서 체제에 충격이 가해지면 그때부터 붕괴가 시작되는 것이다. 30년 전쟁의 발발이나 영국 내전의 발발이 이를 아주 잘 보여 주는 케이스다.


사실 인간이 만든 사회와 체제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구조적 문제가 전혀 없는 체제를 만들겠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헛된 꿈이다. 그리고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거기서 또 다른 문제들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폐단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장기적인 해결책을 마련해 나가고, 거기서 또 문제가 발생하면 거기에 맞춰서 또 대책을 세워 나가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18세기 스페인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일단, 스페인의 18세기는 쇠퇴의 시기이기는 커녕, 활력으로 가득찬 역동적인 발전의 시기였다. 그러나 발전의 와중에 강국으로서의 위치에 있어서 불안감을 주는 잠재적인 문제점들도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1788년 시점에서 낙관과 긴장은 항상 공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후의 스페인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이었을까?




혁명과 위기


지난번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1788년 시점에서 스페인은 '쇠락해 가는 제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17세기 후반부터 개선된 자연적 조건과 펠리페 5세 이래 능력 있는 여러 군주들의 정책은 충분히 효과를 발휘해서 스페인은 세계적인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계몽 군주 카를로스 3세의 정책이 가진 양면성 덕분에 번영의 그늘 아래 불안한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강조하는 바이지만 '~~한 문제가 있다'가 곧 '쇠락할 운명이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국가나 사회든 그 구조에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항상 있다. 그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하고 터져 나오는 데는 여러 예상치 못한 변수가 다양하게 작용한다.


스페인의 경우에는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전쟁이 첫 번째 계기를 제공했다. 카를로스 3세가 나름의 능력과 카리스마를 갖춘 군주였던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를 계승한 카를로스 4세는 부왕의 정치 감각이나 활동력을 물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상황에서 스페인은 근대 초 서유럽 역사상 가장 큰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는 카를로스 3세가 시도한 계몽주의 개혁의 성과보다는 약점이 더 강력하게 작용했다. 앞서 말했듯, 카를로스 3세는 계몽주의적 이성의 이름으로, 과거의 관습과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관행을 상당 부분 파괴시켰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두 세기에 걸쳐 마련한 안전 장치 역시 파괴해 버렸다. 그가 새로 만들어 놓은 체제는 국왕 개인이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정국을 틀어쥐고 부지런히 운영을 해야만 제대로 돌아가는 그런 구조였다. 반대로 얘기해서, 새로운 국왕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할 경우 체제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는 얘기였다. 그 책임은 국왕에게 곧바로 연결되게 된다. 이 부분이 카를로스 3세가 합스부르크 시대의 체제를 파괴하면서 깨닫지 못했던 점이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초기에 스페인은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를로스 4세의 관심은 프랑스 왕실의 안전에 집중되어 있었고, 섣불리 개입할 경우 오히려 루이 16세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793년 3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면서 스페인도 별다른 도리 없이 전쟁에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은 대체 왜 몰락했는가? | 인스티즈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의 스페인 기병)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스페인군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형편없이 싸우지는 않았다. 구조적인 문제점은 많이 드러났지만, 그거야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 등 다른 동시대 군대들도 다 마찬가지였고,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꽤 볼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마지못해 끌려 들어갔다는 점에서 오는 문제가 컸다. 결국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스페인군은 전략 목표인 페르피냥(Perpignan) 점령에 실패했다. 그리고 반격에 나선 프랑스군이 스페인 영토 일부를 점령하자,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와의 동맹의 문제점


이때부터 정국의 주도권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주도한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넘어갔다. Esdale의 지적대로, 고도이는 후대에 철저히 악마로 낙인찍힌 탓에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참 어려운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직접 남긴 기록들을 바탕으로 판단해 볼 때, 결코 능력이 없는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 현대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바다.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은 대체 왜 몰락했는가? | 인스티즈

(마누엘 데 고도이)


비록 프랑스와의 평화를 이끌어 낸 주역이기는 했지만, 고도이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닌, 잠시 미루어졌을 뿐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18세기 초 펠리페 5세가 그랬듯이, 지금까지 유럽 국가들이 상대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규모의 군대를 보유한 혁명 프랑스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체제 개혁이 필수라고 믿고 이를 추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개혁 추진자로서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그는 자기만의 세력이 전혀 없이, 오로지 왕실의 총애를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그가 정말 왕비의 애인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고, 현재 학자들은 회의적으로 보지만,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치가의 위신에는 치명적이었다.


