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문종이 세자시절의 일화들을 보면 이와 같다.
1. 성삼문이 야근할때 일화
현묘(顯廟 문종대왕)가 오래도록 세자[承萃]로 있을 때, 춘추가 점점 높아가면서 학문에 빠져 낮과 밤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달이 밝고 인적이 고요할 때 혹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 숙직실에 가서 그들과 어려운 것을 물었다. 그때 성삼문(成三門) 등이 숙직을 하면서 갓과 띠를 밤에도 감히 풀어놓지 못하였다. 하루는 야반이 될 무렵에 세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옷을 벗고 누우려 하는데, 홀연히 문밖에 신발소리가 들리더니 근보(謹甫 성삼문의 자(字))를 부르며 들어오므로 성삼문이 놀라 일어나 얼떨결에 맞아 절을 하였다. 이때 임금의 부자(夫子 공자)의 학문에 부지런함과 선비를 독실히 좋아함이 진실로 천고에 듣기 드문 일이었다.『용천담적기』 中
되게 무서운 상황임
2. 세자가 군사들에게 체력테스트를 함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5월 25일 무술 2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세자가 시험에 능한 군사 8인에게 환도를 주고, 연희궁에 문안하다
세자가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총통군(銃筒軍)을 시험하고자 하여 보갑사(步甲士)·근장(近仗)·방패(防牌)·육십(六十) 및 자모인(自募人)(지원병) 으로 하여금 3백 보(步)를 달리게 하고, 또 낭사(囊沙)(모래주머니) 1백 50근을 들고 50보를 가게 하여, 능한 자 여덟 사람에게 각각 환도(環刀)를 주고, 드디어 연희궁에 가서 문안하였다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6월 3일 을사 2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세자가 광화문에 나가 갑사·방패 등 무인을 시험하다
세자가 광화문에 나가서 갑사(甲士)·방패(防牌)·근장(近仗) 등 3백 60여 인으로 하여금 2백 50보를 달리고, 또 두 손으로 각각 낭사(囊沙) 50근을 가지고 1백 보를 행하게 하니, 총통군(銃筒軍)을 시험하고자 함이었다
세종 27년이면 세자(훗날 문종)의 나이가 32세
일단 완전군장+ 모래주머니 150근이라니...
심지어 걷는것도 아니고 달리게 했다고 하니 군생활에서 단독군장으로 구보해본적 있는 기억이 있는데 90kg이라니
왜 이런걸까 찾아보니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111
세종대 4군(郡) 6진(鎭)의 개척이 시작되면서 압록강 이북에 살던 야인(野人) 정벌에 효과적이었던 화기의 사용도 늘어났다. 변경에서의 화기 수요가 증가하면서 화기 관련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1445년(세종 27) 3월에는 과거에 사용하던 구식 화기를 전면적으로 다시 고쳐서 주조하는 데 성공하여 새 화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화약 증산과 제조 기술의 비밀 보장을 위하여 대궐 내에 화약 생산을 전담하는 사표국[司石+豹局]을 설치하였다. 총통위는 이러한 화기 발전책의 일환으로, 기존의 화기 발사를 전담하던 별군의 부실화를 보완하기 위해 신설된 부대였다.
신장을 따지지 않고 30세 이하의 장정 중에 달리기 능력과 힘쓰는 능력이 좋은 자를 시험 보아 2,400명을 선발하였다. 800명씩 6개월마다 3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달마다 쌀[俸米]을 급여로 주었다. 별군의 예에 따라 그들이 근무하는 동안 집안일을 돌보고 보조해줄 인력인 봉족(奉足)을 지급하였고, 당번 때에는 잡역을 감면해 주었다.
라고 해서 화기를 전문으로 사용하는 특수부대인 모양인데 달리기 능력+ 힘쓰는 능력 기준으로 뽑았고
여러 혜택이 있는만큼 세자가 체력테스트를 친히 하신듯.
문관, 무관들에게 있어서는
주상전하도 빡센 직장상사인데 2인자인 세자저하 또한 문무겸비에 화기덕후기질까지 있으시기에 노동강도는 상당했을듯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