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전 편을 읽고 오셔야 이해가 가실 것 같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상 심리를 가지기 마련이다.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넌 나에게 이만큼 해줘. 뭐 이런 거 말이다. 그래는 사건의 당일 제 정신도 가누기 힘든 상태에서 술에 떡이 된 석율을 질질 끌고 택시를 태웠었다. 기사님께 주소를 적어 알려드리고 보내려는데, 세상모르고 헤롱거리는 석율에 썩 마음이 편치 않은 그래는 결국 석율의 집 앞까지 동행하고 말았다. 내가 보살이지, 보살이야. 도어락을 다섯 번을 누르고 겨우겨우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됐지만, 문제는 차가 끊겼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3만 원 가량 되는 택시비를 들이고 집에 왔는데, 다음날 출근이고 잘 시간이 5시간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석율의 얼굴이 자꾸 생각나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몇 시간을 뒤척이다가 날밤을 꼴딱 새우고 회사에 왔다.
그래서 제가 석율에게 바라는 보상이 무어냐 하면은, 그냥 어제 일에 대한 해명이다. 무조건적인 제 선행에 대한 어떤 금전적인 가치로서의 보상이 아니라, 그래는 정신적인 보상을 원했다. 대체 왜 그랬냐. 따지고 싶은 건 이거 하나였다. 근데 문제는ㅡ
“…정말 기억 안 나십니까?”
“아니 뭘? 내가 뭘 했는데?”
눈만 동그랗게 뜨고 나 몰라라, 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석율은 아무리 봐도 필름이 완전히 끊긴 듯하였다.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단다. 그럼 그냥 그 일은 완전히 잊은 거나 마찬가지인 거다. 그래는 그것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장그래, 왜 그래. 내가 뭐 실수했어?”
“우리나라는 가해자들이 참 살기 좋은 세상 같아요.”
“응?”
“죄는 자기가 다 저질러 놓고 기억 안 난다, 난 모른다, 하면 끝이잖아요. 그죠?”
묘하게 날이 선 말투와 눈빛에 석율이 움츠러들었다. 말을 해줘야 알지, 왜 그러는 건데. 탕비실을 나가는 그래를 졸졸 쫓으며 작은 뒤통수에 대고 계속해서 치대는 석율에 그래는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 일을 제 입으로 다시 꺼내기도 참 민망한 것이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던 일로 치자니 그것도 참 억울하다. 어떻게 하면 기억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래는 화를 억누르고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고뇌했다.
그래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석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 기억이 안 날 리가 있나.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필름이 끊긴 적은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어제는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그냥 취한 척, 미친 척 그랬던 것이다. 다 기억난다. 제가 그 짓을 하고 난 뒤에 그래가 망부석 마냥 몇 분 동안을 가만히 있던 것도. 제 겉옷을 입혀주고 가방까지 챙겨준 뒤에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택시까지 태워줬던 것도. 그것도 모자라 집까지 바래줬던 것도.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한석율 씨 때문에 죽겠습니다, 진짜.’ 라고 하던 투정 섞인 목소리도.
사실 그래의 반응이 궁금했다. 살짝 선을 넘을랑 말랑, 아슬아슬한 거리로 조금 더 다가가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사실 뺨이라도 맞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의외로 그래는 얌전했다. 아니 오히려 남자한테 그런 짓을 당해 놓고 하는 행동 치곤 상당히 친절하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오늘 아침에 마주치자마자 눈에 다 보이게 얼굴을 확 붉히는데, 그에 또 괜히 제가 더 부끄러워지는 것은 뭐람. 그래도 제 입으로 말하기는 차마 민망했는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따지고 싶었을 터였다. 하지만 저도 제 입으로, 그것도 멀쩡한 정신으로 그 짓을 했다고는 말하기가 참 부끄러웠다. 괜히 서로 남사스러워질 바엔 그냥 내가 모른 척하자, 하는 석율이었다. 비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다. 그것보다 가장 큰 문제는, 어제 이후로 이젠 장그래를 보기만 해도, 정확히는 그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심장이 무섭게 떨린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서로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구내식당 한 켠에 앉은 석율과 그래는 말없이 동태찌개를 퍼먹고 있었다. 밥을 이렇게 열심히 먹기는 또 처음이다. 원래 밥을 먹을 때 말이 없는 그래는 그렇다 치고, 한석율은 왜 말이 없는지. 평소 그의 수다를 반찬 삼아하던 식사였는데 이렇게 조용하게 있으니 음식 씹는 소리까지 다 들릴 지경이다.
