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허씨는 김수로왕의 부인(허황옥 왕비 -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을 시조로, 허씨를 성으로 삼은 ‘김해 허씨’에서 출발한다.
이 김해 허씨 가운데 신라말 공암 촌주(공암은 현재 양화대교 남단 부근에 중심을 둔 지역이다)로 허선문이라는 호족이 있었다.
허선문은 후삼국기에 왕건과 견훤이 한강 유역 패권을 놓고 격돌할 때 왕건측을 지원해 군사력과 군량미를 제공한 공으로 개국 공신 반열에 오르면서 공암을 본관으로 하사받고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영구히 확보하게 되며 공암이 양천으로 지명을 바꾸면서 양천을 본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 때 왕건은 공암 허씨 일파에 준왕족의 지위를 보장해 ‘대를 걸러’ 외자를 쓸 수 있도록 했다.
고려시대까지 외자 이름은 왕족에 사용되던 관행이었는데 양천 허씨들은 김수로왕 이후부터 줄곧 왕족이었음을 주장하며 대를 걸러라는 왕건의 규정을 무시하고 ‘대대로’ 외자를 사용했다.
농구선수 허재의 본관도 양천으로 이 집안은 전통적으로 이름에 외자를 쓰고 있다.
양천 허씨들의 외자 이름에 대한 집착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에 두 글자를 쓰는 사람도 대개는 족보를 위해 외자 이름을 따로 갖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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