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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3010 출처
이 글은 13년 전 (2013/2/21) 게시물이에요

인현입니다.

다들 안녕하시죠?

오늘.. 조선 시대 왕자와 왕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뭐..아실테지만 워낙 많은 양이다 보니 계속 업데이트 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를 지을까 합니다.

 

지루해 마시고 따라와보세요!!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고려사절요

              선원계보기략

              전주이씨파종회 기록

              부마, 대군,군 부인 해당 종친회

              목은집(이색(李穡)의 시문집)

              승정원일기

              

제 1 대 태조 고황제의 자녀들

 

적 1 남 진안대군 이방우 1354~1393

 

 

조선 태조고황제 이성계의 자녀들 이야기 | 인스티즈

용의눈물 진안대군

 

 

신의고황후 한씨의 소생입니다. 사실 태조 고황제가 조선을 건국했을때에 당연히 아버지를 이어 세자 자리에 올랐어야할 인물입니다.

 

진안대군이 세자위에 올랐다면.. 왕자의 난은 아마 역사에 없는일이 됐을까요?

정안대군 이방원 태종이.......포기 했을까요??

 

진안대군의 일생을 보자면 아우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서로 싸우고 죽일때 고향 함흥에서 술과 함께 인생을 즐긴 인물입니다.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말입니다.

이성계는 조상의 제사를 진안대군에게 맡기는데 당연한 일이 겠죠? 세자는 아닐지언정 장남이고 장손이니,,

 

진안대군의 죽음에 대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술을 벗으로 삼아 남은 일생을 누리다가 술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태조2년(1393 ) 12월 21일 실록 기사를 보면 방우의 관을 만들때 관이 작아 시신이 들어 가지 않은 일로 여러 사람 곤욕을 치뤘죠.

이를 통해 진안대군의 풍채를 짐작할수 있을듯 합니다.

 

일반 관의 크기로는 들어가지 않았음은  조선 역대 왕들의 풍채가 일반인에 비해 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거 같습니다.

부인은 충주 지씨 윤의 딸이고 지윤은 정종의 후궁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적 2 남 정종(영안대군) 이방과 1354~1393

 

 

조선 태조고황제 이성계의 자녀들 이야기 | 인스티즈

용의눈물 정종(세자 위가 결정되자 격하게 거부 하는모습)

신의고황후 한씨의 소생입니다.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고 참 사는게 고달파 지신 임금이져.

아버지를 도왔을 망정 왕위에는 관심이 없던 인물입니다..

진짜 진짜로 왕위는 싫었을까요?

태조 7년 무인년(1398)   8월26일 실록을 보면 영안대군과 정안대군이 서로 왕위를 양보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정안대군(태종)이 영안대군(방과)에게 왕위를 적극 권하자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의 공로가 큰데 세자에 어지 오를수 있냐고 하자

이방원은 적장자가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함을 한 차례 권하자 냉큼 수락합니다.

 

왕위에 욕심이 없었을까 생각은 해보지만 무서운 동생 방원 앞에서 그 욕심을 들어 낼수 없었을 수도~

 

1차 왕자의 난에서 괴로움을 토로 하던 정종에게 또 한번 형제의 난이 일어납니다.

바로 제 2차 왕자의 난인데..셋째 형인 이방과 회안대군 입니다.

 

정종은 태종 이방원을 박살 내겠다고 동생인 방간이 날뛰자 엄히 꾸짖습니다.

실록을 보면

 

조금 뒤에 방간이 그 휘하 상장군(上將軍) 오용권(吳用權)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방간에게 가서 타이르기를,
“네가 난언(亂言)을 혹(惑)하여 듣고 동기(同氣)를 해치고자 꾀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오면, 내가 장차 보전하겠다.”
하니

“정안(靖安)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

이에 정종은 격노 합니다. 착한 형이 진짜 열 받아서 분노를 토하져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라며 뒷목 잡고...

 

저 소같은 위인 ㅋㅋ 화난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 합니다. ㅋㅋ

환장 할 노릇이져. 만날 싸움질이니

하지만 친 동생이니 어쩝니까?

 

정종은 방원을 조르고 타이르고 윽박만 지르지 못했지. 중전인 정안왕후와 함께 동생 내외를 설득하고 설득합니다

 

이방원도 친 형을 죽이는일이 탐탁지는 않았던지 유배 보내줍니다.

편안하게 지내고 유배지에서 재혼도 하고 말입니다. 대역죄로 유배를 간 죄인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져..

 

이렇게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정종은 드뎌! 이방원에게 세자 자리를 줍니다.

