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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369 출처
이 글은 6년 전 (2019/10/03) 게시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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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시는 아직 아프다 | 인스티즈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 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 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내 시는 아직 아프다 | 인스티즈


문태준, 내가 돌아설 때

 

 

 

내가 당신에게서 돌아설 때가 있었으니

 

무논에 들어가 걸음을 옮기며 되돌아보니

내 발자국 맨 자리 몸을 부풀렸던 흙물이 느리고 느리게

수많은 어깨를 들썩이며 가라앉으며

, 그리하여 다시 중심을 잡는 것이었다

 

이 무거운 속도는

글썽임은 서로에게 사무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내 시는 아직 아프다 | 인스티즈


오명선, 얼음의 시간

 

 

 

과녁을 그리던 수심이 묶여있다

 

수면을 꽉 깨문 구름의 어금니들

밑줄 그어놓은 물의 잔뼈들이 이렇게 견고하다니

 

지금은 얼음의 시간

잔물결이 맨발로 견뎌야 할 저 강은

등 돌린 밤이다

 

톱날로 베어지는 물도 있어

계절은 제 그림자 속에 가둬둔 울음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

 

저것은 침묵의 두께

내 무릎관절이 수천 번을 더 오르내려야 할

미완의 경전이다

 

앙다문 물의 입술

굳어버린 물의 표정은 싸늘하다







 내 시는 아직 아프다 | 인스티즈


강영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당신은 나를 건너고 나는 당신을 건너니

우리는 한 물빛에 닿는다

눈발 날리는 저녁과 검은 강물처럼

젖은 이마에 닿는 일

떠나가는 물결 속으로 여러 번 다녀온다는 말이어서

발자국만 흩어진 나루터처럼

나는 도무지 새벽이 멀기만 하다

당신의 표정이 흰색뿐이라면

슬픔의 감정이 단아해질까

비목어처럼 당신은 저쪽을 바라본다

저쪽이 환하다 결계가 없으니 흰 여백이다

어둠을 사랑한 적 없건만

강둑에 앉아 울고 있는 내가 낯설어질 때

오래된 묵향에서 풀려 나온 듯

강물이 붉은 아가미를 열고

울컥, 물비린내를 쏟아낸다

미늘 하나로

당신은 내 속을 흐르고 나는 당신 속을 흐른다







 내 시는 아직 아프다 | 인스티즈


최규승, 커튼

 

 

 

일몰의 시간

실내등을 켜기 전에

귓속에 물을 붓고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바닷속은 차고 몸은 따뜻해

말도 없이

세상의 온갖 소리를

쏟아붓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가만히 서 있다

 

돌고래의 울음소리를 들은 듯하다

 

세상에 없는 아름다움을

말할 때 나는 아프다

김 한 장에 입술이 베였던 그때

하얀 침대 위에서 나는

아름다움으로 어지러웠다

 

누군가의 안녕을 묻기에

내 시는 아직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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