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얘들아
오랜만이다, 그치?
거진 한달동안 이곳에 들르지 못했던것 같아.
소식도 없이 사라져버려서 걱정한 친구들이 있었던건 아닐까, 조마조마 했었어.
하지만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사라졌던건 아니니까 화나거나 섭섭했다면 기분 풀어줬으면 좋겠다.
사실 나 출장에서 돌아온지 이제 며칠밖에 되지 않았거든.
혹시 다들 기억할지 모르겠다. 저번에 해외로 출장을 가서 글을 쓴적이 있었잖아?
원래는 2주 가량 교육만 받고 오면 되는거였는데, 일이 조금 생겨서 기간이 40일 가량으로 늘어났지 뭐야?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나도 흔쾌히 남아있기로 결정했던거고.
물론, 오세훈 그 녀석은 내 대답에 조금 뚱한 반응을 보이기는 하더라.
혼자서 점심 먹는게 기분좋은 일만은 아니지. 그렇고 말고.
아무튼, 이렇게 늦게라도 찾아왔으니 용서 해줄거지?
연말이라 그런지 일이 유독 더 많아서 눈코뜰새 없이 바쁘지만, 짬짬히 글을 써서 올리도록 노력할게!
그럼 오늘도 이야기 시작해볼게.
오늘은 어쩌면 조금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질수도 있는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해.
사람들은 '연애' 라고 하면 늘 분홍색 향수나 아이보리색 손수건, 아니면 샤프런 향기처럼 화사하고
달달한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은데, 내가-비록 연애 같지는 않은 연애지만-해보니까 그런것만도 아니더라고.
연애라는건 사실 어떻게 보면, 사람에게 있어 백신과도 같다고 생각해.
다만 그 힘이 완전하게 제어되지 않은, 위험한 바이러스 같은거 말이야.
즉 사랑이나 연애라는것 자체가 사람에게 있어 독이 될수도, 반대로 약이 될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런 면에 있어서 나는 오세훈에게 독일까 약일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만 들더라.
반대로 나에게 오세훈은 약일까, 독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주저리는 여기까지 하고, 오늘 너희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단 두가지야.
사랑이 사람에게 있어 독일까, 약일까?
그리고 몸이 멀어진다면 마음도 과연 멀어지는 것일까?
내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본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아마 고개를 갸웃거리는 친구들도 분명히 있을거야. 왜 이런 영양가 없는 생각들로 정신력을 소모하느냐고 말이야.
하지만 당시의 나에겐 꽤 진지하면서도 중요한 생각들이었어.
내가 출장을 갔던 당시 오세훈 그 녀석이 보인 행동들 때문에 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거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세훈 그 녀석의 행동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어.
언제나와 같이 잘 대해줬고, 여러 상황들에 재치있게 잘 대처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변한건 나였지만 스스로 그걸 자각하지 못했던거야.
사실 교육을 받으면서 같이 방을 썼던 선배가 나에게 웃으면서 했던 말이 있거든.
[누구랑 그렇게 웃으면서 통화를 해? 애인이야?]
당시 나는 당연히 아니라면서 얼버무렸지만, 알잖아.
나는 거짓말을 잘 하는편이 못돼. 내 어설픈 거짓말을 선배가 알아챈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고.
마침 그 선배가 장난기가 많은 선배였던지라 나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하지만 선배가 오히려 웃으면서 그런말을 하더라고.
[하긴, 준면씨 나이면 슬슬 연애도 시작하고 미래도 계획해볼 나이지.]
상황이 꽤 매끄럽게 잘 흘러가는것 같아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어.
워낙에 꼬투리 잡는것도 좋아하고 사람을 잘 놀려먹는 사람인지라, 선배에게 걸리면 끝장이라는 생각만 계속 하고있던 찰나였거든.
그런데 선배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런말을 하더라고.
그런데, 사람이라는게 엄청 간사하다?
[네?]
당연히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반문할수밖에 없었어.
무슨 말인이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다.
맞는말이지만 그 말에 숨은 참뜻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어.
[준면씨 교육 때문에 이곳에 몇 주 동안은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방치된 애인이 무슨일을 할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던거야?]
솔직히 선배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나는 이해할수가 없었어.
무슨 말을 하고자 저런 말을 하는걸까. 워낙에 짓궂기로 유명한 선배인만큼 나도 신경을 곤두세울수 밖에 없었지.
그런데 긴장한게 내 얼굴에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선배가 웃으면서 그러더라고.
그렇게 긴장할 필요까지는 없고.
[그냥 조언 해주는거야. 준면씨가 워낙에 그런걸 잘 모르고 순진해 빠진것 같아서 말이야.
사람 마음이라는게 늘 한결 같을수는 없는법이거든. 준면씨 성격에 표현을 많이 할것 같지도 않고. 상대는 언제든 지칠수도 있는거잖아.
사람이라는게, 몸이 멀어지면 자연스레 마음도 멀어질수밖에 없어. 이런말 많이 들어봐서 알지?]
[...네.]
