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W. 됴뤠이린
(BGM: 장세용- 이상기억)
<上>
종인이 눈을 떴다. 흰색 바탕에 푸른색 줄무늬 이불, 회색빛 천장, 회색빛 벽. 또다시 알 수 없는 시공간이다. 빛이라 하기도, 어둠이라 하기도 애매한 허공에서 종인은 한 쪽 팔을 꺼내 들어 휘휘 저어보았다. 우선 시각은, 정상. 그리고 들어 보인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의식과 감각도 정상이다. 또다시 이 공허한 곳에 놓아진 걸까. 종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한 생각으로부터 다시금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또한 줄무늬 이불이 덮여 있는 것을 보아 이곳에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도 확신했다.
"아아."
목소리도 나온다. 이제,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종인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딛고 선 바닥은 평범한 마룻바닥이다. 이 역시 회색.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불을 제외하면 죄다 회색이었다. 애매해서 사람을 미치기 일보직전으로 만드는 색감이랄까. 어쨌든 종인은 바닥을 딛고서 걸음을 슬슬 떼어 보았다. 어딘가는 분명 문이 있을 테지. 이 곳에 들어왔다면 나가는 곳 또한 분명 있기 마련이니.
"경, 수."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어 본다.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것 같은 단어라고는 일단 '경수'라는 그 말과, '나는',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종인'이라는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해본다.
"경, 수. 나, 는, 종, 인."
어딘가에 '경수'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 만으로도 충분히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인은 그 말들을 반복하며 그 공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경, 수, 나, 는, 종, 인.
문이다. 종인이 문을 발견하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말았다. 그 앞에는 한 소년이 서 있다.
어, 사람이다. 사람을 발견한 종인은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입은 아무 소리나 내뱉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종인도, 그 소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서로를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어났어요."
살짝 내려가는 끝부분의 어조로 판단했을 때 방금 그 소년의 말은 누군가에게 고하듯 말하는 평서문과도 같았지만 종인은 직감적으로 그 말이 의문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어났어요? 아마 소년이 물어보고 싶은 말일 것이다.
"일어났어요."
그래서 종인은 자신이 들은 대로, 소년에게 똑같이 대답해 주었다.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더 늘었다. 나는, 종인, 경수, 그리고 일어났어요.
"나, 는, 종, 인."
종인도 모르는 사이 종인의 입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나온다. 뜬금 없는 그 말에 헛웃음이 나올 법도 하지만 소년은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친다.
"알아요."
어떻게 아는 걸까. 종인은 순간 고민했다. 그러나 그 말을 던지듯 내뱉고 돌아서 어딘가로 걸어가는 소년을 보고서는 헐레벌떡 자신도 그 뒤를 따랐다. 그 공간을 나와 새로 맞이한 공간은 아까 그 곳보다 조금 더 밝은 색을 띠고 있는 연회색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 식당인 것 같았다.
"배고파요."
소년이 배가 고프다는 것이 아니라, 종인에게 배가 고프냐고 묻는 말이었다. 종인은 또다시 소년의 말을 똑같이 따라 대답했다.
"배고파요."
그러자 소년은 한 구석에서 무언가를 가져와 식탁에 올려 놓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먹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종인은 소년이 차려준 음식을 한 조각 들고 입에 넣는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맛에서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인은 그 음식을 하나 더 집어들었다. 소년은 음식을 입에 넣고 있는 종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말 해봐요."
갑자기 말을 해 보라니, 상당히 뜬금 없는 소년의 말에 종인은 살짝 당황했으나 음식을 먹기 전과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방금 입에 넣고 삼킨 음식이 마치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라도 되는 것처럼,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당신은 누군가요."
종인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소년은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용조용히,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
종인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다. 아주 오래전부터 입에 붙어 있던 것처럼, 계속해서 입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는 그 단어가 계속해서 뛰논다.
"…경수."
그 단어를 발음하는 감각이 왠지 모르게 생경하다. 그러나 눈 앞에 보이는 소년의 모습은 그와 상반된 느낌을 자아낸다.
"맞아."
저를 향해 웃어보이는 소년의 미소는 전혀 생경하지 않다.
"내가 경수야."
익숙하다. 잊고 있던 감정이 다시 돌아오리만큼.
*
경수가 차려 준 음식을 다 먹고 난 후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했다. 경수의 말에 추임새도 넣을 수 있을 만큼 대화가 자연스러워졌다. 이제야 진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종인이 웃어보이자 경수가 따라서 웃어보인다.
"경수."
"응."
"여긴 어딘가요."
즉각적인 '네'라는 대답과 달리 방금 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쉽사리 들려주질 않는다. 그러나 종인은 경수가 대답을 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 경수는 제 앞에 놓인 머그컵을 집어 들고는 담겨 있는 찻물을 다 마신 뒤에야 입을 열었다.
"세상이야."
"…세상."
"종인 씨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세상."
그러나 종인은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 지 못한다. 지금으로서는 세상이라는 것이 시간적 개념인지 공간적 개념인지조차 구분이 제대로 되질 않는다. 그러나 경수에게 더 물어봤자 다른 대답을 줄 것 같지도 않아 종인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 이곳에서 눈을 뜨기 전, 어차피 사람 한 명만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 않았던가. 시간과 공간적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저와 같은 사람 한 명만 있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지 않았던가.
"경수."
"네."
"눈을 뜬 순간,"
"……."
"당신의 이름이 생각났어요."
"……."
"당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었어요."