이미 예약 된 일이기도 했지만..

 

이방원을 세자로 삼던 날 정종은 이런말을 합니다

"아아!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자식노릇하기도 또한 어렵다."

아버지 태조와 동생 태종 , 동생 방간 사이에  샌드위치로 낑겨서 스트뤠~스 만땅이었다고 하소연 하기도 합니다.ㅋㅋ

 

정종은 세종 1년 그 수 를 다하여 승하합니다. 정안왕후 김씨가 소생을 두지 못한 까닭에 적장자는 없었으며, 후궁 소생만 수 십명에 이릅니다.

정종은 왕위에 있었지만 묘호도 올리지않은채 방치 하다가 숙종년에 이르러 정종이란 묘호를 받게 됩니다.

 

적 3 남 익안대군 이방의 1360 ~ 1404 

 

 

조선 태조고황제 이성계의 자녀들 이야기 | 인스티즈

용의눈물 익안대군

 

익안대군의 졸기에는 성격이 온화하고 정치를 말하기 꺼렸고, 손님의 대접에 후한 성품이었다고합니다

 

아버지인  태조고황제가 1392년 왕위에 오를 때 대군의 공이 높아 개국 1등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익안대군이 병마와 씨름중일때 태종 이방원이 형의 문안을 자주 가서 붙들고 우는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익안대군은 후하고 예의있는 인물이었으나, 아들인 이석근이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실록의 기사를 보면 이석근이 졸기 기사를 보면 "체모(體貌)는 작고, 성품은 어리석고 정직하며, 다른 재능(才能)은 없었다. 다만 술만 좋아하여, 그 때 사람들이 복인(福人)이라고 불렀다. "

 

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익안대군의 손자들때문에 무덤에 누워도 편하지 못했으니. 적손인 이인등 친 손자들이  궁녀를 사가로 불러 희롱한 일로 익안대군의부인 최씨까지 곤욕을 치르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 당시가 세종대왕 시기인데..

세종대왕께서 그래도.. 그래도 지친(가까운 친척)인데? 라며 끝까지 보호합니다. 큰 어머니인 익안대군부인 최씨까지 죄를 주라는 통에 몇날 몇일 달달 볶입니다.

 

세종대왕과는 친 5촌 조카가 되니.. 당시 신하들은 익안대군의 손자들을 죽이라고 거품을 물고 덤벼들었으나..

"별일도 아니구만,, 왜들 난리야? "라고 합니다.  

이에 신하들은" 별....별...별일 아니..아니구만???? "거품을 물고 뒷목 잡고 쓰러지져 ㅋㅋ

 

그럼에도 태조의 자손을 끊을 수 없다며 평안도 여연(閭延)으로 귀양을 보내고 직첩을 회수 하는걸로 마무리 합니다.

 

일생을 아버지가 세운 조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후손들의 작태는 한숨 나오게 합니다.

무덤에 누워서도 저 위 익안대군 역할을 하신분의 표정이었지 싶습니다.

 

 

 

적 4 남 회안대군 이방간 1360 ~ 1404 

 

 

조선 태조고황제 이성계의 자녀들 이야기 | 인스티즈

 

동생인 태종의 세자 등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형제의 우정으로 살아난 왕자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이바지 했다. 제 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 이방원은 이복동생 이방번을 살리고자 했으나, 회안대군등에 의해 살해 되었다.

 

제 2차 왕자의난에서는 바로 회안대군 이방간이 동생 태종의 세자 등극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형제들은 방간을 살리려 무진 애를 씁니다.

 

“정안(靖安)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

이에 정종은 격노 합니다. 착한 형이 진짜 열 받아서 분노를 토하져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라며 뒷목 잡고...

 

반란이 있었지만 형제들의 각별한 우애로 귀양으로 마무리 되는데

그곳 유배지에서 재혼까지 하는 지경이었으니

병나면 의원 보내.. 사시사철 의식주 해결해줘... 유배간 죄인이 재혼을 해도 용서해..

 

반란은 3족을 멸하던 시기 죄 더 주라고 난리인데 ...회안대군에게 의식주 보내고.. 회안대군 자식들에게 의식주 내리고.. 

대군의 아들 딸들에게 군호와 옹주호를 내리질 않나..

회안대군 딸 혼례에는 혼수도 내려줘..

 

대신들은 태종에서 세종대까지 회안대군을 더욱 죄줄것을(사사) 청하나..들은 척도 안합니다.