[그런 말들이 생긴 이유 또한 알고 있겠지?]
그런 케이스들을 바탕으로 생겨난 말들이겠지.
직접적으로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 표정을 보고 심중을 눈치챘는지 선배가 슬쩍 웃더라고.
어쩐지 기분이 좋지 못했어. 불안감이었던걸까.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잠이 오지 않았거든.
그래서 계속 깜박거리며 꺼지는 핸드폰의 스크린만 멀뚱멀뚱 바라보며 밤을 지새우고 말았지.
그 날 이후로 모든게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
아니, 모든거라고 정의할수는 없지. 오세훈과 나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던 무언가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고 말하는게 맞겠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오세훈의 진심을 마주하는 태도가 조금씩 변질되었다고 해야할까.
그리고 조금씩 조급함이 생기기 시작했어. 이상한 일이지?
사람이란 스펀지와도 같아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이야기들을 물 흡수하듯이 쏙쏙 집어삼키기 일쑤라지만
나는 특히나 그 정도가 심했어. 아무래도 내 스스로가 그리 요란스럽거나 외향적인 사람이 못되어서 그런 것이겠지.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던 그 균열들이 조금씩 벌어져가는걸 오세훈 그 녀석도 느꼈던지 통화를 할때마다 목소리가 좋지 못했어.
전화를 끊을때마다 매번 얼굴이 굳어있던것도 매한가지였고 말이야.
맞아, 그 길고도 괴로웠던 교육기간동안 오세훈과 나 사이에 존재하던 그 감정의 선들은
나와 그 녀석에게는 독이나 다름 없었던거야.
변질되면서 기침이나 고열등의 증상으로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인플루엔자처럼,
의심으로 인해서 기어코 변질되어버린 그 무언가도 나를 통해 빠르게 오세훈 그 녀석에게까지 번져갔었던거지.
천천히 퍼지는 독물에 중독된 사이는 빠르게 시들어갔고, 결국에는 내가 그 녀석의 연락을 먼저 피하는 상황까지 가버리고 말았지.
사실 변명같겠지만 나는 괴로웠거든.
그 녀석이 내가 한국에 없는사이, 내가 곁에 없는 사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계속해서 늘어나는 의문증과 의심들로 내 자신이 힘들어하는걸 더는 하고싶지 않았어.
맞아, 연애는 독이니까. 그리고 독은, 아무리 미약한 독이라도 꾸준히 복용하다 보면 결국엔 치명상을 입히게 되니까.
그 녀석과의 연락을 끊는 기간동안 일종의 디톡스- 오세훈 디톡스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며 버텼어.
처음에는 많이 허전한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견딜만은 하더라.
다만 내가 한가지 간과했던 사실이 있었다는게 문제였지.
입국한 날 늦은 오후, 오세훈이 집 앞에 찾아왔었거든.
막 집에 도착해서 거실에서 짐정리를 하고 있던 시점이었어.
"내 눈 피하지 말고 대답해봐요. 왜 연락 안 받았어요."
독이라는게 그 독소와 성질또한 다르듯이,
오세훈과 나에게 깃든 연애라는 감정의 성질 그리고 그 온도 또한 각자에게 다르게 작용할것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었던거지.
디톡스로 인해서 내 자신의 마음은 어느정도 추스리고 정리할수 있었다지만
오세훈이 그로 인해서 더 시들고 말라갈것이라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던거야.
개인플레이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해버리고 말았던거지. 바보같이.
일방통행이 아닐까 늘 전전긍긍하던 사람이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또 가시를 세워버리고 말았어.
결국 그 녀석이 메말라버린걸 보면 독은 또 다시 내 안에 퍼져서 날 괴롭힐텐데.
미련하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야.
"피곤해서."
결국엔 내 예상대로 또 날을 세우며 싸우고 말았어.
천천히 독이 퍼져가는걸 느끼며 나도 입술을 꾹 깨물었지.
의심이라는게 참 무서운거라서, 믿음이라는 절대공식의 성역이 그리는 경계마저도 흐릿해지게 만들곤 하거든.
내가 없었던 그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났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무것도 주지 못했던 나보다 자신에게 모든걸 다 줄수있는 그런 여자를 만났던건 아닐까.
배신감, 실낱같은 희망, 그리고 분노. 복합적인 감정들이 휘저어져 만들어진 생각의 늪은
자꾸만 나를 더욱 깊고 어두운 그 내부로 끌어들일 뿐이었어.
사실 은연중에 나도 알고 있었어.
그 녀석은 절대 누군가를 앞에두고 뒤에서 수작을 부릴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걸.
바보처럼 우직하기만 해서 꺾일지언정 스스로를 굽히지는 않을거라는 점.
다만 나는 확신이 없었을 뿐이야. 나는 이 녀석에게 준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 녀석이 왜 나를 좋아하는걸까.
