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꼬박 12년동안 공부한 게 바닥에 나뒹구는 전단지를 줍는 꼴이라니. 턱 끝에 끈적하게 고이는 땀을 닦은 민석이 눈을 찌푸렸다. 이번에 새로 신축공사를 했다던 건너편 건물은 으리으리했다. 누가봐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높다란 건물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를 줍던 민석은 뻐근한 허리를 필 요량으로 고개를 쳐들었는데 보이는 건 하늘이 아니라 높다란 건물들과 도로를 가로지르는 값비싼 차들뿐이었다.
“…더워죽겠네.”
모든 수험생들이 로망인 서울대는 고사하고 겨우겨우 수도권 안에 있는 대학이라도 들어간 것에 감사하며 멋드러진 대학생활을 꿈꾸던 민석이었다. 현실은 매정했다. 등록금이 비싸다고 매일같이 한숨을 쉬면서 형에게 군대라도 가버리라고 윽박지르던 엄마가 백번 천번 옳은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살이 빠지고 멋져지며 키도 클거라는 소리는 순 다 뻥인 것을 안 것도 오래지나지않아 민석은 그리 넉넉지 못한 살림에 두 형제의 등록금을 내야하는 아버지의 무게에 작정하고 알바를 시작한 것도 6개월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꾸깃해진 전단지를 탈탈 털어 곱게 펴자 보이는 문구에 민석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5월 27일 최고의 디바 장은정, 죽순 나이트! 미성년자는 가라!
27일, 누구에게는 돈을 버는 날 혹은 있는 옷 없는 옷 다 꾸며입고 신나게 흔들어대는 날인가. 이래서 청년실업이 느는거라니까 사람이 말이야, 일을 하고 살아야지. 혀를 차던 민석은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들을 마저주웠다. 파란 유니폼을 입은 민석은 검은 정장을 입고 당당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손에 한웅큼이나 쥐어진 전단지를 대충 휴지통에 집어넣고 후다닥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에어컨 바람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휴지로 땀을 닦은 후 화장실로 달려가 손이라도 씻어야겠다. 마음먹자마자 딸랑거리며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또 있더라, 전단지?”
“아, 종대형.”
여어-. 어울리지도 않게 손을 까딱거리며 다가온 종대는 민석이 그렇게나 싫어하는 건너편 건물에서 일하고 있는 유능한 남자였다. 신문배달과 야간에 치킨집 알바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싶어서 알아본 편의점에 운좋게 첫 출근을 한 날 마주친 사람이기도 했다. 새알바? 하고 물어오던 종대에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더듬더듬 감사하단 말을 뱉으니 살갑게 말을 걸며 이제는 형동생으로 돈독해진 사이였다. 익숙하게 편의점 뒤쪽코너로 들어가 커피를 꺼낸 종대에게 민석이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모퉁이 넘어서 상가에 나이트클럽 하나 더 생겼다잖아요, 그거 때문에 홍보물 뿌린다고 밤사이에 무슨 전단지를 그렇게 많이 뿌리고 다녔는지…아침마다 점장님한테 청소안하고 갔었냐고 혼난다니까요?”
익숙하게 바코드를 찍으며 카드를 받아드는 민석은 하소연할 상대가 종대뿐인것처럼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가끔가다 아아- 혹은 그랬어? 하며 사람좋게 웃어주는 종대에게 헤실거리며 웃다가 무언가 퍼뜩 생각난 사람마냥 형,이거요. 하면서 사탕하나를 건넸다. 종대가 이게 뭐냐는 얼굴을 띄우자 자랑스럽게 웃는다. 점장님 몰래 숨겨둔 사탕몇개 있거든요, 그거 요즘 새로나온 맛이래요…뭐랬더라? 빠오즈맛? 형도 드셔보시라구요-. 처음 말을 걸었을 땐 쭈뼛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하던 민석이 맞나 싶을정도로 요새는 먼저 이것저것 챙겨주는 민석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땡큐. 짧게 인사하고 나가는 종대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주던 민석은 손에 들린 카드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맞다. 카드…! 허겁지겁 달려나가는 민석은 올해 대학교 1학년인 알바돌이다.
***
“늦었어. 종대.”
“그러니까 앞으로는 스타벅스 드시라니까요.”
“싫다고했잖아.”
“이사님 입맛은 왜그래요 진짜? 비싼 거 사드린다니까요?”
결국 내돈이잖아. 종대가 툴툴대며 건넨 커피를 받은 루한이 웅얼거렸다. 그거야 그렇지만…. 말끝을 흐린 종대가 어색하게 웃으며 서류를 건넸다.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루한이 커피를 홀짝거리며 서류를 대충 뒤적거렸다.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루한이 귀찮든 말든 그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태도의 종대가 익숙하다는 듯 설명을 주절거리며 늘어놓았다.
