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밖에 눈 온다."
오늘 부터 눈 온다더니 진짠가보네.
아직 날이 밝았는데 '첫 눈'이라는 두 글자가 실시간 검색어를 도배하더라. 밤 부터 올 해 첫 눈을 볼 수 있단다. 괜시리 들뜬 마음에 인터넷을 뒤적이며 나도 뭔가 할 게 없을까 하다 베란다에 의자를 갖다 놓고는 빨간 담요를 덮고 앉아서 핫초코가 든 잔을 꼭 쥔 채로 창 밖을 보면서 앉아있었다. 우리 아들들 잘 지내고 있나, 껄껄. 하며 뜨개질이라도 해야 되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영국의 인자한 할머니가 된 기분이 들었다.
눈이 제법 쌓였다. 왠지 작년보다 더 오래 내리는 거 같다. 아아, 우리 정국이. 오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지. 한숨을 푹 쉬었다. 문자를 보내볼까. 전화를 해볼까. 아냐, 눈길에 더 위험하게. 정국이 한테 연락을 해볼까 하는 생각은 3초만에 접었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자. 무료해진 마음에 책장으로 가서 책을 꺼냈다. 겨울왕국 무비 스토리ㅂ... 아니야 이건 아닌 거 같다. 이 책이 왜 있는 지도 모르겠다. 검지 손가락으로 책을 쭉 짚어 가며 훑어보고는 책을 꺼내 자리로 돌아왔다. 〈냉정과 열정 사이>. 제목이 딱 나랑 정국이 사이구먼. 아 맞다. 다시 거실로 가서 테이블에 있는 아이팟 휠을 돌려 노래를 고르고 독에 연결했다.
마마무 - Gentleman (With eSNa)
"우히후- 설레는 지금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다. 이 노래 좋아. 언젠간 정국이가 한 번 불러줬으면 더 좋겠다. 책 가져오고 20여 장 읽었는데 재미가 없다. 눈도 다 그쳤고 혼자 책 읽는 게 궁상맞기도 하고 그냥 안으로 들어와서 책을 원래 자리로 돌려놨다. 나랑 독서는 안 맞나봐. 소파 위로 축 늘어졌다. 다른 노래 들을까 하고 스피커로 다가가는데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정국이다. 현관 앞에 쪼르륵 달려가 서 있었다.
덜컥
문이 열렸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국이가 왔다.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를 뻔 했다.
"나 왔다아아아아!"
"야! 저언정구우우욱. 너 왜 이제 오냐. 기다렸잖아."
"기다렸어요? 미안. 눈 와서 차가 많이 밀렸어."
"흐아. 너 안 와서 나 혼자 첫눈 봤잖아. 눈 다 그쳤어. 완전 미워."
사실 정국이는 안 밉다. 작년 겨울에 함께 봤던 첫눈이 너무 예뻐서 '내년에도 같이 있자'고 약속했던 걸 못 지키게한, 꼬박 일년을 기다렸는데 하필 하루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주말이 아닌 평일에 눈을 내려준 날씨가 미울 뿐이다. 절대로 절대 정국이는 1도 안 밉다. 그냥 속상한 마음에 한 번 징징대봤다.
"그러네……. 미안해요 형……."
"왜 자꾸 미안하다고만 해. 나도 미안해지잖아……."
"음……. 그러면 미안하다고 안 할게요. 고맙다고 해야지. 고마워요, 태형아."
"너 내가 반말하지 말라고 했지."
"왜애. 더 좋잖아. 더 설레지. 그치, 태형아."
스에상에. 전정국. 예지력 상승이다. 그래 맞다. 더 설렜다. 지금도 설레고 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심장이 막 뛰는 거 같다. 베란다에 있을 땐 추웠는데 지금은 하나도 안 춥다. 피가 빨리 돌아서 체온이 올라갔나. 이게 다 전정국 때문이야.
"씨. 뒤진다 진짜."
"어허. 고운말 써야지 태형아."
"말 끝마다 태형아 태형아 한다? 너 나랑 친구냐?"
날 보며 귀엽다는 듯 웃어주는 정국이다. 우와. 얼굴 빨개졌으면 어떡해. 엄청 놀릴텐데.
"알겠어요. 형. 어? 눈 또 와."
"뭐?"
우와? 쟤랑 나랑 입술끼리 닿았어.
당황한 나머지 정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까의 작은 미소와는 다르게 크게 눈을 휘어 아빠미소를 지어주는데 그거에 더 설레버렸다. 얼굴은 새빨갛게 됐겠지. 정신 차리고 밖을 보니까 눈이 내리긴 커녕 아까 내린 눈이 녹는 중인 듯 보였다. 거짓말쟁이.
"야, 눈 안 오잖아. 이게 아주 반말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한다?"
"좋았잖아요."
"으응. 사실 그건 맞아……."
"와. 진짜 귀엽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양손으로 쥐고 자기 얼굴을 들이민다.
아아……. 난 이렇게 설렘사로 생을 마감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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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 합니다.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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