 

회안대군 사고 쳐 놓고 말 타고 강가를 노닐며  재혼하고..유랑을 하며,.,,

세종 3년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 합니다.

형제들 잘 둔 덕에 멸년을 편히 보냈습니다.

 

 

 

 

적 5 남 태종(정안대군) 이방원 1360 ~ 1404 

 

조선 태조고황제 이성계의 자녀들 이야기 | 인스티즈

용의눈물 태종

 

태종 이방원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분이 없겠져? 위 사진속 위엄 당당하신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와 황후 한씨에게서 태어난 5째 아들이고 , 형제 중에 제일 문무를 겸비한 아들이었습니다

 

此亦何如彼亦何如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아십니까? 하여가 초등학교때 위 시조를 외웠던 생각이 나는데, 바로 포은 정몽주를 포섭하기 위해 전했던 시조입니다.

하지만 보낸 뜻과 다른 정몽주의 님을 향한 충성의 시조가 돌아왔을때 정몽주를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정몽주가 죽은 자리가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선죽교 입니다. 잘 아시져?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일로 아버지 이성계에게 굉장한 꾸중을 당하게 되는데...정몽주가 죽은일을 계기로 이성계의 건국은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황후 한씨 소생들을 쭉 보면 이성계의 건국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알수있습니다.

 

하지만 장성한 아들들에게 아버지 이성계는 뒷통수를 치게 됩니다.  슬픈 일이죠?

이일이 후에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는데 바로 황후 강씨 소생 둘째 왕자를 세자에 올린겁니다.

 

환장할 ?? 노릇임이 틀림없습니다.

 

마땅히 공을 제일 많이 세운 이방원이던가 적장자인 진안대군 이방우가 세자에 오를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여하튼 1, 2차 왕자의 난을 겪게 됩니다. 형제간에 죽고 죽이는 일 참으로 참담한 일입니다. 하지만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으며 나눌 수도 없다는 말이 딱 맞죠?

 

1차 왕자의 난을 겪으며 황후 강씨 소생들은 딸들만 남기고 아들과 사위는 모조리 죽게 됩니다.

남은 공주들은 이성계의 권유로 비구니가 되고 말입니다.

 

후 에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릅니다.

사실 태종이 왕위를 계승 할수있던 결정적 도움이 바로 처가 민씨들입니다.

 

부인을 비롯 네명의 처남들이 충성을 대해 그 공이 누구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원경왕후 민씨와 앞을 알수 없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눈 뜨면 후궁을 보는 태종 .

네명의 남자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는 남편. 반란을 일으킨 형을 끝까지 지켰던 모습과는 참 대조적이져..

물론 타당한 이유는 있습니다. 내명부 권력이 원경왕후에게 집중되는 것을 견제 하기 위한 것 하지만 세자의 모후이며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 태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쌓은 공으로 인한 권력은 그 어느 후궁도 원경왕후의 자리를 넘보거나 무시 할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참 원경왕후를 박대하죠..

성격 대단한 원경왕후 보란듯이 가례를 올린다고 했다가 궁중은 살얼음판이 되고 보다 못한 상왕 정종까지 달려와 태종에게 한 마디 합니다.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정실 아들),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
이에 태종은 가례를 포기 하는데.. 포기는 무슨.. 가례는 포기 했으나 후궁은 예정대로 들였으니.. 원경왕후는 병나 자리 펴고 누워,.. 태종 이방원은 일도 못해 참.. 

 

한 여자의 일생으로는 슬픈인생입니다.

 

또한 사돈 되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별다른 죄 없이 죽이고..안사돈 되는 안씨는 노비로 만들어 버립니다. 심온의 일가 죽 소헌왕후의 친정을 박살을 낸거죠..

 

목적과 명분은 있었으나, 친 형제들의 일을 처리함과 대조되는 참으로 매정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원경왕후의 죽음에 태종은 극심히 통탄해 했으며 통곡을 하고 괴로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대비가 어렸을 때, 나에게 돌아와서 이제 38년이 되었는데, 내조(內助)의 공이 적지 않았나니,"

 

여기까지는 태종대왕의 흉을 조~금 봤구요!

 

태종께서 무슨일들을 하셨는지 쭉~쭉~ 써 나가 볼게요 ^^ 임금의 자리에 계셨던 지라 또 그 분의 업적 돌아 보지않을수 없죠?

소제목으로 나눠 볼까 합니다.

 

1. 자질부터 남달라???? (왕재로소이다!)

일단 여러 국조를 거치면서 그의 행적과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신화처럼 다뤄지는 예가 종종 일어납니다.

