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터부를 깨뜨리며 피어나는 여성성, <가인 - 피어나>
*<피어나> 속에 숨어있는 성적 은유들
가인의 [피어나]는 뮤직비디오 때문에 이미 한 차례 선정성 논란을 치뤘지만, 사실은 영상이 없는 상태에서 들어도 곡 자체가 굉장히 많은 성적 은유들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그래서 개인적으론 가사의 내용상 영상의 수위는 당연히 그 정도 선이 적절했다고 생각).그런 면에서 '음악 그 이상의 대중음악 2009'에서 다뤘던 서태지의 [Bermuda]와 여러모로 닮아있는 곡이기도 한데, 그렇기 때문에 양쪽에 숨겨진 메타포들을 비교해가며 감상해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될 수 있겠다.어쨌든 성적 경험을 통해 여성으로서 만개하는 모습에 대한 은유가 '피어나다'라면, 벌스 1은 아직 '피어나기 전' 상황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¹나 말이야 못다 핀 꽃 한 송이야
그런 날 피워낸 sunshine
매끄러운 motion
²chemical blue ocean
³이렇게 좋을 건 뭐니
날 갖고 뭘 했던 거니
나른했던 그 늦은 밤
반짝 눈을 뜬 건
단 한 번의 kiss
¹에서 아직 화자는 스스로를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지칭하고 있는데, 여기에 '매끄러운 동작'이 가해져 화학 작용이 발생하고 있다.여기서 사랑과 섹스를 물리 작용보다 화학 작용에 가깝게 본다면 ²의 의미는 분명해진다.화자는 아직 화학적으로 블루 오션 상태이며 이는 버지니티(virginity)에 대한 우회적 표현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후의 태도이다.³'정신 없고 나른한 와중에도' '좋다'는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는 데서 이 곡의 화자는 고착화된 기존 여성들의 태도를 슬쩍 빗겨가고 있는 것이다.
¹speak up speak up speak up speak
speak up speak up speak
you can make me ²high
you can make me fly
자꾸 보고싶어서 듣고 싶어서
갖고 싶은 너의 모든 그 ah ah ah
you're my wonderland
you're my whole new world
³별이 쏟아지던
너의 언덕에서
우리 둘이서 ah ah ah
사비에서도 화자의 태도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¹의 'speak up'은 '목소리를 높이다'와 '거리낌 없이 말하다'의 두 자기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전자를 따를 경우 '화자의 교성', 후자를 따를 경우 '거침없는 성 담론'이라는 가사의 중의성이 발생한다.다소 간의 의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느 쪽을 채택하든 기존의 수동적인 여성상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게 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²에서도 역시 흥미로운 단어 선택이 이어지고 있는데, 'high'는 은어로 '(마약, 성적 흥분 등으로 인해) 황홀경에 빠져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표현이다.결국 정리하자면 'speak up'부터 시작되는 사비 구간이 통째로 섹스의 순간을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여기서 [Bermuda] 때의 해석법을 비슷하게 적용하면 ³을 '남성 성기와 사정'으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사회적 터부와 가짜 오르가즘, 그리고 성적 판타지
벌스 2에서의 화자는 여러모로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여성성이 만개하는 동시에 사회적 터부와의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¹now I am 니 손에 핀 한 송이야
깨어나버린 my neuron
어떡하지 나 이런
건 정말 첨이야
²시선 따윈 알게 뭐니
수군대는 쟨 또 뭐니
³넌 내가 선택한 우주
안아줄래 would you
니 안에 숨게
⁴좋을까 뭘까 좋을까 넌
fake한 걸까 넌
¹에서 화자는 이제 '피어난 한 송이 꽃'이 되어있다.벌스 1과 댓구를 이루는 지점에서 '화학적 블루 오션'이 '깨어나버린 뉴런(신경 세포의 화학적 활성화)'으로 대체된 것도 눈여겨볼 만한 변화라 할 수 있겠으며, 이때 ²삐딱한 사회적 시선(성을 터부시하는 관습적 시선)에 대한 저항이 당연한 수순처럼 발생하고 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화자가 이를 ³'자신의 능동적 선택'이라 표명한다는 데 있고, 그런 의미에서 벌스 2는 마침내 성에 대한 여성의 주체성이 본격적으로 주장되고 있는 지점이라 볼 수 있겠다.
⁴에는 페이크 오르가즘에 대한 직접적인 암시가 드러나 있어 흥미롭다.이것은 이미 성에 눈을 뜨고 나서야 품을 수 있는 의문으로, 요컨대 [피어나]의 화자는 곡이 진행됨에 따라 점진적인 심경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you're the magic oh
you're the wonderland
자꾸 너를 부르다 잠들었던
별이 쏟아지던 아름다운 그 ah ah ah
¹I love you
it's the love
²그저 꿈이었던
너의 환상들을 내게 말해줘 ah ah ah
이렇게 좋을 건 뭐니
날 갖고 뭘했던 거니
나른해지는 오늘 밤
난 다시 피어나
oh 나랑만 Kiss
곡의 말미에서 화자는 어쨌든 이 모든 과정을 ¹'사랑'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사실상 이 대목이 [피어나]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제시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 '섹스는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다'라는 이 선언이야말로 성(性)을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면서도 한 편으로 억누르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문제 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이러한 태도를 그대로 가져간다면 ²가 암시하는 '성적 판타지' 역시 더 이상 숨겨야만 하는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진화하는 대중문화의 여성성과 알파걸 패러다임의 변화
한국 대중문화의 취약점 가운데 하나는 뿌리 깊은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섹스 코드에 대한 표현이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케이블이나 인터넷 방송 등이 이 틀을 깨뜨리는 새로운 채널 역할을 하고 있고, 이에 발맞춰 대중음악의 여성 캐릭터들도 어느 정도 진화 과정을 거치는 중이라 볼 수 있겠다.
한편 기존의 수동적이고 '여성스러운' 여자들에 대한 반감으로 한동안 유행했던 대중음악 씬의 캐릭터가 투애니원, 포미닛 등으로 대변되는 '알파걸'이다.그런데 알파걸은 자신들의 능동성을 주장하기 위해 여성성을 죽이고 남성성을 차용하는('난 강한 여자이므로 남자 따위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식의) 아이러니를 범해왔다.혼자 클럽에 가서 춤을 추고 남자들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성, 즉 본능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결국 이들은 '남자처럼 행동하는 여자'였을 뿐 '여자처럼 행동하는 여자'로서는 주체성을 주장하기 위한 당위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겠다.
가인의 [피어나]는 얼핏 보면 일차원적인 러브송으로 읽힐 수도 있는 곡이지만, 높은 수위의 뮤직비디오가 함께 따라붙음으로써 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기폭제 역할을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일단 이렇게 뮤직비디오→곡 순으로 거슬러 올라오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앨범의 타이틀이다.[피어나]가 수록된 가인 미니앨범의 제목은 'Talk about S'인데, 여기서의 'S'는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열린 키워드로 보는 게 합당할 것 같다(실제로 모든 수록곡들이 하나의 주제로 정확하게 맞물리지도 않는다).그러나 그 열린 해석 중 하나로 'S'를 'Sex'의 줄임말로 본다면 [피어나]와의 유기성은 명확해진다.'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여성', -이는 위에서 언급한 진화 중인 대중문화 내의 섹스 코드를 반영하는 결과물이자 남성성에 의존했던 기존 알파걸들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터부를 깨뜨리며 피어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여성성'의 등장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긁어오고 보니까 뮤비가 19금이라 제목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