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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사귄 전 애인 갑을로 만나는 썰 번외: 필스토리
w. 랑데부
***
내가 언제 이렇게 부탁한 적 있었어? 갠 정말 진심인 것 같아서 그래.
원필은 얼굴을 잡아 쓸어내렸다. 그렇다고 네 살이나 어린 학생을 만나라니. 아무리 성인 나이 그거 별거 아니라지만 원필에겐 부담이었다. 또 어쩌다보니 원필은 연애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의 팔할은 그들의 친구 덕이었지만, 이젠 슬슬 연애가 별 볼 일 없어지고 있는 찰나였다.
"알았어"
"약속 시간 보낼게"
영현은 휴대폰을 보고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연애는 너네가 다 해 처먹어라. 난 슬슬 이골나 죽겠는데, 대단하다. 대단하고 대단하다 참.
사랑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단지 이젠 만남과 헤어짐의 경계가 무뎌지고 설레임이 사그라드는 감정 노동이 질려 먹었다. 내가 하고 있는게 사랑이 맞는 지 거울 보며 묻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일에 파묻혀 버렸다.
여름이 오고 있다고 했지 전속력으로 달려 오고 있단 보도는 없었다. 하필 원필은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토요일이란 황금 시간대에 오전 근무를 해먹어야 했다. 그래 만만한게 나 하나지. 그래 나 하나밖에 없겠지.
하필 둘러댈 가족이 있는가 배우자가 있는가 자식이 있는가 아니 시발 연인이 있는가. 원필은 학연 지연 혈연 중에 이렇게 비좁은 삶을 살아왔나 돌이켜 보았다. 떠오르는 건 아, 담배가 말린다.
"아,"
급하게 자리에 앉은 원필은 이제껏 가슴팍을 달랑달랑 부닥쳤던 사원증을 뺐다. 가방 그 어느 곳인가 쑤셔 박은 뒤 대강 머리를 털었다.
아직 안 왔나, 셔츠 단추를 풀러 시계를 느슨하게 풀어 다시 채웠다. ..아.
문 앞에서 서성이는 여자가 하나 보였다. 자꾸 제 쪽을 바라보는게 아무래도 상대가 맞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되게 어리게 생겼네. 원필은 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나?
ㅇㅇ는 끄덕였다. ㅇㅇ는 천천히 다가와 원필의 앞에 앉았다.
"안녕하세, 아! 아으"
"괜찮아요?"
탁자에 이마를 꽁 박은 ㅇㅇ의 이마에 빠르게 큰 손이 닿았다. 오 난 망했다. 작가님 저 망했어요.
원필은 베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소리를 보아하니 혹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얼어붙은 ㅇㅇ를 앉히고 원필은 가는 숨을 뱉었다. 그래도 떨리긴 하는구나.
"왜요, 생각보다 못생겨서 놀랐어요?"
"네? 에? 무슨, 아니 아니요. 그게에.."
존나 잘생기셔서 놀랐어요.
ㅇㅇ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괜히 소개팅 같은 거 해달라고 졸랐나봐, 할 말이 1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필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미안하지만 연애에 손 떼려했다, 적당한 사과 뭐 욕 먹고 나올 생각이었다.
"..사진이 실물을 못 담아서요오.., 긍정적으로"
원필은 마시던 커피를 그대로 주르륵, 흘릴 뻔 했다. 매우 부끄럼을 타는 것 같은데 말은 서슴없었다. 아, 감사합니다. 원필은 해사하게 웃었다.
워 존잘. ㅇㅇ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작가님 저 어쩌면 덕질할 지도 모르겠어요.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나요.
"나이가 어떻게 돼요?"
"네? 아, 저 스물 넷이에용"
부끄러운지 베시시 웃으며 답했다. 하마터면 벚꽃이 만개한 봄으로 착각할만큼, 따스한 미소였다.
"전 스물 여덟인데. 부담스럽지 않아요?"
"저요? 아니요? 아니, 아니요. 전혀 안 부담스러워요"
미어캣처럼 허리를 쭉 뻗고 손사레를 치는게 참 솔직해 보였다. 마침 진동벨이 탁자 위에서 부르르 떨어대기 시작했다. ㅇㅇ가 집기도 전에 원필은 진동벨을 들고 일어났다.
