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기, 연두가 보채다 나무가 마음을 열어 날개를 단다나무는 나이를 먹어도 변함없다때가 되면 마음을 열어 제 길을 펼친다느티나무 아래서는 행복하다나무의 마음에 사로잡힌다고마움 속에 파묻혀 보지 않았으면사랑을 말하지 마라세상의 어느 풀, 어느 나무가기도 없이 제 마음을 열겠는가연두의 보챔, 그것은나무의 마음이 열리는 떨림이다심재휘, 지저귀던 저 새는 가끔씩 내 귓속으로 들어와둥지를 트는 새 한 마리가 있다귀를 빌려준 적이 없는데제 것인 양 깃들어 울고 간다 열흘쯤을 살다가 떠난 자리에는울음의 재들이 수북하기도 해사나운 후회를 가져가라고 나는먼 숲에 귀를 대고한나절 재를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열흘 후는울음 떠난 둥지에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아넓고 넓은 귓속에서 몇 나절을해변에 빌려나온 나뭇가지처럼마르거나 젖으며 살기도 한다 새소리는새가 떠나고 나서야 더 잘 들리고새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나도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김홍신, 기다림 기다림은사금파리 위에맨발로 서 있는 것 기다림 지쳐 움직이면피투성이 되고 마냥 서 있으면살점이 녹는 통증 그래도그리움은 내 생존의 가치통곡의 벽에 기대어눈물로 그리운 이를 부른다김상원, 나이테 골목 아이들의 병정놀이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밤꽃 흐드러진 달밤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소낙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는 더구나 안 되는 것이다청춘 같은 꽃만으로도 안 되고 손 시리고 가슴 저린대지의 저 하얀 침묵이 나이테를 만드는 것이다눈물이 여문 것이다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품삯을 못 받는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