떨어져 있었던 기간동안 깊어졌던 그리움의 깊이 만큼이나 깊어진 감정의 골에 새까맣게 데여버렸던 나는
그 고통의 호소를 오세훈 그 녀석에게 했던거였어. 알아, 바보같은 짓이었지.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어. 늘 연애에 있어서 이성적인 생각을 통해
냉정한 결단을 내리라며 남들에게 조언을 해줬던 내가, 정작 내 연애사에 있어서는 그런 결단력을 보이지 못했다는거야.
한없는 뜨거움을 냉정함으로 대처했던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어.
불처럼 뜨거운 그 녀석과 달리 나는 늘 냉정하기만 했거든. 그런 내 행동에 스스로 불안함을 느꼈던 거였나봐.
"변한건 너였잖아. 영상통화 끝날때마다 늘 힘겨워 보이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던건 내가 아니라 너였잖아."
"변한거 없어요. 그냥 우리 사이에 뭔가 미묘하게 틀어졌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아졌을 뿐이예요."
"변명하지마. 안 듣고싶어."
"그래서 그 틀어진걸 되돌리고 싶었던건데, 선배는 내 얼굴을 봐주지도 않으니까..."
"그만하라고 했어."
덜컥 겁이 났었어. 그래서 무작정 그 녀석의 입을 막아버리고 말았지.
그러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서 얼굴을 보니까 조금 상처받은 표정이더라고. 일방통행을 운운하면서 풀이 죽어있었을때 처럼.
그 모습을 보니까 나도 마음이 영 편하지 않았어. 어쨌거나, 나도 아직은 마음을 추스르지 않은 상태였고
갑작스러운 그 녀석의 방문에 놀란 상황이었으니까. 가볍게 문턱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것 같아서 그 녀석에게 말했어.
나중에 이야기 하자고. 조금만 생각을 해보고 다시 차분하게 이야기 하자고.
"무엇 때문에 선배가 냉정하게 구는지 잘 모르겠지만,"
"......"
"난 그대로예요. 지금도 예전처럼 선배를 안고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그냥...말해주고 싶었어요."
나도 알아.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해주고 싶었어.
알고 있었으니까. 바뀐건 오세훈 그 녀석이 아니라, 의심으로 좀먹은 내 심정이었다는걸 너무 잘 알고 있었어.
다만 그런 사소한 의심만으로도 그 녀석이 밉게 보일만큼 내 감정의 깊이가 깊어졌다는게 문제였지.
왜, 그런거 있잖아. 친한 친구와 생판 모르는 사람이 함께 있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 네 몰건을 깨뜨렸는데
그 상대가 밉다기 보다도 그 친한 친구가 미워지는 상황 말이야. 분명히 아무런 잘못도 없건만 무작정 배신감이 드는 미묘한 상황들.
그런 감정을 내가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어. 난 내가 제법 어른스럽다고 믿어왔었거든.
하지만 이번 상황에서 더욱 성숙한건 오세훈이었고, 나는 오히려 떼쓰는 어린애와도 같았다는 사실이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어.
저 말을 하고 돌아서는 그 녀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툭 질문을 뱉어내고 말았어.
방을 함께 썼던 선배가 내게 던졌던, 교육기간 내내 나를 괴롭혔던 짓궂은 질문 말이야.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 어떻게 생각해?"
사실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할거라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어.
그런데 오세훈은 그 질문에 곧바로 단호하게 대답을 하더라고.
"연애 한번도 못해본 얼간이가 할만한 소리요."
"......"
"개소리란거죠."
저 말을 툭 내던지고 다시 돌아서서 가는 오세훈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어.
아니 그 모습보다도, 저 녀석의 행동이. 나를 몇날 며칠을 괴롭혔던 저 악마같은 질문을
몇초만에 격퇴를 해버리고 유유자적 사라지는 오세훈 그 녀석의 모습이 굉장히 예상밖이었거든.
언제나 난 저 녀석이 나보다 한참 어리고 그러므로 내가 보듬어줘야 하는 상대라고 생각해왔던거야.
하지만 상황이 막상 그렇지 않다는걸 알아챘으니 충격을 받을만도 했지.
그래서 나도 그 녀석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어.
"이겼으면 좋겠다..."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이었어.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짧아져서 그런지 오세훈의 뒷모습이 까만 배경으로 녹아들어서 보이지도 않더라.
추위때문인지 콧잔등과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아려와서 결국 하염없이 서서 맨 손등이 빨갛게 물들때까지 눈가를 비빌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제서야 나와 오세훈 사이에, 아니 내가 오세훈과의 관계를 지속하는데에 일방적으로 결여되어있던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어.
간절함. 맞아, 연애를 하는 사람들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들어차있다는, 이따금씩 사람의 욕심으로 배출되는 간절함이라는 감정.
너와 나. 우리 둘을 지탱해주는 이 미세한 끈이 끊어지지 않기를.
연애와 오세훈, 너라는 사람이 내 안에서 변질된 독약으로 작용하지 않기를.
만약 독약으로 변질된다면, 그로인해 나를 아프게 만드는 지독한 증상들을 거뜬히 내가 견뎌낼수 있기를.
간절히,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었어. 그리고 그것을 견뎌내는 내 옆에 네가 함께 있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