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고 나이 들고 산책하는 돼지가 보낸 5년의 기록
차갑게 내려앉은 아침 공기를 뚫고 구부러진 산길을 한참 달린다. 지난밤 내린 비로 질퍽해진 흙 위에 자동차 바퀴만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사람이 없는 무성한 수풀을 향하는 것 같지만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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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생추어리는 2020년 국내에 만들어진 최초의 생추어리다. 5년이 지난 지금 새벽이는 200㎏에 육박하는 크고, 민첩하고, 열무와 머위를 싫어하고, 호박과 고구마를 좋아하는 돼지로 성장했다.
2021년 새벽이생추어리에 입주한 잔디는 의약업체의 실험동물이었다. 생추어리에서 처음으로 흙을 밟아본 잔디는 당시의 조심스러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산속을 몇 시간씩 산책하는 것이 취미가 됐다. ⓒ시사IN 이명익
차갑게 내려앉은 아침 공기를 뚫고 구부러진 산길을 한참 달린다. 지난밤 내린 비로 질퍽해진 흙 위에 자동차 바퀴만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사람이 없는 무성한 수풀을 향하는 것 같지만 목적지는 따로 있다. 차가 도착한 곳은 산중턱에 위치한, 그믐달 모양을 한 1940㎡(약 580평)의 ‘새벽이생추어리’다. 생후 6개월이 되면 돼지를 도축하는 축산의 관습과 달리 이곳에는 여섯 살이 된 돼지 ‘새벽’과 다섯 살 ‘잔디’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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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추어리(Sanctuary·표준 표기는 ‘생크추어리’)는 보금자리, 안식처를 뜻한다. 새벽이생추어리는 2020년 국내에 만들어진 최초의 생추어리다. 2019년 어린 돼지 새벽이는 돼지농장에서 공개 구조됐다. 어리고 작은 몸이었지만 이미 사람의 용도에 맞게 몸이 손상되어 있었다. 집단 사육에 따른 스트레스로 돼지들은 서로 꼬리 물기를 하며 상처를 낼 수 있다. 그래서 농장에서는 자돈(새끼 돼지)의 꼬리를 마취 없이 자른다. 웅취(수퇘지 특유의 냄새)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거세를 하기도 한다. 새벽이 몸에는 이러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몸이 작을 때는 활동가의 집에서 머물 수 있었지만 루팅(rooting·먹이를 찾거나 흙냄새를 맡기 위해 코로 땅을 파거나 헤집는 행동)을 시작하고 호기심이 많아지면서 ‘돼지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흙과 풀이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해졌다. 산업 동물로 분류되는 새벽이가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바라며 시민들은 모금을 시작했고, 정성과 응원이 모였다. 그렇게 한국에는 그간 존재하지 않았던 최초의 ‘동물의 집’, 생추어리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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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를 돌보는 활동가들은 그가 장난기 넘치던 어린 시기를 지나 무던하고 관조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나이 들어가는 돼지의 변화를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생추어리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시사IN 이명익
이러한 돌봄의 기쁨과 슬픔이 담긴, 땀내 나는 경험들과 치열한 고민을 엮은 새벽이생추어리 기록집 돌봄이 널뛰는 자리〉가 아름다운재단 지원사업을 통해 최근 출간됐다. 고기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국내 제1호 생추어리에서 나이 들어가는 돼지를 돌보는 이들의 이야기다.
저자들은 성공적인 돌봄의 노하우와 자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에 있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담겼다. 생추어리로 불리지만, 여전히 좁은 공간 안에서 생활하는 동물들을 보며 상념에 잠긴다. “감금 돌봄이라는 선택지밖에 없다는 것 앞에서 새벽이 느낄 고립감이 늘 어깨에 짐처럼 따라다닌다.” 동물들이 느낄 고립감을 상상하는 건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화해할 친구나 동료도, 사랑을 나눌 짝꿍도, 어려움을 의논하며 함께 헤쳐 나갈 가족도 없다.” 활동가들은 “유일하게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자주 상상한다. 그들은 생추어리 운동이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다 같이 채식을 하자는 선언이 아닌 “무력해지지 않고, 계속 고민하며, 거주 동물을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보금자리 선언문)”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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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과는 무엇이 다를까? 그곳도 동물들의 ‘집’ 아닌가? 우선 생추어리는 방문객에게 동물을 전시(관람)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지 않는다. 세계동물생추어리연맹(GFAS)의 ‘투어 및 방문 정책’에 따르면, 교육 목적으로 생추어리 투어를 진행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도 소규모로,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방문객들은 동물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생추어리의 동물들에겐 원하지 않을 경우 방문객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내실’에서 쉬거나 몸을 숨길 수 있는 선택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2025년 11월8일, 곰보금자리프로젝트, 동물해방물결, 새벽이생추어리 등이 주관한 ‘2025 생추어리를 생각하는 포럼’에 시민 100여 명이 참여했다. ⓒ동물해방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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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사람을 초대하는 ‘취약한 돌봄’
그러나 생추어리들은 지속적으로 ‘혐오자’들의 공격과 협박에 노출되기도 한다. 특히, 새벽이생추어리는 가장 빈번히 공격에 노출된다.
2025년 12월14일, 서울 마포구에서 새벽이생추어리 기록집 출간을 기념하는 첫 북토크가 열렸다. 북토크를 진행하던 활동가 혜리는 새벽이생추어리가 원래 터를 잡고 있던 수도권에서 2023년 12월 전라도로 이사한 이유를 설명했다. 지속적으로 이어진 혐오자의 협박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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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생추어리는 연대자들의 도움이 절실함에도 보안을 위해 위치를 은폐해야 한다. 활동가들 역시 개인정보를 숨겨야 한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존재를 더 많이 알리려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돼지의 이미지로 새벽이와 잔디를 포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자 한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매일의 고민을 딛고 “무너질 듯 삐걱거리면서도” 새벽이생추어리는 운영된다. ‘저렴한 고기로만 간주되는 존재’가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생추어리는 어떤 이들에게 혐오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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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수많은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긴 하다. 어떤 사람들은 ‘거주 동물의 자율성과 의지가 완벽하게 존중되는 제대로 된 돌봄’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다른 쪽에서는 ‘축산업을 철폐하고 모든 사람에게 채식을 강요하는 것이냐’고 비난한다. 시옷은 이렇게 답변한다. “새벽이생추어리는 누군가에게 채식을 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새벽이 고기가 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는데, 그 불편함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불편함은 오히려 우리 사회가 만든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완전하고 무결한 돌봄을 하고 있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시옷이 이 기록집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더 많은 이들을 이 ‘취약한 돌봄’에 연결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돌봄 과정의 어려움을 진실하게 말하고, 독자들에게 함께 고민해보자고 말 걸고, 그들을 이 상황에 연결시키고 싶었다. 이 상황을 알게 되었으니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같이 머리를 맞대보자는 것이다. 이 기록집에서 우리가 담은 이야기는 이렇다. ‘맞아, 아직도 잘 모르겠어. 이런 게 너무 고민돼. 아직도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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