태종의 어머니인 황후 한씨가 갓난아기 태종의 사주를 들고 점쟁이를 찾아 갑니다.

점쟁이 왈

“이 사주(四柱)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卜人]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
하였다. 남은(南誾)이 매양 태종(太宗)을 보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영기(英氣)이다.”

" 태종이 개연(慨然)히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어, "

 

음.. 후세에 임금이 되시어 건국초기 기틀을 마련하시고 조선땅을 호령하셨으니 사주가 틀리진않아 보이나.. 끼워 맞추기는 언제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중에 그 무와 문의 기상이 높았다는건.. 사실 다른 형제들도 그만큼 무예와 지략은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 형제들의 벼슬과 과거 합격 시기를 보면 그 연령대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용맹한 기상을 따진다면.. 다혈질인 회안대군도 만만치 않았져..

 

2. 사병 혁파 (군인,군대 군대의 운용은 오직 임금의 몫! )

사병이란것이 개인 호위조직으로 보면 알맞겠으나  이 조직은 군대적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사병혁파 즉 개인이 거느리는 군인들을 국가에 귀속 시켰다는 뜻인데..반발이 만만치 않았져.

이방원의 측근은 물론 공신들까지 들고 일어났으니 오랫동안 지속되던 사병을 순식간에 국가가 통제하게 되는 시스템은 당연히 반발이 따랐을테니 말입니다.

 

실록을 보면 그 반발이 얼마나 컸는지 한 문장의 글로 표현이 됩니다.

 

"이거이(李居易)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

정종 2년 경진(1400)  4월6일 (신축)

사실 사병혁파의 논의는 그 이전부터 있어왔는데 바로 이방원에의해 제거된 정도전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방원의 권력을 두려워했던(그 외 이유도 있지만!) 정도전이 사병혁파의 칼을 뺐다가 그칼에 자멸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태종은 사병혁파에 강한의지를 들어내면 기어이 사병을 국가에 귀속 시킵니다.

 

사병이 혁파된 그 후의 영향은 국가의 군사력이 단단해 졌음은 물론 반란의 씨앗을 도려낸것도 있습니다.

 

 3. 대마도 정벌

 '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한국령!

대마도는 몰라도? ㅋㅋ 네 맞습니다.

 

역사로 볼때 조선 초기 세종시기에 조선이 대마도는 점령하고 지금으로 따지면 대마도 자치구 처럼

스스로 지들끼리 운영을 하라며  자치권을 줍니다.

 

그러나 점점 영향력이 역화되다가 임진왜란에 이르러서는 그 지배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져

조선 세종시기 상왕이 된 태종이방원은 군사지휘권과 외교권은 손에 쥐고 흔드는 상태였습니다.

세종 시기 이뤄졋다고는 하나 이방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건 조금 공부를 하신분이라면 이미 아는 사실일겁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르다가 돌연 우리나라가 대마도의 소유권을 주장하게됩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인데요.

1948년 8월 18년 "대마도는 한국땅이니 내놔! " 라고 하자 일본 0숭이들 뒷목 잡고 쓰러집니다. ㅋㅋ

 

그런데 말이죠 미국이 이를 제지했습니다. 하지만 알아두셔야할것 대마도는 우리 조상들이 점령하여 조선 아래에둔 조선땅이었습니다.

 

언젠간 찾아야 하는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한번도 대마도를 포기 하지않았습니다. 다만 영향력이 약화되어 방치되었을 뿐입니다.

 

조선왕조세종실록에는 대마도 정벌에 대한 태종 이방원의 의지가 굳게 나타나있습니다,

 

좀 길더라도 꼭 읽어보세요

 

“병력을 기울여서 무력을 행하는 것은 과연 성현이 경계한 것이요,

죄 있는 이를 다스리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으로서 부득이한 일이라, 옛적에 성(成) 탕(湯)이 농삿일을 제쳐 놓고 하(夏)나라를 정벌하고,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6월 같이 더운 때에 험윤(玁狁)을 토벌했으니, 그 일에 있어 비록 대소는 다름이 있으나, 모두가 죄를 토벌하는 행동은 한 가지라.

