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느리게 태양의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주변은 금방 캄캄해졌다. 조선의 학자들도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의 일식은 올 해로 벌써 다섯 번이 넘게 발생했다. 지원은 달이 태양을 가리는 것을 마당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이 날카로웠고, 끈질겼다. 일식이 일어나는 몇 분 동안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몸을 피해 숨겼다. 다들 어둠에 대해선 지나치게 겁이 많았다. 지원은 그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어둠보다 잔인한 건 그 어둠을 죽여버리는 빛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지원은 조금 안타깝기도 하면서 재밌었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시야가 밝아졌다. 지원은 문득 뒤에서 자신의 옷 끝을 잡아당기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순발력 있게 검을 뽑으려고 했으나 곧 그 사람이 익숙한 목소리를 내었으므로 관두었다. 향단이었다. 지원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되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보이는 향단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겁에 질려 있었고, 어리광을 부리려고 했다.
"내 뒤에서 무얼 하냐. 옷 놓아라, 손 다칠라."
"…나한테도 꼭 말투를 그렇게 해야 해?"
"뭐를."
"지금 네가 나한테 쓰고 있는 말투가, 다른 머슴들 대하는 것과 똑같잖아!"
"머슴한테 머슴처럼 대하는 게 뭐가 어때서?"
"……머슴이라니? 나는 엄연히! 여자잖아, 여자!"
향단은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지원에게 항변했다. 지원은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잠자코 인상을 찌푸리고만 있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열심히 대들면서도 옷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향단 때문에 지원은 살짝 거칠게 그녀의 손을 떼어놓았다.
"들어가서 밥이나 마저 지어라."
"…좀 안아주면 안 돼? 무섭단 말이야."
"뭐가 그리 무서운데."
"요즘, 자꾸 낮인데 캄캄해지구, 그러잖아. 방금도 그랬고. 무서워서 아무 것도 못하겠어."
"지금은 다시 밝아졌잖아."
"……이 꽉 막힌 것아! 됐다, 됐어!"
향단은 잔뜩 마음이 상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리며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지원은 말문이 막혔다. 부쩍 애 같은 태도를 보이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향단은 안채와 분리되어 있는 부엌에서 부지런히 쌀을 씻다가도, 범람하는 서운함을 억누를 수 없어서 가끔씩 얼룩이 묻은 낡은 치맛단으로 눈물을 훔쳐내야 했다. 지원은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훌쩍이는 걸 달래줄 맘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도 다 큰 남자가 되어 계집애를 울렸다는 게 잘한 짓 같지는 않았다.
지원은 발 소리를 죽이고 아궁이 앞에서 열심히 불을 지피고 있는 향단에게로 다가갔다. 솟구치는 연기가 따가운 건지 향단은 간혹 매운 기침을 했다. 뒤에서 말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지원을 알아챈 건 우물에서 물을 좀 더 받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향단은 항상 딱딱한 그가 미워서 그대로 지원을 지나치려고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방금 일에 대해 사과를 하러 온 것이라면 절대 받아주지 않으리리라고 향단은 짧은 찰나에 속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그를 지나쳐 부엌을 나왔다. 내심 기대했지만 그는 자신을 잡지도, 이름을 불러 걸음을 멈추게 하지도 않았다. 그럼 그렇지. 향단은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때 팔목이 잡혔다. 팔을 잡아 몸을 돌려세우는 힘에 여백이 없었다. 지원은 기껏 향단의 팔을 잡아놓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작은 몸집의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향단은 순간 울컥 치미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어서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할 말 없으면 이만 손을 놓으라고 소릴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예고 없이 지원의 입이 열렸다.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나를 좋아하냐?"
"……그러면 안 돼?"
되물었으므로, 그건 간접적으로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게 됐지만 향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편했다. 향단의 되물음에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안 돼."
"…왜?"
"좋아하지 마."
"왜!"
지원은 아까처럼 다시 말이 없어졌다.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애초에 그럴 수가 없는 건지 향단은 쐐기 같은 그의 눈 깜빡임을 보는 것만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왜 좋아해선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납득 가능한 이유라면 고개를 끄덕여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다. 이유 따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향단은 다시 한 번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 순간으로 영영 멀어지는 사이가 될 것 같아서 마음이 심란했다.
