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에 띄어쓰기가 적용된 것은 불과 120여 년 전의 일이다.
띄어쓰기가 없는 훈민정음 언해본.
한글에 본격적인 띄어쓰기가 도입된 것은 1886년 발행된 "독립신문:을 통해서다.
독립신문과 함께, 띄어쓰기를 본격적으로 보급에 앞선 분이 계셨으니,
바로.....
이 분.
놀랍게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당시, 미국선교사로 조선에 있었던, "호머힐버트"
대한민국의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분의 업적을 몇가지 알아보면,
※조선의 관료들및 그들의 자식들에게 처음 영어교육을 실시(이때 영어에 흥미를 못갖고 겉으로만 돌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완용이다.)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1905년에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한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 개화기 - 일제 강점기 - 해방을 모두 눈으로 지켜봤던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였다. 저서로는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와 ≪한국사(History of Korea)≫,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연구(Comparatives Grammer of Korean and Dravidian, A Search for the Siverian Klondike)≫, ≪대동기년≫ 등이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호머 헐버트의 유언.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었으나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한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만에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헐버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한가운데가 비어 있던 묘비는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동년 8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넣었다.
사후 195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대상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다시 2014년, 한글날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금관 문화 훈장을 추서받았다.
비방이 극에 달하고 정의가 빛을 잃은 이 때에
나의 큰 존경의 표시와 변함 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옛 한국이 낯선 한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나
민족 정신이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죽음의 모습을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호머 헐버트,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의 헌사, 19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