대마도는 본래 우리 나라 땅인데(이미 여러번의 정벌로 점령한 바 있으니),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뜻 있는 선배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 부치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이 용이 나는[飛] 천운에 응하여 위덕이 널리 펴지고 빛나서,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 주시는 덕을 입어 그렇지 않으리라 믿었더니, 그러나 그 음흉하고 탐욕 많은 버릇이 더욱 방자하여 그치지 않고, 병자년에는 동래(東萊) 병선 20여 척을 노략하고 군사를 살해하니, 내가 대통을 이어 즉위한 이후, 병술년에는 전라도에, 무자년에는 충청도에 들어와서, 혹은 운수하는 물품을 빼앗고, 혹은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를 죽이기까지 하니, 그 포학함이 심하도다. 두 번째 제주에 들어와 살상함이 많았으니, 대개 사람을 좋아하는 성낸 짐승처럼 간교(姦狡)한 생각을 숨겨 가지고 있는 것은 신과 사람이 한 가지로 분개하는 바이지마는, 내가 도리어 널리 포용하여 더러움을 참고 교통하지 않았노라. 그 배고픈 것도 구제하였고, 그 통상을 허락하기도 하였으며, 온갖 구함과 찾는 것을 수응(酬應)하여 주지 아니한 것이 없고, 다 같이 살기를 기약했더니, 뜻밖에 이제 또 우리 나라의 허실을 엿보아 비인포(庇仁浦)에 몰래 들어와서 인민을 죽이고 노략한 것이 거의 3백이 넘고, 배를 불사르며 우리 장사(將士)를 해치고, 황해에 떠서 평안도까지 이르러 우리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며, 장차 명나라 지경까지 범하고자 하니, 그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며,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게 함이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내가 삶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어버리는 것을 오히려 하늘과 땅에 죄를 얻은 것같이 두려워하거든, 하물며 이제 왜구가 탐독(貪毒)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뭇 백성을 학살하여 천벌을 자청하여도 오히려 용납하고 참아서 토벌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이제 한창 농사짓는 달을 당하여 장수를 보내 출병하여, 그 죄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아아, 신민들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 버리고 생령을 수화(水火)에서 건지고자 하여, 여기에 이해(利害)를 말하여 나의 뜻을 일반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노라.”

 

구구절절 지금 현대에 와서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잠재적 적국인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그 죄악이 하늘까지 올라 미쳤으니 그 죄업을 씻을 길이 없습니다.

 

태종은 그외 많은 업적을 이뤄놓셨으나 갈길이 먼지라 여기서 태종편은 줄이겠습니다.

 

 

적 6 남 덕안대군 이방연 1360 ~ 1404 

 

고려 우왕  1385년(우왕 11년)에 과거에 합격하고 종사랑(從仕郞) 성균 박사(成均博士)의 벼슬을 하다가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에 죽어 건국 후 원윤에 추증되었습니다.

 

 

 

적 7 남 무안대군 이방번 1381 ~ 1398

 

 

조선 태조고황제 이성계의 자녀들 이야기 | 인스티즈

용의눈물 무안대군

 

 

손 윗 형들하고 나이차이가 심하게 나죠 제일 큰 형과는 30살 정도가 차이가 있으니 말입니다.

바로 태조고황제의 둘째부인이신 신덕고황후 강씨의 큰 아들입니다.

 

이방번 역시 동생에게 밀려 세자자리를 얻지 못했는데 이는 본처 소생 왕자들과는 사정에 차이가 있긴합니다.

 

그 성품이 광망하고 경솔하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왕자의 난에서 죽음을 맞이 하는데 이방원은 동생을 죽이지 않으려 했으나 형인 회안대군, 이거이등이 사람을 시켜 방번과 방석을 죽이니 당시 이방원은 측근 이던 이숙번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유만수(柳曼殊)도 내가 오히려 그 생명을 보전하고자 했는데, 하물며 형제겠는가? 이거이(李居易) 부자(父子)가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서 도당(都堂)에게만 의논하여 나의 동기(同氣)를 살해했는데,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까닭으로 내가 속으로 견디어 참으면서 감히 성낸 기색을 보이지 못하니, 그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

태조 7년 무인(1398)  8월26일

 

 

그렇게 왕자의 난에서목숨을 잃었고 사후 태종은 시호를 정해주고 후사도 정해줬습니다.

부인은 개성왕씨로 남편사후 왕실의 보살핌을 받다가 세종31년에 영면에 듭니다.

그의 묘는 지금껏 보존하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적 7 남 의안대군 이방석 1382 ~ 1398

 

조선 태조고황제 이성계의 자녀들 이야기 | 인스티즈

용의눈물 의안대군 방석(죽음을 앞두고 살려달라며 형들에게 애원하는 장면)

 

 

황후 강씨 소생 왕자로 쟁쟁하고 장성한 형들을 재치고 세자 자리에 오른 왕자입니다.