카페 모카 생크림 듬뿍, 캐러멜 마끼아또 생크림 듬뿍. 얼핏 비슷한 커피로 보였다. 원필은 마끼아또를 ㅇㅇ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ㅇㅇ는 빨대로 생크림을 푹푹 떠먹었다. 한 입씩 생크림이 ㅇㅇ의 입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ㅇㅇ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영화관의 에어컨을 생각하지 못했다. 찬 바람이 오소소 ㅇㅇ를 감싸 안았다. 가디건이라도 들고 올껄. ㅇㅇ는 양팔을 손으로 비비며 열을 만들어 냈다. 원필이 티켓을 입에 물고 츄러스를 든 채 다가왔다. 어어, 티켓. ㅇㅇ는 금방 원필에게 도도도 달려가 티켓을 들었다.
"ㅇㅇ씨 잠깐 뒤돌아요"
"에? 왜, 왜요?"
"강영현!"
ㅇㅇ를 감싸안듯이 품에 두고 원필은 뒤를 돌았다. 타이밍 죽여주네. 누가 봐도 땅콩이었다. 괜히 걸리면 아마 삼 년치 놀림감은 족히 채울 게 분명했다. 원필의 나직한 숨소리에 ㅇㅇ의 정수리에 내려 앉았다. 원필의 뜨거운 온기가 그대로 ㅇㅇ를 품었다. 그토록 추웠던 몸이 한없이 뜨거워졌다.
"됐어요. 미안해요"
겨우 목소리가 잦아들자 원필은 ㅇㅇ를 놓아주었다. ..어.
돌아 마주본 ㅇㅇ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아, 웃으면 안 돼는데. 홍조처럼 발갛게 올라온 뺨이 마치 복숭아 한 알 같았다.
"더워요?"
도리도리.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처럼 도리질쳤다. 티켓을 어찌나 꼭 쥐고 있는지 빳빳한 티켓이 반 정도 구겨져 있었다. 원필은 위 아래 입술로 드러나는 이를 감추었다. 웃음을 꾸욱 눌러보아도 비집고 튀어나오곤 했다.
"갈까요?"
한참 얼이 빠진 것 같은 ㅇㅇ에게 방향을 가르키자 그제야 ㅇㅇ는 종종 걸음으로 걸어갔다. ㅇㅇ는 자주 휘청였다. 이미 어두워진 관에서 계단을 오르던 ㅇㅇ가 크게 휘청이자 원필은 간신히 붙잡았다. 구두 끈이 풀린 줄도 몰랐다. 원필은 ㅇㅇ의 앞에 앉아 끈을 단정히 묶어주었다. 제가 신발끈 진짜 잘 묶거든요. 안 풀리게.
영화가 시작하고 ㅇㅇ는 금방 정신을 붙잡았다. 다행히 떨려 죽을 것 같아 영화가 집중이 되지 않거나 그런 불상사는 찾아오지 않았다. ㅇㅇ는 습관적으로 팔을 부비며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와 음향 쩔어. 눈이 구슬처럼 땡그래진 ㅇㅇ는 저를 덮는 인기척에 눈길을 돌렸다.
말없이 원필은 ㅇㅇ의 어깨에 수트를 벗어 걸쳐 주었다. 원필 역시 영화에 모든 신경을 쏟아 붓는 것처럼 보였다. 이따 나가서 감사하다구 해야지. ㅇㅇ는 원필의 수트를 여미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원필은 영화가 끝나서도 수트를 건네 받지 않았다. 밤이 되니 언제 여름이 오고 있었냐는듯이 더위를 걷어 갔다.
원필은 ㅇㅇ의 질문에 꽤 성실한 답을 하는 편이였다. 강작가님 하구 친구 하신지 얼마나 된 거에요? 대학에서 만났어요, 걔 여자친구가 제 절친이었거든요. ㅇㅇ도 영현의 여자친구에 대해 꽤나 아는 편이었다. 전화기에 이름만 떠도 그렇게 무서운 작가님이 막 환하게 웃는 거에요. 영현의 표정을 얼추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그래요? 강영현 걔가 좀 제정, 아니... 좀 많이 좋아하죠. 주변 사람들 불편하게"
원필은 옆에 둔 티슈를 뽑아 건네며 답했다. 에? 왜요? 원필은 손가락으로 제 이를 톡톡 두드렸다. ㅇㅇ는 황급히 이를 벅벅 문질러 닦아냈다. 아, 망했어요. 원필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ㅇㅇ를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ㅇㅇ는 리조또 한 입 밀어넣고 원필을 슬쩍 바라보았다.