마당의 문이 열렸다. 조금 급하게 열린 문의 틈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세자빈의 절친인 찬우였다. 향단은 화들짝 놀라며 지원의 손을 억지로 떼어놓았고 지원은 그대로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오늘만큼은 향나무의 체취가 그렇게 거세지 않았다. 지원과 향단은 거의 동시에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찬우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 둘의 바로 앞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었고 입을 열었다.
"궁에 갔다오는 길입니다."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여기는 어쩐 일로."
지원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향단은 둘의 사이에서 흐르는 기류가 보통 같지 않아서 잠자코 숨을 죽여야 했다.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세자빈께서, 정말로 위험에 빠지실 수도 있단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왜 제 편지를, 진실로 읽지 않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소인이 천하여 배운 글자가 몇 개 되지 않아, 그만 오역을 했던 모양입니다."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찬우는 심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지원은 지금 꿍꿍이를 숨기고 거짓을 고하고 있다.
"당장 이 곳의 대감마님께 그대의 모든 것을 알려드릴 것입니다."
"예, 그렇게 하시지요."
"…편지를 다시 돌려주시지요. 제 말의 증거로 보여드릴 겁니다."
"죄송하지만 태웠습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예, 쌓인 편지가 많아 둘 곳이 없어 함께 태웠습니다."
향단은 복잡해지기 시작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애를 먹었다. 지원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향단의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찬우는 어이가 없어져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향단에게는 진실의 여부를 파악할 가치가 없었다. 본래부터 그와 유대가 깊은 그녀는 어떻게 물어도 지원과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편지가 사라졌다. 제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 없어진 것이다. 지원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고, 설령 찬우가 모든 것을 밝힌다고 해도 증거가 부족한 이상 사람들이 그걸 믿어줄 확률은 희박했다. 상황은 지원이 예견한 방향으로 순탄히 흘러가고 있었다.
"세자빈과 몇 년을 함께 지내셨으면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저, 도련님. 죄송하지만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가만히 있던 향단이 물었다. 지원을 꼭 중대한 죄를 지은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 신경에 거슬렸다. 찬우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아주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게 몇 분을 깊은 침묵 속에 빠져 있다가, 돌연 다시 입을 연 것은 누구도 아닌 지원이었다. 그는 조금도 뉘우칠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떳떳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말씀을 입에 올리시는 도련님도 참 이기적이십니다."
"……."
"언젠가는, 제가 직접 향나무를 뽑아버릴 것입니다."
지원을 말을 마치고 잠에 들 것처럼 웃었다. 찬우는 느리게 혓바닥을 씹었다. 머리가 아프다. 그뿐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옥의 밖에서 듣고 있던 윤형은 고개를 갸웃했다.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금 받은 궁의 편지를 이 곳에도 마땅히 알려야 할 것 같아 찾아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마당엔 이미 다른 손님이 있었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는 걸음을 돌려 다시 혜민서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으므로 윤형은 그대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문장이 애매했기에 정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윤형은 굳은 얼굴로 그 곳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세자빈이 위험에 빠질 일이 생겼다.
윤형은 차분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궁의 사람들은 위험하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었던 준회는 말할 것도 없고 그와 적지 않은 친분을 가지고 있는 지원 역시 의심해서 실이 될 건 없다. 그 둘은 하는 일을 제외하곤 별로 공통된 점이 없다. 준회, 그는 궁의 내금위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고 지원은 그저 의금부 지사의 집을 지키는 한낱 호위무사일 뿐이다. 지원에겐 궁으로부터 호명된 직책도 이름도 없다. 그는 그냥 호위무사다.