 

이 의안대군의 첫 부인이 초선 최초 스캔들로 유명한 현빈 유씨인데 감히 세자빈의 몸으로 내관과 간통을 했으니 궁궐이 발칵 뒤짚어집니다.

이 일로 인해 내관 이만은 참수를 당하고 세자빈을 출궁당하고 이 때에 태조는 대신들의 입방아를 철저히 단속했는데 의문을 제기 하는 사람은 바로 옥에 가두고 집안일이니 신경끄라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세자가 입을 치명타를 피하기 위해서겠죠? 그 후 폐출된 유씨에 대한 기록은 전무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동궁에 앉아 있다가 이복형들에게 참살을 당했지요.

 

처음 형들의 반란을 알고는 형들을 막고자 군사들을 몰고 나갔다가 그 군대가 온 천지에 가득하다는 말을 듣고 포기하고 맙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어린아이는 아니었나 생각이 든게 장성한 형들을 막아서고자 시도는했으니 말에요.

 

밖으로 내보내 달라는 왕자의난을 일으킨 세력들의 요구에 태조 이성계는

“이미 주안(奏案)을 윤가(允可)했으니, 나가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라며 안심을 시킵니다.

하지만 태조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살려두지 않을것이라는걸

 

 

그 묘는 보존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며 문화재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적 1 녀 경신공주 ? ~ 1426년

 

황후 한씨 소생으로 태조의 장녀입니다.

 

일단 이러한 글을 쓸때는 실록이 참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공주 옹주에 대한 기록은 적은 편입니다. 그래서 부마의 기록으로 판단을 하고는 하죠.

 

남편은 이방원의 측근이었던 참 쟁쟁한 집안의 청주이씨 이애이고 시아버지는 이거이입니다.

 

당대 공주의 제문을 보면

“은혜와 정의가 지극함이 처음이나 끝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슬픈 일이나 영화로운 일의 예전은 살았을 때나 죽은 뒤나 마찬가지로다. 생각하건대 공주는 타고난 성격이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마음가짐이 엄격하며 조심스러워서, 부호로 살면서도 검소하게 지냈으며, 귀하게 되었으나 더욱 겸손하였다. 집안에 모범이 되어 일찍부터 집을 잘 다스리는 덕이 나타났으며, 남편을 협조하여 능히 국가를 창건한 공을 이루었도다. 부왕께서 친근한 정을 나타내셨고, 과인도 특별히 보살폈도다. 바야흐로 오래 살것을 기대하여 함께 평안함을 누리려 했더니, 어찌하여 병이 있다고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갑자기 부음(訃音)이 이르단 말인가. 실로 척리(戚里)의 불행인지라 어찌 마음으로 영원한 회포를 견딜 수 있으리오. 여기에 흰옷을 입고 애도의 예를 행하며, 곧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노라. 아아, 길고 짧은 것은 명이 있는지라, 비록 벌써 저승길에 들었다 할지라도 살고 죽음에 무엇이 다르리오. 이에 변변치 않은 제물이나마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공주의 성품은 제문에 잘 나타나 있으니, 전혀 모자람이 없는 현모양처 스타일의 공주님 이었나봅니다.

 

부마되는 이애는 원래 이름이 이저에서 이백강으로 개명였으나 이 또한 왕과 세자의 휘와 소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개명을 했습니다.

 

이애는 왕자의 난으로 죽은 의안대군 폐세자 방석의 시첩 중천금(重千金)을 취한일로 곤욕을 겪게 됩니다.

바로 이애의 아버지인 이거이가 취했던 여자를 다시 아들이 취했다는 일로 탄핵을 받은 일인데 이 일을 공론한 사람이 바로 태종 이방원의 동서인 조박입니다.

조박 또한 이일로 태종의 진노를 사는데 이천(利川)으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또 태종의 사병혁파에 대한 일로 반발을 하다가 귀양을 가고 직첩도 뺐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태종의 비호 아래 태종 14년에 생을 마감하고, 공주는 세종 8년에 눈을 감습니다.

공주의 죽음에 태종과 세종은 심히 슬퍼했다고 합니다.

 

 

 

적 2 녀 경선공주 ? ~ ?

황후 한씨의 소생으로 청송심씨 심종에게 하가 했으며, 실록상 기록은 비문의 짧은 기록이 전부입니다.

부마인 심종은 바로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과는 형제지간이 됩니다.

 

제 2 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 14년에 회안대군에게 생강을 받고 내통한 죄로 교하(交河)로 귀양을 갔습니다.

대신들이 심종의 죄를 청하고 마땅한 죄로 다스리길 여러번 청하였지만 거절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다 결국 직첩(職牒)과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습니다.