“올해 시작하기로 했던 이태리쪽 프로젝트가 차질이 생겨서 파리쪽으로 장소변경이 될것으로 예상되는데 박팀장 얘기하는 걸로 봐서는 허풍이 반, 진심이 반인것 같고… 워낙 그 인간이 허풍이 심해야죠 원, 이렇든 저렇든 간에 일하나는 제대로 하는 사람인 건 아시죠? 그래서 말인데 이태리쪽 정리는 이미 시작된 상태고 파리 쪽 손보시려면 이사님이 직접 파리로……”
종대가 서류를 하나하나 집어주며 설명해주는 것도 관심이 없다는 듯 커피아래에 붙은 작은 종이쪼가리에 의문이 들어 그걸 떼어본 루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 나이트! 미성년자는 가라! ]
앞뒤가 찢어진 걸로 보아 어디선가 찢어진게 붙은 것 같은데, 집중해서 말하고 있는 종대를 힐끔거린 루한이 알게모르게 미소지었다. 지루해서 죽겠다던 루한의 표정이 즐거움에 가득 차있자 오한이 든 종대가 말을 멈췄다.
“이사님, 듣고 계십니까?”
“김종대.”
“예?”
“이거뭐야?”
루한의 손안에서 팔락거리는 종이쪼가리에 커다랗게 써진 문구에 순식간에 사색이 된 종대가 급히 종이를 빼앗으려 손을 뻗자 몸을 돌려 놀리듯이 팔을 위로 쭉 뻗은 루한이 유쾌하게 웃었다. 울그락 불그락해져 당황하는 종대의 모습은 놀리기에 딱 안성맞춤이였다. 뭐야 김종대씨, 끝나고 나이트 가시려고? 빈정거리는 말투에 얼굴이 토마토마냥 새빨개진 종대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글쎄…!”
“커피사오라고 시켰더니 이런 거나 가져오고 뭐하는거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종대의 반응에 루한은 웃겨 죽을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폭발해서 나가버릴 것 같은 게 꼭 8살 소년같았다. 종이를 꾸깃하게 쓰레기통으로 넣자 조금 진정이 된 종대가 서류를 루한의 앞으로 밀었다. 뭐하냐는 루한의 얼굴에 떠오른 물음을 읽은 종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사님이 앞으로는 직접 읽으시라구요. 화를 꾹꾹 참느라 발음이 억눌려나왔다. 왜? 어째서? 반항하는 아이처럼 꿋꿋이 대꾸하는 루한에게 졌다는 듯 종대는 두손두발 다들었다.
“저 내일부터 출장가지 않습니까.”
“어디로? 왜 진작에 말하지 않은거지?”
한달전부터 말씀드렸잖습니까-! 윽박지르듯 소리를 꽥 지른 종대에 루한은 멍한 얼굴로 그래? 하고 말뿐이었다. 당분간은 커피도 박팀장이나 크리스형 시키시구요.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흥미가 떨어진 듯 서랍속으로 던져버린 루한의 행동에 기가찬 듯 헛웃음을 흘리다가 나가보겠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는 종대에게 대충 손짓하고선 의자에 기대 눈을 감은 루한 때문에 결국 이사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하여튼 저 성격파탄자. 웅얼거리던 종대가 주머니를 신경질적으로 뒤져 핸드폰을 꺼내는데 툭,하고 무언가가 복도를 굴렀다.
“어? 이거…”
하얀 포장지로 둘러쌓인 작은 막대사탕하나에 언제 화가 났었냐는듯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그러고보니 편의점 알바로도 부족하다며 다른 알바를 찾고있다는 민석의 앓는 소리가 생각났다. 커피알바정도라면…민석의 착해빠지고 바보같은 성격이라면 루한도 백기를 들지 않을까. 오히려 놀려먹는 게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종대는 다이얼을 빠르게 눌렀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진짜 죄송해요 카드두고 가셨는데 언제 또 오세요? 제가 갈까요? 다다다다 쏘아붙히는 민석에게 종대는 재밌다는 웃음을 지었다.
“카드는 나중에 줘도 되고… 근데 민석아”
사탕껍질을 벗기며 종대가 경쾌하게 운을 띄웠다. 하얀껍질처럼 뽀얀 사탕을 입에 쏙 넣은 종대는 사탕을 한입 먹자마자 급히 빼냈다. 웩, 무슨 맛이 이래? 사탕이라면 달달해야하는 거 아냐?! 맛있을거라며 헤실거리던 민석의 표정엔 한치의 거짓이 없었다. 얘는 대체 미각이 어떻게 된거야. 찡그린 얼굴로 쩝쩝 입맛을 다신 종대가 네?하고 돌아온 대답에 핸드폰을 고쳐잡았다.
“일,구한다고했지?”
그 순간, 민석은 귓가에 팡파레가 터지는 기분이었다. 전화기를 붙잡고 얼어붙은 민석과 반대로 감겼던 눈을 뜬 루한은 서랍속에 쳐박힌 서류를 보다 웅얼거렸다.
"그나저나 박팀장은 너무 말이 많고, 크리스는 귀찮게 군다고 그럴거란 말이다…"
직접 편의점까지 가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루한이었다.
***
다마신 커피는 저한테 주시죠 루이사님. 8ㅅ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