그럼에도 그 둘이 어떻게 친분을 가질 수 있는 건지 윤형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준회는 어려서부터 궁에서 무술을 익히며 자라왔다. 궁의 소속이 아닌 지원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둘이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 둘에게선 접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물으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분명 그는 알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생각이 많아져 일부러 먼 길로 돌아 혜민서로 도착한 윤형은 흑립의 끈을 풀으며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내의원에서 지내시면서 준회, 그 자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혜민서 입구에서 약재를 정리하고 있던 송 주부는 아들의 말에 잠시 손가락을 착각했다. 엉뚱한 통에 감초를 집어넣은 그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뒤를 돌았다. 윤형이 뚫어져라 이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갤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윤형은 바로 반박했다.
"그와, 정말로 단 한 번도 말을 섞은 적이 없으십니까?"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어떤 것도 묻지 말거라."
송 주부는 단호히 말했다. 윤형은 세자빈의 글씨가 쓰인 편지를 한 번 꾹 말아 쥐었다. 모든 것이 엇나가고 있었다.
"어째서 궁을 두려워 하십니까?"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건 숨 막힘이다."
"……."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잘 들어라. 궁에 출입하는 순간부터 너는 혜민서가 아닌 전하를 위해 일해야 한다."
"……."
"소신껏, 항상 소신껏 행동해야 한다. 절대로 의원의 자격에 흠이 가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거라. 어떤 부탁도 받아내어선 안 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윤형은 편지를 다시 한 번 더 읽으려다가 관두었다. 세자빈의 체온이 닿았을 편지를 쥔 손에서 약하게 떨림이 일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그는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명성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신께 간청하고 싶었다. 자신의 운을 모조리 빼앗겨도 좋으니 세자빈만은 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14
"내전마마, 빈궁마마와 저하께서 문안을 올리러 찾아오셨습니다."
궁녀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전의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한빈이 있어서 그렇게 크게 긴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느껴지는 기분이 껄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치마를 정리하며 앉는데 왕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우연적인 눈 맞춤에도 지독하게 시선을 끝내지 않았다.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만난 적은 얼마 없지만 모든 게 가식으로 점철된 사람인 게 순간마다 느껴졌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세자의 말에 왕비는 그저 가볍게 웃기만 했다.
"이렇게 보니, 서로 참 잘 어울리십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이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한빈이 옆에서 짧게 웃었다. 그런 그를 따라 웃으려다가 우리 사이를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관뒀다. 문안이라는 게, 그냥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으면 끝나는 것이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는 것 없이 마주앉은 지금 이 상황이 어색했다. 한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내 그는 몸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자, 윤을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 말에 한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을 정통으로 마주쳐서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데, 도리어 그런 내 눈치를 보는 건 한빈이었다. 왕비는 잠자코 한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저도 고심 중이니, 어머니께선 이만 신경을 접으셔도 됩니다."
"세자, 연인을 챙기는 것도 좋지만 편지를 보내는 일은 이제 차차 줄이셔야지요. 그렇게 매일 매일 윤과 편지를 주고 받다간 궁에 종이가 남아나질……."
"누가 그런 소릴 했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그녀의 말을 끊고 한빈이 강압적으로 대꾸했다. 때문에, 그가 거짓으로 변명하고 있는지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는지 나는 알아챌 수 없었다. 세자는 짧게 왕비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켰다. 왕비는 말이 잘린 것에 대해 조금 답답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한빈보다 더욱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이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봄의 끝과 여름의 시작이 뒤섞인 날씨는 조금 후덥지근했다. 내전을 나서자마자 준회가 내 뒤를 바짝 붙어 따라왔다. 곤은 그보다 조금 늦게 세자의 곁을 지키러 나타났고 눈짓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한빈은 궁을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운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아직도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지 알았지만 그로부터 사실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쨌든 그는 윤을 좋아한다. 그게 사실이다. 본처를 두고 줄곧 사랑하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건 조금 괘씸했다. 하지만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그동안 그 둘이 주고 받았던 편지가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도 아니니 나는 그냥 생각 없이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담아두시면 안 됩니다, 빈궁."
한빈은 가볍게 말하며 세자시강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는 준회와 함께 자선당 앞으로 왔다. 곤은 그 곳에 남았다.
