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안다. 맑고도 우스웠던 우리의 첫키스와 그 겨울밤을 떠올리던 또 다른 밤도 나는 다 안다. 너와 다른 우주에서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뿐이니까.
기억이 나의 미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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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아직 세상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건 아니고, 그건 힘들고, 그건 말이 안되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대부분의 문장이 그렇게 시작되거나 끝났다.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미 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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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화가 났어. 내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이 널 괴롭게 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 내 마음이 널 괴롭게 했다. 처음 뿐 아니라 우리가 함께한 지난 날 모두,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이 널 괴롭혔고, 괴롭히고 있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다른 이들도 그러할까. 죽어서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담아.
이 멍청아.
이젠 됐어. 넌 다 했어. 이 장례를 끝내야지. 끝내고 살아야지. 아주 오래 살아야지.
너도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네가 여기 있어야 나도 여기 있어.
밖을 봐. 네가 밖을 봐야 나도 밖을 본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살아.
담아.
이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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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희망은 거기에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꼭 담에게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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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구의 증명’ -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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