물론 석율도 석율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바로 고개를 들면 장그래가 있고, 문제 유발의 그 눈동자가 있는데, 식판에 고개를 처박고 조용히 밥을 먹을 수 밖엔 없었다. 평소대로 눈 마주치고 도란도란 얘기할 강심장은 제게 없었다. 지금은 그냥 장그래 이름만 생각해도 머릿속에서 펑펑 불꽃이 터져대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저기, 다 먹었으면….”
“응? 아, 그래. 응. 가자.”
석율은 아까부터 묘하게 그래의 눈을 피했다. 방금도, 저를 보지 않고 엄한 식판을 보며 말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말을 더듬기까지. 분명 아까 만났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는 그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갑자기 뭔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서서히 눈을 크게 떴다. 눈. 눈이 문제라고 그랬다. 너는 그 눈이 문제라고, 쳐다보지 말라고 그러던 그의 주정이 생각났다. 혹시 뭔가 기억이라도 난 건가? 그래는 식당을 나서자마자 석율을 이끌고 다급한 걸음으로 야외 휴게실로 향했다. 그리고 제 양 어깨를 잡고 비장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그래에 석율은 밥을 먹자마자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정말, 심장에 해롭다.
“한석율 씨.”
“응…?”
“기억났습니까?”
“뭐가?”
“어제 일. 기억났냐고 물었습니다.”
또 그 얘기다. 그래도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긴 쓰였나 보다. 뒤끝 없는 장그래가 이렇게 집착하는 거 보면. 묘하게 기분이 붕 뜬 석율은 비실비실 웃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의 눈에는 그저 얄밉게 보였겠지만.
“기억 안 난다니까?”
“제 눈 보고 얘기하십시오. 아까부터 왜 자꾸 제 눈 피합니까?”
정곡을 찌른다. 그에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눈을 마주치는데, 심장이 즉각 요동치는 것이 3초 이상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다. 그래서 괜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그 방향대로 장그래의 동그란 눈도 뒤따라온다. 사면초가, 진퇴양난, 낙장불입…. 뭐 이런 말들이 석율의 머리 위로 둥둥 떠다녔다.
“기억 안 나면 기억나게 하세요. 제 눈 봐도 기억이 안 납니까?.”
“아니,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니까….”
아차. 석율이 황급하게 입을 닫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터. 양팔을 붙잡고 있던 그래의 손이 스르르 풀리고, 석율은 입을 어버버. 눈을 얇게 찌푸리고 쳐다보는 것에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른 뜻으로 심박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기억하네요?”
“…저기, 장그래ㅡ”
“아, 원래 기억하고 있었나?”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방금 기억났다고 말하기에도 이미 타이밍이 늦었다. 화난 표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웃는 표정도 아니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래가 등을 홱 돌렸다. 저 새침데기 같은 태도는 대체 뭐지? 이제 내가 기억도 났겠다, 제 입장에서는 따질 거리가 생겼으니 쌍수 들고 반겨야 할 판 아닌가? 팔짱을 끼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래의 뒤를 석율이 질세라 쫓았다. 그리고 어깨를 잡아 돌리는데, 뒤이은 표정에 석율은 아, 하고 탄성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래의 눈이 잔뜩 빨개져선 앞머리에 찔끔, 눈물로 추정되는 액체가 고여있는 것이다. 눈 한 번 깜빡하면 당장이라도 툭하고 떨어질 기세였다.
석율은 그에 목구멍이 탁 막혔다. 우는 여자와 우는 아이는 잘 달래지만, 눈물 찔끔 고인 장그래는 달래는 법을 모른다. 행여 눈물이 떨어질까 눈 한 번 깜빡 안 하고 독기 서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에 석율은 어…, 아…. 등 멍청한 언어만 내뱉고 있다.
“저한테 왜 그랬습니까.”
“…미안해.”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전 묻고 싶은 겁니다. 또 그냥 장난이었습니까?”
“장그래. 일단 들어가서ㅡ”
“전 요즘 한석율 씨 때문에 아주 미치겠습니다.”
어쩐지 울음이 가득 담긴 떨리는 목소리로, 약간 격앙된 어조로 그래는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관둬야 하는데, 이미 잔뜩 차오른 감정은 주체할 수가 없다.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는 겁니까. 안 그래도 힘든 일 많은데,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합니까.”