 

손윗 오빠들 싸움에 매제 등 터진 셈이죠? 경선공주의 노심초사했을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공주의 졸년은 미상이지만 태종 18년 부마 심종 사후 세종 28년까지는 살아있었으며 그 후의 기록은 전무합니다.

 

 

적 3 녀 경순공주 ? ~ 1407

제 1 차 왕자의 난에서 남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와 동생들 의안대군 무안대군을 잃고 아버지 태조의 명으로 비구니가 된 공주입니다.

출생은 화려했으나 그 일생이 고단하고 울분에 쌓여있었으니 어느 공주도 겪지 않을 일을 겪었습니다.

 

1차 왕자의 난에서 남편은 세자 방석을 폐세자 시키던 이방원 일파를 스스로 죽이겠다며

“여러 왕자들이 군사를 일으켜 함께 남은 등을 목 베었으니, 화(禍)가 장차 신에게 미칠 것입니다. 청하옵건대, 시위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공격하겠습니다.”
라며 칼을 빼어 노려보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태조 이성계의 만류 포기 하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궁을 장악한 시점에 칼 들고 설쳐봐야 죽음 뿐이었으니 만류할만도 합니다.

시간이 좀 흐른뒤 밖으로 나온 이제에게 태종은 본가로 돌아갈것을 명했고 집으로 돌아간 이제에게 경순공주는 정안군(태종) 사저로 갈것을 사정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군사들이 공주의 집으로 들이닥쳐 이제를 죽이고 태종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의 죽음은 태종의 원한 바는 아니나 태종의 반대하는 세력이었으므로 측근들은 당연히 제거 되야한다고 여겼을겁니다.

 

이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태종은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호위했는데 공주가 너무 놀라해 태종의 명을 받을 사람의 태종의 명으로 왔음을 고하고 안심시키며 이제의 시신을 곱게 거둘것을 명하니 공주가 감격해 눈물을 흘렷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눈물이 고마움만의 눈물은 아니었을겁니다....

 

 

서 1 녀 의령옹주 ? ~ 1466

의령옹주는 태조의 후궁 찬덕 주씨의 소생입니다. 많은 분들이 옹주의 어머니를 미상으로 알고 있으나 옹주의 아들 이선이 자신의 외조모를 언급한 내용이 실록에 실려있습니다.

세종 18년 병진(1436)   2월2일 (무술) 
 동지중추원사 이선의 3년상을 지키게 해 달라는 상언 
 

동지중추원사 이선(李宣)이 글을 올려 사면(辭免)하기를,
“신의 집안은 흉화(凶禍)가 일어나 외조모(外祖母)인 찬덕(贊德) 주씨(周氏)에게 수양(收養)되었는데, 주씨가 세상을 떠나매 상복을 입고 빈소를 모셨으나, 장사(葬事)를 마치지 못했는데도 신에게 최복(衰服)을 벗기를 명하니, 신이 명령을 듣고 애통함을 다함이 없으매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신하와 자식의 도리는 충성과 효도뿐입니다. 충성이 아니면 임금을 섬길 수가 없으며, 효도가 아니면 어버이를 섬길 수가 없으므로, 하루라도 한쪽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신이 나서 기년이 되기 전에 우리 태조께서 명하여 후정(後庭)에 들어오게 하고는 특별히 외조모에게 명하여 안아서 기르게 하였으니, 소신(小臣)이 출세하여 장대(長大)해져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은 비록 모두 성조(聖祖)의 지극히 인애(仁愛)하신 덕이지마는, 또한 주씨의 양육한 은혜에 연유했던 것이니, 그렇다면,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이 진실로 의리에 합당한 것입니다. 만약 양친께서 당(堂)에 계신다면 비록 마음과 같지는 못할 것이나, 하물며 세속(世俗)에서 1백 일의 상을 치르게 되매 슬픈 정은 거의 펼 수가 있지마는, 그 기일이 매우 짧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큰 도량을 넓혀 어리석은 심정을 굽어살펴서 기복(起復)의 명령을 환수(還收)하고, 의복(義服)의 제도를 따르게 하여 효도로써 다스리는 정치를 빛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미신(微臣)만이 조석으로 칭송 기도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주씨께서도 지하에서 감격하여 울 것입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태조가 옹주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실록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세종 1년 기해(1419)  2월20일 (을미) 
 상왕 누이의 아들 이선과 혼담을 꺼냈다가 가난을 이유로 사절한 평득방을 하옥하다 
 

선지하기를,
“이등(李登)의 아들 이선(李宣)은 태조께서 사랑하시던 외손이요, 그 어미가 비록 천생이나 나의 누이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사랑하는 처지이다. 그런데 일찍이 전 지평주사(知平州事) 평득방(平得邦)과 더불어 혼인 말이 있어 득방이 허락 하였었는데, 요새 와서 집이 가난하다고 사절한다니, 득방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그 연유를 문초하라.”
 
