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328년 원나라 말기 심한 기근에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는 막장 상태의
사회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이름 중팔. 소작농인 부모와
농사일, 목동일을 하면서 지독한 가난을 겪음
유년기, 끼니도 제대로 못 먹는 상태에서 천연두까지 걸렸으나 이겨내고 살아남
얼굴이 곰보로 모두 얽어버림.
10대 초반, 지주의 소를 치던 중 너무 배가 고파 친구들과 송아지 한마리를 잡아먹음.
자신이 대표로 몽둥이로 개맞듯이 맞음.
17세, 심한 가뭄과 전염병으로 부모, 형 전원 사망. 마지막까지 막내 중팔과 함께
살아남았던 중팔의 형은 13알의 마지막 볍씨로 풀죽을 쑤어 중팔에게 주었고
형 자신은 배를 곪다가 사망.
재산이 없어 부모와 형의 묘를 세울 땅도 없었고 유계조라는 사람에게 땅을 빌어
귀퉁이의 땅을 얻음. 찢어진 옷 몇벌을 겨우 구해 시신을 덮고
손수 부모와 형의 시신을 매장하고 장례를 치룸.
17세 이후, 절에 가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머리를 밀고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감. 절에서 마당을 쓸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고 죽을 얻어먹음. 그곳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고 서적을 읽음.
절이 어려워지자, 탁발승(당시에는 거렁뱅이 취급)을 하며 전국을 4년동안 떠돌아다님.
민심이 흉흉하던 때라 바가지로 물을 맞거나 침을 맞는 수모를 당하기도 함.
24세, 곽자흥의 홍건군 휘하에 말단 병졸로 들어가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 2인자의 자리까지 오름.
처음 홍건군에 투신하였을 때, 외모 때문에(...) 첩자로 의심받아 포박 당하여 끌려갔으나
곽자흥이 그의 담력과 총명함을 알아보고 천거함.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당시 기준으로 늦은 나이에 결혼.
27세, 곽자흥이 죽자 곽자흥이 이끌던 홍건군 군단의 지도자로 추대됨
28세, 남경 점령. 남부의 대 군벌 중 하나로 부상
35세, 최대의 라이벌 진우량을 파양호 대전에서 격파
36세, 진우량의 세력을 모두 흡수하고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오름.
39세, 또 다른 군벌 장사성을 격파하고 남부 패권 장악
40세, 25만의 대군으로 북벌 단행, 원나라 잔존 세력과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고
베이징 (대도) 점령.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만리장성 이북으로 몰아내고 명(明) 건국.
그 이름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
중국 역사상 평민으로부터 시작해서 황제가 된 인물들은 있지만,
대부분 젊은시절에도 세력을 키울만한 기본적인 밑천은 가지고 있었다.
평민에서 황제가 되었다는 한 고조 유방조차도 말단이나마 관직이 있었고,
장인이 지역 유지였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징기스칸과 누르하치는 젊은 시절 고생을 겪었지만 유목세계에서 귀한 혈통을 이었으며
둘 다 부족장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가난한 천민에 가까운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홍건적에 투신하기 전까지는 세력도 배경도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가 된 이후, 부모의 묘자리를 내어준 유계조에게 엄청난 포상을 내렸으며
절에서 있던 시절, 가장 힘들었던 일이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에 있는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편하도록 반드시 한 발을 들게 만들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이러한 출신 성분과 이후의 치적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개국 공신들을 쥐 잡듯이 족쳤기 때문이다.
백성들에겐 명군인데 신하들에겐 폭군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신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의 권력 한계상 백성과 신하 둘 중 하나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데,
신하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태평성대라고 봤기 때문이다.
또한 엄청난 워커홀릭으로 유명했다. 그 자신부터 관리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신념을 유지했는데, 이것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그 자신조차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엄청난 양의 업무를 소화했다.
태어날 때부터 황실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란 그 아들들이나 손자부터는
생전 주원장의 그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보조하는 신하를 두기 시작했고
이것이 사실상의 승상제도처럼 변해버렸다.
그런데도 주원장은 죽을 때까지 승상을 두지 않고 본인이 업무를 맡았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얼마나 업무를 처리하는지 계산을 해봤는데
8일 동안 3,391건의 문서를 처리했다고 한다. 대략 하루에 처리한 것이 400건이 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라서 누가 글자는 1만 5천자나 되는데 내용은 쥐뿔도 없고 쓸데없는 문서를 올렸다.
주원장은 노발대발하며 그를 숙청해버렸다.
건국군주임에도 후비를 많이 들이지 않은 군주로도 유명한 주원장은,
당시 황후와의 의리를 지킨 점 때문에도 당시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주원장은 자신이 쥐뿔도 없던 시절부터 뒷바라지를 해 주던 마 황후가 사망하자
그녀의 죽음을 매우 비통해 하였으며, 약 일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며
마 황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 후비를 들이지도 않았으며 일에 몰두했다.
숙청과 후계 구도 실책으로 후대 신하들에게도 엄청나게 부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대 백성들에게는 영웅으로 추앙받던 황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