나는 어제 준회가 건네준 주머니를 저고리 밑에 달고 있었다. 그가 사주었던 반지를 다시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으려다가 포기했다. 여전히 나는 약지에 두 개의 반지를 겹쳐 끼고 있었다. 생각 외로 한빈은 그 두 개의 반지에 대해 아무 말하지 않았다. 간혹 자신이 준 반지가 잘 있는지 예민하게 확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기분 탓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준회는 부쩍 분위기가 달라졌다. 생김새가 아닌 근본적인 것에 관한 변화였다. 딱히 무어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준회는 조금 나쁜 쪽으로 변했다. 그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고 또 그 이상한 눈은 내 앞에 있을 때만 나왔다. 이상하다는 건 참 함축적인 의미였다. 어쨌거나 전과는 다르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게 준회의 본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하께서 승하하시면 이번에도 슬퍼하실 겁니까."
말 끝이 올라가 있지 않아서, 물음이 아닌 꼭 혼잣말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게 뭔지 몰라서 한참을 골똘히 생각해야 했다. 준회는 내가 아닌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은 평소보다 고단해 보여서 방금 그런 엄청난 발언은 꼭 꿈의 한 파편으로만 느껴졌다. 준회는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그의 얼굴의 절반을 가린 두건은 왜인지 유난히 검게 보였다.
자선당 앞에서 우리는 괴상한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준회한테서 낯선 경계심을 느꼈다.
"저하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물었습니다."
"…무슨 뜻이야?"
나는 표정을 굳힌 뒤 그렇게 물었다. 어째서 준회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알게 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제가 죽는다면 저번처럼 슬퍼하실 겁니까?"
"…그만해,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소릴 해?"
"저를 사랑하시는 것 같아서, 그리 물었습니다."
준회의 말을 듣는 건 시간 낭비였다. 나는 목덜미를 휘감는 그 이상한 기류가 싫어서 말도 없이 등을 돌리고 자선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내 안색이 좋지 못했는지 자선당의 복도 옆을 지키고 있던 궁녀가 걱정스런 얼굴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대강 고갤 끄덕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체온이 돌지 않는 손이 차가웠다.
그 성격에 장난을 쳤을 리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 얼굴은 장난 따위를 담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서늘한 눈빛이 생각나서 소름이 돋아났다. 혹시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다. 준회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괜한 오해를 해서는 안 되었다. 증거가 없는 오해로 사람을 멀리하는 건 나쁜 짓이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준회의 목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이성은 그를 그렇게 판단하면 안 된다고 했고 본능은 있는 그대로를 믿으라고 등을 떠밀고 있었다. 옆구리의 상처로 통증을 호소하던 모습과 검은색의 두건이 겹쳐져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머리가 아팠다. 준회 때문에 머리가 아플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불어 왜 내가 그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고작 알 수 없는 문장 하나를 뱉은 것뿐이다. 그게 전부다. 그 속에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불안에 떨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세자가 또 죽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준회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정말로 슬퍼할 거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손을 떨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정곡을 찔린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말에 망설임 없이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한빈에게 미안했다. 아직은, 아직도 그에게 완전히 마음이 열지 못한 내가 싫었다.
"빈궁마마, 송 내의가 마마를 보러 방금 입궐하셨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궁녀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달아나고 있던 정신을 붙잡았다. 윤형이 찾아왔다. 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챙기는 그에게 괜한 모습을 보여 걱정을 끼치게 할 순 없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누가 봐도 괜찮은 얼굴로 그를 맞아야 했다.
"문을 열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윤형이 내 앞으로 나타났다. 문이 닫히고, 윤형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앉았다. 최대한 늦게 그를 만나길 바랬는데.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하십니까. 편지가 벌써 그대에게 도착했습니까?"
"어제 받았습니다."
"……."
"세자빈께선 글씨마저 참 아름다우십니다."
어제 한빈이 그렇게 투덜대며 깎아내린 내 글씨를 윤형은 한 마디 말로 그 가치를 높이고 있었다. 뻔한 사탕 발림이었지만 윤형이 해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늘 머금는 평화로운 미소를 입에 걸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함 없는 그의 태도는 불안했던 내 마음을 단숨에 고요하게 잠재웠다.