귀족층 대부분이 적인 상황에서 믿을 것은 오로지 왕의 총애뿐인데, 국왕도 고도이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 왕정의 붕괴를 보면서 혁명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고도이가 제안하는 개혁이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와 혁명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카를로스 4세가 결코 똑똑한 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 두려움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것이, 프랑스 혁명도 정확히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찌되었건, 단순히 총신으로서 권력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개혁가가 되고자 한 순간부터 고도이는 몰락을 향해 달려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주변 상황도 정말 스페인을 도와주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동맹은 곧 영국과의 전쟁을 의미했다. 사실 지금까지 혁명 전쟁에서 스페인은 별반 타격을 입지 않은 편이었다. 피레네 전선은 그냥 교착 상태에 빠졌을 뿐, 스페인 육군이 큰 패배를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1796년, 스페인과 영국 간의 적대 관계가 형성되자, 이제 스페인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로열 네이비를 상대해야 했다. 앞서 말했듯, 이 시기까지 스페인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3위 수준의 막강한 해군력으로도 영국 해군의 봉쇄를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스페인 해군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의 해안선이 너무 길었던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사실 스페인이 흔히 생각하던 것처럼 경제적으로 정체된, 자급자족의 농업 국가였다면 영국 해군의 봉쇄는 큰 영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8세기 내내 스페인은 빠르게 경제가 발달하고 있었다. 특히 선왕 카를로스 3세의 투자 덕분에 스페인의 수출량은 급증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봉쇄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8세기의 전통적인 경쟁 구도는 1위의 해군국인 영국을 2강인 스페인, 프랑스가 함께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필 이때 프랑스 해군이 혁명의 여파로 큰 타격을 입어, 동맹국 스페인을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나중에 트라팔가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해군력의 상당수가 사라져 버렸다. 사실 이 전투에서도 스페인 해군은 명예를 잃지 않고 잘 싸웠고, 넬슨의 영국 해군도 결코 쉽게 이긴 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패배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8세기 내내 스페인 번영의 밑거름이 되었던 기후가 이 중요한 때에 스페인을 배신했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악천후와 홍수와 메뚜기떼가 연달아 스페인을 덮쳤고, 이는 전례 없던 기근을 초래했다. 여기에 18세기 내내 보기 드물었던 전염병의 창궐까지 더해졌다. 1797년까지 꾸준히 증가세이던 인구를 감안했을 때,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결국 카를로스 3세의 정책의 결과로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그간 번영의 그늘 아래 잠복해 있던 균열들이 일시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방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스페인은 온갖 문제가 산적한 나라가 되었다. 나라의 상층부 사이에서는 이미 선왕의 계몽주의 정책을 둘러싸고 분열의 조짐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대프랑스 정책과 연관되면서 엘리트층은 더욱 극심하게 분열했다. 영국의 해상 봉쇄는 아예 뚫을 길이 없었고, 경제는 날로 악화되었다.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상공업자들과 농민의 불만도 치솟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해군력조차 트라팔가의 참패로 인해 모조리 상실했다. 영국 해군에 의해 무역이 봉쇄당한 상황에서 아무리 노력을 한들 군대를 재건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아직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국민들이 들고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더 필요했다. 그 한 방이 바로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이었다.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은 대체 왜 몰락했는가? | 인스티즈


사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이 빌빌댄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이 아메리카의 식민지 덕분에 부가 넘쳐나는 나라라고 믿었고, 절대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스페인은 땅도 넓고 식민지도 있어서 돈이 많을 것이다. 배도 많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수송에 무리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 빌빌대는가? 이는 분명 지도층들이 부패하고 무능해서 그럴 것이다. 그들을 바꿀 양심적이고 유능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은 바로 나 나폴레옹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생각한 스페인의 모습과 실상은 달랐다. 현실은 스페인은 이미 영국에 의해 해상 봉쇄를 당한지 오래 되어 재정이 궁핍했으며, 대부분의 함대도 이미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과 함께 모조리 수장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그럴듯한 논리, 사실은 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바탕으로 세운 계획을 실현에 옮겼다. 그리고...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은 대체 왜 몰락했는가? | 인스티즈


나폴레옹의 계획은 반도 전쟁(Peninsular War)의 발발로 이어졌고, 이후 6년간 이베리아 반도는 그야말로 생지옥이 되었다. 그 시기 내내 스페인의 광대한 제국은 중앙 정부가 실종된 채 각자도생하도록 사실상 방치되었다. 이것은 스페인에게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나오며


즉, 스페인이 글로벌 강대국의 지위에서 확실히 내려온 시점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라고 봐야 한다. 적어도 1780년대 후반 혹은 프랑스 혁명전쟁 발발 직후까지만 해도 스페인은 여전히 강대국이었고,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짧은 시간에 운명의 추는 드라마틱할 정도로 빠르게 돌았다.