“장그래…?”
“저 놀리는 거면,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장난 치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장그래의 말들 속에서 뭔가 하나가 스멀스멀 떠오른다. 미치겠다고 했다. 힘들다고도 했고. 그리고 나 때문이라고 했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석율이 그래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없이,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그래의 손목을 잡고 가까운 비상구 계단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석율의 행동에 뭐 하자는 겁니까, 하고 석율을 보는데 그의 얼굴은 저와 다르게 어쩐지 표정이 좋다.
그냥, 이유도 없이 근거도 없이 그냥 뭐든지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있다. 석율이 지금 그런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저를 째리며 씩씩거리는 그래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쩐지 그래의 말을 듣고 나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냥 해보는 거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니까. 입꼬리를 씩 올리며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석율에 그래는 벽에 등을 기대다시피 했다. 저 의미심장한 웃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장그래. 너 그거 알아?”
“뭘…. 말입니까.”
이 역전된 상황은 뭔가. 제가 구석에 몰리고 있는 꼴이라니.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그래는 눈을 둘 곳을 잃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그래의 앞에 가까이 다가선 석율은 눈을 대각선 아래 방향으로 깔고 있는 그래를 보며 피식 웃더니,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넌 그 입술이 제일 문제야.”
무슨 말이지, 5초 정도 생각하다가 뭔가 떠오른 듯 번뜩, 눈을 크게 뜨고 석율을 바라보는 그래다. 아니, 살짝 올려다본다는 게 맞는 걸까. 그리고 몸이 먼저 본능적으로 밀어내야 한다고 느끼는데, 석율의 행동은 그보다 빨랐다. 실실 예쁘게도 웃는 그 입술이 내려와 제 입술에 그대로 안착한다. 다소 까끌거리지만 말캉하고 따뜻한 그 이상야릇한 촉감에 그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고, 심장이 뛰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기분이다. 그건 석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가만히 몇 초 동안을 있었을까, 숨쉬기가 힘들다고 느껴졌을 즈음 석율이 한 번 더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리고 한 발 짝 떨어져서, 하지만 여전히 가까운 거리인 채로 숨을 고르는 그래의 머리를 천천히 다정스레 쓰다듬었다.
“아무리 장그래가 바둑만 두면서 살았다고 해도 말이야.”
“…….”
“설마 내가 너한테 왜 이러는지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래는 아까 그 상태 그대로 입을 꾹 다문 채 더 그렁거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입을 열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 사이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아직도 눈치를 못 챈 것 같은 표정에 석율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또 분명 장난이니 뭐니 할 것 같아 석율은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꺼내지도 못하게 못을 박아두기로 했다. 근데 일은 실컷 다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긴장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목을 몇 번 큼큼거리던 석율은 침을 꼴깍 삼키고 비장한 표정으로 그래의 양팔을 붙잡았다.
한석율 인생에 이처럼 멋없는 고백은 또 처음이다.
“장그래.”
“…….”
“좋다, 네가.”
“…예?”
“내가 너 좋아해서 이러는 거야. 장난이 아니라.”
석율의 말과 동시에, 아까부터 떨어질 듯 말 듯 달랑거리던 그것이 이윽고 그래의 눈에서 한 방울 툭, 하고 떨어졌다.
“제발 네 이름다운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누구 심장이 더 빨리 뛰나 대결이라도 하듯,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드럼 소리 마냥 비상구를 가득 울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오늘 드디어 한 고비를 넘겼네요 ㅠ▽ㅠ 여기까지 같이 달려온 독자분들 기다리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석율이 고백이 좀 담담하고 무미건조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화려한 말들 잔뜩 늘어놓는 것보다는 이쪽이 석율이한테 좀 더 어울리는 듯싶어서... ㅎㅅㅎ 아무튼 드디어 진도가 나가서 홀가분하지만 이제 또 시작이네요... 앞으로도 같이 쭉쭉 달립시다! 아 연재 텀이 좀 길어서 죄송해요ㅠㅠ... 요즘 알바하고 자격증 시험 공부 병행하느라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네요ㅠㅠ 최대한 빨리 오도록 노력할게요! 그리고 암호닉 분들! 보리님, 홍삼님, 교촌치킨님, 망고님, 젤링젤링님, 키보드님, 떡볶이님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봬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