궁녀가 차 두 잔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윤형은 그녀에게 작게 고맙다고 속삭였다. 나는 그 궁녀의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았다. 저 얼굴을 하고 언제나 부드러운 마음씨를 잃지 않으니 그에게 여심을 훔쳐내기란 식은 죽 먹기일 것이었다. 그 능력을 본인이 자각하지 못한다는 게 흠이었지만.
윤형은 뜨거운 홍차를 한 번 쳐다보더니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제 모든 것을 다 하여서 전하의 치료를 돕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열기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를 채근할 마음은 없어서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낱 소인의 오해일 수도 있으나, 그래도 걱정이 되어 물어드립니다."
"……."
"그대의 호위무사를 너무 의존하셔선 안 되겠습니다."
"…그게 무슨?"
"준회, 그 혼자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현듯 지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그와 향단을 만나지 못했다. 지원이, 윤형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일까? 나는 괜히 걱정이 되어서 소반 아래로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귀인의 사람을 욕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
"그저, 정말로 그대가 걱정이 되어……."
윤형이 입술을 씹었다. 나는 애매하게 끝난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까 준회와의 일이 생각나서, 좀 더 정확히 상황을 설명해주기를 바랬지만 윤형에게 그럴 뜻은 없어 보였다. 나는 준회에 대한 모든 걸 말해주려다가, 그냥 관두었다.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곤의 신신당부가 생각나서 선뜻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윤형이 입이 가벼운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둘이 어떤 사이였는지 제게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는 내게 과거의 사실을 묻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둘이 어떤 사이인지, 가장 궁금한 건 나였다. 그저 저번에 지원이 준회를 친근히 부르던 게 떠올라 막연히 서로 이름을 알고 있는 사이라고 생각한 게 전부였다. 나는 '세자빈'이 아니라서 모든 걸 알지 못한다. 윤형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했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준회에게 의심을 가지게 됐다. 그의 진짜 모습이 궁금해졌다.
윤형은 내 침묵을 부정의 표시로 알아들었는지 말이 없어졌다. 그는 곧 본래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왔다.
"앞으로 궁에서 지내며 알게 되는 사실이 있으면 그대께 가장 먼저 일러드리겠습니다."
"예…."
그가 무엇으로 인해 저토록 심각하게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물어도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준회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과, 내가 그를 미워할 일이 생기지 않는 것과, 나를 위해 검을 뽑겠다던 그 말이 진심인 것, 그것들뿐이었다. 지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사람들이 부디 거짓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길 바랬다.
윤형은 혀로 붉은 입술을 한 번 축이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잡아야 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죄송하오나……. 입 속을 한 번 봐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게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게, 어제 달달한 과자를 먹었는데, 맛있어서 그만 너무 많이 먹어버렸습니다. 그 후로 자꾸 입 안이 욱신거리는 것 같습니다."
"혹시 입 맞춤을 하셨습니까?"
"…예?"
"오래 입 맞춤을 하시면, 일시적으로 구강 안으로 통증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윤형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굉장히 야한 얘기를 저렇게 태연하게 하는 걸로 봐선 본인이 어떤 것을 묻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입이 아프다고 해서 병원을 찾아갔는데, 의사가 대뜸 키스의 전적을 묻는다면 환자는 욕을 뱉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곳이 현대와 엄청난 시간 차이가 있는 조선이란 것을 다시 한 번 새삼 깨달았다. 그는 그저 의원으로서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단순히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황했고, 그래서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다였다.
윤형은 순순히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문득 내게 통증이 심하냐고 물었다. 난 고갤 저었지만,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입을 벌려주시겠습니까?"
나는 그가 하라는 대로 착실히 입을 벌렸다. 그가 살포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미간을 좁히며 입 속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더, 크게 벌리셔야 합니다."
그 말에 엄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두 번째였지만,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진찰을 받는 건 여전히 익숙지 않았다. 잊고 있었던 떨림이 다시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윤형이 이만 입을 다물어도 좋다고 했다. 그는 왜인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랑니가 나셨습니다."
"아…."
"혹시, 저 때문입니까?"
"……."
"…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덧붙인 말을 하면서 예전처럼 웃지 않았다. 이내 윤형은 거짓말로 웃었다.