그러나 이 몰락을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그것은 역사학이 추구하려는 바와도 맞지 않는다.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스페인이 급속도로 분열하게 된 원인은 사실 번영의 시대이던 카를로스 3세 시대에 상당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전쟁과 그 이후의 전개가 아니었다면, 카를로스 3세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이 적어도 그런 식으로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역사에서 카를로스 3세나 나폴레옹이 했던 것과 비슷한 실수를 범하거나 오판을 내리는 지도자는 차고 넘치며 그 실수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분명 얻어야 할 교훈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긴 시간을 걸치면서 쌓여 온 문제점들과 예측하기 어려운 국제 정세의 흐름, 정말로 인간의 힘으로 통제 불가능한 자연재해라는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런 면을 고려할 때, 우리가 종종 한두 가지 원인을 들면서 매우 쉽게 내리는 "이 나라는 이래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 류의 평가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가 잘 드러난다. 여러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는 과거 사람 한 둘을 가혹하게 단죄하면서 '얘 하나가 문제다'라고 단순한 결론을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한계, 그 원인을 최대한 규명하고 최소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선에서의 실수만은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겸허한 마음으로 노력하는것 뿐이 아닐까 싶다.



<참고 문헌>

1) Frederick C. Schneid (ed.) European Armies of the French Revoution 1789-1802 (Norman, 2015).

2) William S. Maltby, The Rise and Fall of the Spanish Empire (New York, 2009).

3) G. B. Packette, Enlightenment, Governance and Reform in Spain and Its Empire 1759-1808 (Basingstoke, 2008).

4) Charles Esdale, The Peninsular War (London, 2002).

5) Henry Kamen, Philip V of Spain: The King Who Reigned Twice (New Haven, 2001).






로그인 후 댓글을 달아보세요


이런 글은 어떠세요?

전체 HOT댓글없는글
제니 MMA 무대 1000만뷰 돌파
2:59 l 조회 101
우리 밭에 도둑이 들어왔어요
2:55 l 조회 843
금요일 날씨 예보 및 기상 특보 현황
2:54 l 조회 1172
흑백 요리사 2 아쉬운 점
2:51 l 조회 2077
계란을 9만5천원에 파는 손종원
2:46 l 조회 3265
윈터 열애설 여파 체감5
2:44 l 조회 5197 l 추천 2
베트남 여행에서 1인당 하루에 100만원 쓸 생각한 황정민1
2:43 l 조회 2321
쿠팡 개인정보 유출이 미국이었으면 법 위반이 아니다? 팩트체크1
2:41 l 조회 645
배나온 고양이의 절망
2:30 l 조회 1661 l 추천 1
반성 따위 없는 소년교도소 수감자들2
2:29 l 조회 1119
술자리 싫어하는 사람들 특징1
2:28 l 조회 1827 l 추천 2
흑백요리사2 윤남노 흑팀 편파 심사 의혹.twt10
2:26 l 조회 6725 l 추천 1
한국 소비자 개인정보 빼가던 시기에 뒤에서 미국에 한국 팔아 로비한 쿠팡
2:24 l 조회 656
다낭에서 뽕뽑는 집중 공략할 음식은?
2:21 l 조회 829
컬러로 보는 6.25전쟁 당시의 대한민국
2:19 l 조회 1302
한국 요리 예능 매니아들이라면 아는 장면.JPG4
2:16 l 조회 4373 l 추천 1
전남친한테 양파 10kg 보냈어
2:11 l 조회 1311
남자가 관심 없는 여자와 대화할때
2:10 l 조회 1606
고민에 대처하는 자세
2:02 l 조회 606
용기 좀 줄 수 있어?
1:59 l 조회 773


12345678910다음
이슈
일상
연예
드영배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