"체해요"
음식에 시선을 고정한 원필이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구, 켁. 끝끝내 사레가 들렸다. 기침이 거세지자 금새 그는 ㅇㅇ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요? 콜록대며 좀처럼 정신을 못차리는 ㅇㅇ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네? 콜록, 그게, 콜록"
원필은 제 소매를 끌어다 마구 튄 음식 조각물들을 닦아주었다. 아니 뭐? 닦아줘?
...닦아줬다.
*
"어, 비 오네"
비가 내렸다. 그것도 장대비가. 꼭 차도 안 가져온 날 이렇게 비가 내렸다. 원필은 금방 젖어버린 손바닥을 닦아냈다.
"ㅇㅇ씨"
"..."
"ㅇㅇ씨"
"..."
"..ㅇㅇ야"
"네?"
ㅇㅇ는 화들짝 놀라 원필을 올려다 보았다. 아까부터 넋이 나가버린 그녀는 고개를 재빠르게 털어냈다.
"우산 좀 사올게요"
"...아, 같이 가요!"
"괜찮아요. 여기 잠깐만 있어요"
무슨 드라마처럼, 아님 영화처럼. 편의점에 달랑 하나 남은 우산을 바라 보았다. 어쩔 수 없지.
오랜 기다림은 아니었다. 금방 돌아온 원필은 우산을 ㅇㅇ에게 건넸다. 하나 밖에 없어서. ㅇㅇ씨 쓰고 가요. 주저 없이 건넨 우산을 받아야 하나 망설였다. 쉽사리 그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미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은 원필의 앞머리가 보였다. ㅇㅇ는 도리질쳤다.
"...그, 쓰고 가세요. 저는 정거장까지 금방이에요"
"나도 그래요. 괜찮아, 쓰고 가요"
"네? 아니, 저기"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먼저 갈게요"
오늘, 재밌었어요.
해사한 미소를 띄운 원필이 먼저 문을 열고 발걸음을 떼었다. 아니, 저기, 그. ㅇㅇ는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앞섰다.
"...ㅇㅇ씨?"
"같이 써요! ...ㄷ, 데, 데려다 드릴게요!"
우산은 한참 원필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자비 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이 자꾸 눈가를 때리고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미 빗방울과 함께 동화된 기분이었다. ...실수한 건가. ㅇㅇ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내려다 보는 원필의 눈치를 살폈다. 어떡하지. 그냥 이대로 가? 아님 기다려?
*
"연애가 싫은 거야? 사랑이 싫은 거야?"
"글쎄. 생각해 본 적 없어. 누구들 덕에 정신이 더럽게 없었어서"
"허 참나. 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보다 연애를 많이 했냐?!"
"니네가 서로만 만난 거면서 그게 왜 그런 쪽으로 가?!"
*
원필은 한껏 자신에게 기운 우산을 쥔 ㅇㅇ를 내려다 보았다.
힐끔힐끔, 제 눈을 바라보는 그녀를. 원필은 영화를 드라마를 믿지 않는다. 추가로 소설도. 그보다 더 놀라운 사랑을 가장 옆에서 봤지만 그런 환상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 별 볼일 없는 게 연애인지 사랑인지 잘 모르겠는데.
원필은 우산을 건네 받아 ㅇㅇ쪽으로 기울였다. 원필의 머리칼을 타고, 셔츠 속으로, 온 몸으로 빗방울이 닿고 스며들었다.
"내가 데려다 줄게요"
별 볼일 없는 게 연애인지 사랑인지
"...네?"
"비 맞잖아"
그 답이 궁금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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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여드리지 않은 또 다른, 새로운 사랑의 유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리쉐스트 下편을 기다리시느라 지루하실까 공개를 망설였던 원필의 이야기. 리퀘스트 中편에서 잠시 나왔던 그 영현이의 후배와의 이야기를 두고 갑니다.
독자님들이 기다리시는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플챙유건 하시고 돈 많이 버시구.. 절 받으세요. 지켜봐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