"저하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
"사랑하고 있는 만큼 사랑 받으시면, 사랑니가 돋을 때 아픔을 조금 면하실 수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는 별 뜻 없이 계속 웃고 있었다. 나는 사랑니가 생겼다는 사실보다 지금 그의 표정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는 마치 실연 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는 내의원으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나는 굳이 고집을 부려서 그를 배웅해주겠다고 했다. 윤형은 난처한 표정을 하면서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복도를 돌아 자선당을 나섰고, 윤형은 어느 한 곳을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따라서 고개를 돌리자, 자선당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준회가 보였다. 나는 슬쩍 윤형을 쳐다봤다. 분명히 준회를 향해 곱지 않은 눈을 하고 있는 윤형의 심기가 차가워 보였다. 준회가 우리 둘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하는 인사를 윤형은 그리 정중히 받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서 흐르고 있는 기류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
"두 분이 같이 있는 걸 보시면 저하께서 노할 것이니 이만 거리를 넓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싫습니다."
"……."
"지금 이 곳에 저하가 어디에 계신단 말입니까."
나는 윤형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조금 크게 눈을 떠야 했다. 그는 여태 보여줬던 부드러움만큼이나 격렬한 적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들은 준회는 잠시 말이 없었다. 시원하게 뻗은 눈이 가득 차가움을 담고 윤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으리라고 자연스럽게 직감할 수 있었다. 윤형이 대놓고 내 옆으로 좀 더 몸을 붙여왔다.
"왜 이번에는 칼을 뽑지 않으시는지."
나의 호위무사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나는 잠자코 윤형의 말을 헤아렸다. 준회가 윤형에게 검을 뽑은 적이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결론은 그것 하나였다.
준회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윤형은 그걸 가만 바라보고 있다가, 궁의 의원들이 입는 짙은 녹색의 단령을 한 번 펄럭인 뒤 내게로 허릴 숙였다.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윤형이 필요 이상으로 가시를 세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준회가 정말 가시를 숨기고 있는 존재인지 버티기 힘든 혼란이 찾아왔다.
"…준회야, 다 이해할게."
"……."
"대신 네 얼굴을 보여줘."
준회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뢰는 사소한 순간으로 너무 쉽게 무너졌고 이제 더는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준회를 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영영 나의 호위무사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이렇게 쉽게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그의 전부를 보여준다면 다시 한 번 그를 아무렇지 않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양이 저무는 날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짧게 대꾸했다.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혹은 들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마치 방금 혀를 잘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하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가장 늦게 나온 이빨이 욱신거렸다.
/
*사랑니: 보통 사춘기 이후에 나기 시작하여, 사랑을 앓는 것처럼 아프다고 해서 사랑니로 불림.
안녕하세요 독자 님들...
너무 많이 늦었죠...
ㅜㅜㅜㅜㅜㅜㅠ 뭐라 드릴 말씀이... ㅠㅠㅠㅠ
독자 님께 항상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ㅠㅠㅠㅠㅠㅠ
한 편을 장장 삼 일을 가지고 쓰고 있었다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이무)
손에서 달팽이가 살고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당사자인 저도 참 놀랍네요 ㅎㅎ!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부디 좋은 꿈꾸시길 바랍니다!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일이세개 님
뜨뚜 님
뿌요뿌요 님
한빈아춤추자 님
또또 님
슬기 님
동동동 님
총총총 님
꾸준해 님
꾸주네 님
김한빈김지원 님
꾸욥 님
헤헷 님
페브리즈 님
햇님 님
떡볶이 님
파랑짹짹이 님
혜민서송씨 님
케빈 님
팬더 님
갠짠 님
천상여자 님
동동만두 님
눈물점 님
두둠칫 님
찌푸 님
지난지난 님
삐야기 님
친주 님
콘초 님
ㅈㅇㅈㅇ 님
엘사 님
외에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헷
비회원 독자 님들도 항상 감사해요!!
그럼 안녕!!!!!!!!
우리 부디...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만나요...! ㅋㅋㅋㅋ
전 아직 사랑니가 안 났나봐요(충격)...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