숙신옹주와 의령옹주 두 옹주는 세종의 금주 명령에도 불구하고 술타령을 했다가 남편들이 탄핵을 받는등 곤욕을 치르게 합니다.

 

 

서 2 녀 숙신옹주? ~ 1453 이며치(李㫆致)(이름)

태조의 후궁 화의옹주 소생으로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에게 하가 하였습니다.

 

숙신옹주는 태조의 막내 딸로 아버지인 태조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은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사진은 이성계가 딸인 숙신옹주에게 나이 70에 가서 딸이 먹고 살것을 걱정해 내린 재산 상속 문서입니다.

 

 

조선 태조고황제 이성계의 자녀들 이야기 | 인스티즈

태조 이성계 별급문서, 조선 1401년, 56.5 × 55.5 ㎝, 보물 515호

 “건문(建文) 3년(1401) 신사년(辛巳年) 9월 15일 첩의 소생인 며치(㫆致)에게 상속 문서를 작성해 준다.

비록 며치가 나이 어리고 첩에게서 난 여자 아이지만, 지금 같이 내 나이 장차 70이 되는 마당에 가만히 있을 일만은 아닌 듯 하다.

 

동부(東部)에 있는 향방동(香房洞)의 빈터는 돌아간 재상 허금의 것으로 잘 다듬어진 주춧돌과 함께 샀으니, 집은 종을 시켜 나무를 베어다가 짓도록 하여라.

몸채 두 칸은 앞뒤에 툇마루를 하고 기와로, 동쪽에 붙여 지은 집 한 칸도 기와로, 부엌 한 칸도 기와로 잇는다.

 

술 방 세 칸은 이엉으로, 광 세 칸은 앞뒤에 툇마루를 하고 이엉으로, 다락으로 된 곳간 두 칸은 이엉으로, 안 사랑 네 칸도 이엉으로, 서방 두 칸은 앞뒤에 툇마루를 하고 이엉으로, 남쪽에 있는 마루방 세 칸은 앞에 툇마루를 하고 이엉으로 잇는다.

 

또 다락으로 된 곳간 세 칸은 기와로 이어서 모두 스물 네 칸을, 주춧돌과 함께 구입한 허금 집터의 매매 문서와 함께 상속해 주노라.

 

영원토록 그 곳에서 살도록 하되 훗날에 별다른 일이 있거든 이 상속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신고해서 올바르게 변별하고 자손들이 전해 가지며 오래도록 거주 하도록 하여라.”

 

 

세종 5년 계묘(1423)  5월11일 (경인)
 
사헌부에서 국상기간에 술 마신 이등·홍해 옹주의 처벌을 아뢰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개성군(開城君) 이등(李登)과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 등 두 옹주(翁主)가, 국상(國喪)과 금주(禁酒)의 시기를 당하여, 신을 섬기는 모임이라 핑계하고 거문고를 타고 술도 마셨으며, 또 이등·홍해 등이 가장(家長)으로서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 무슨 폐서인 될 소리?? 국상때를 당해 금주의 명이 내려졌는데 옹주들이 술을 마시며 놀자판이었다니..

태조가 말년에 낳은 딸들이라 철없이 키운모양입니다. 한심한 작태를 벌이다니 이 일로 옹주의 남편들이 곤욕을 치루게 하디니요

 

철없는 옹주에 비해 남편 홍해의 인품을 알수 있는 실록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세종 17년 을묘(1435)  11월26일 (계사) 
당성군 홍해가 데려온 아이를 제생원에서 기르게 하다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가 제릉(齊陵)의 헌관(獻官)으로서 돌아오다가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러 길에서 한 어린애가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이를 불쌍히 여겨 음식을 주고, 이내 역리(驛吏)로 하여금 보호해 기르게 하고 말을 갖추어 아뢰니, 임금이 이에 놀라서 곧 사람을 보내어 옷을 내리고, 그를 거느리고 제생원(濟生院)으로 와서 보호해 기르게 하였다.
 
부마의 인품이 들어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세조조에 이르러 금성대군일파와 교통하였다는 죄로 파직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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