종인의 말에 경수가 흥미롭다는 듯 웃어보인다.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는다. 종인은 조금 머쓱해 제 앞에 놓인 머그컵으로 잠깐 시선을 준다. 아까 경수가 준 음식이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같다면 이 차는 신들의 음료수인 넥타르와 같을까. 그 생각을 하며 종인은 차를 한 모금 마셔 본다. 그러나 아까 전과는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소품에 불과한 모양이다.
"경수."
"네."
"나는 당신을 알았나요."
세 번째 부름, 그리고 또 하나의 물음. 그러나 이 물음은 아까 전의 두 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종인도 이 물음에는 분명 무게를 실었을 것이다. 어째서 자신이 경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는 분명히 풀려야 마땅할 미스테리였다. 눈을 떠 인간의 세계에 왔다고 느낀 순간 바로 앞에 나타난 사람이 어째서 경수일 수 있는지. 알아내야 했고, 알아내고 싶었다.
"나는 종인 씨를 알고 있었어."
그러나 들려오는 답은 질문의 의도와는 약간 거리가 먼 듯한 말이다. 조금 의기소침해진 종인이 또다시 제 머그컵을 내려다보았다. 이 차를 몇 모금 더 마셔보고 나면 자신의 의문도 풀리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 다시금 경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알았으니까,"
"……."
"아마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뭐, 이 정도면 50%는 만족할 만한 답이다. 적어도 묻는 말에는 대답했으니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도록 한다. 종인이 남아 있던 차를 전부 마신다. 좋은 차향 사이로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
"조금 더 자, 종인 씨."
"…네?"
"조금 더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거야."
경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금씩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진다. 아, 아아. 머리가 어지럽다. 경수가 앞에 있다는 것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는데, 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보이는가싶더니 시야가 온통 밝은 오렌지색으로 가득 찬다. 이따금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고, 그 말을 들으려 귀를 기울일 수도 없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 기보다는 움직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 위에서 무언가 휙휙,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세상이 개벽이라도 하듯이.
핏빛 자오선
W. 됴뤠이린
그렇게 몸을 떠나있던 의식이 조금씩, 조금씩 돌아온다.
"아아."
아까 전에 눈을 떴을 때와 같은 파란 줄무늬 이불이다. 그리고 또다시 보이는 회색 벽. 짧은 시간인 것 같지만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문을 열어보면 아까처럼 경수가 서 있을까. 종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문을 찾는다. 찾다 보면 어느샌가 눈에 보이게 되는 문.
문이다. 마침내 문을 찾아냈다. 종인은 살짝 긴장해서는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그 순간,
"어어?"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경수가 아니었다. 경수와는 전혀 달리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였다. 큰 키에 파란색 야구잠바를 입고, 똑같은 색깔의 스냅백을 쓰고 있는 제 또래의 남자. 평범한 검정색 옷만 입고 있던 그런 경수는, 경수는 없는 걸까.
"경수는 잠깐 밖에 나갔어."
생각으로만 하려고 했던 것을 실수로 입 밖에 내어 버린 모양이다. 그 남자가 웃으며 말한다. 남자는 왠지 신이 나 보이는 듯하다. 종인의 손목을 이끌고 문 밖으로 간다.
"저기, 그쪽은 누구신지…."
"나? 박찬열. 경수 친구."
백과사전마냥 일목요연하게 자신의 정체를 설명해주며 방을 나온 찬열이 소파가 있는 곳에 멈춰 선다. 그곳에는 아까 경수와 함께 있을 때 사용했던 식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소파를 보아하니 이번에는 거실인 것 모양이었다. 창문도 달려 있다.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에는 연회색과 아이보리의 중간 정도 색깔이 전체적으로 발려 있다. 창문은 블라인드로 가려 있어서 바깥을 볼 수가 없었다.
"앉아, 여기."
찬열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종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텔레비전을 틀었다. 종인은 텔레비전에 무슨 화면이 나오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종인이 궁금한 것은 그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경수는 어디로 갔는지. 두 번째, 찬열이라는 사람은 왜 여기에 있는지.
"경수는 언제 오나요."
"곧 올 거야."
찬열이 거실 탁상 위에 있던 병 하나를 집어들어서는 종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앉으라고 말했던 것처럼 짧게, 명령하듯 말한다. 마셔, 이거. 종인은 그저 담담히 그 병의 뚜껑을 따고 슬며시 내용물을 확인해 본다.
"내가 독약이라도 줄까봐."
"……."
"안 죽여, 마셔."
그제야 종인은 될 대로 돼라, 는 식으로 병을 들고 음료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전에 경수가 자신에게 준 차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깨달음'과도 비슷한 감정이 갑자기 몰려오기 시작한다. 이 음료는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다. 병에 들어있는 음료를 몽땅 다 마신 종인이 탁상에 빈 병을 내려 놓으며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한다.
"찬열."
"좋아, 이제 기억이 나는가보군."
그 이름 이외에 특별히 기억이 나는 것은 없었지만 종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어차피 서서히 겪으면서 상기하는 것이다, 기억이란 것은.
"김종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네."
"여기는 '세상'이야. 하지만 네가 알고 있던 세상과는 다를 거야."
"……."
"여기서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네가 할 일을 하는 데에 나와 도경수를 비롯한 주변 인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사람이 또 있습니까."
종인의 질문에 찬열이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종인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어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경수는 친구가 많아. 그러니까 도경수의 친구는 너의 친구이기도 하지."
"…네."
"몇 번 눈을 떴지, 네가?"
몇 번 눈을 떴냐니. 아, 종인은 직감적으로 푸른 줄무늬 이불을 덮고 잠에서 깨어난 적이 몇 번이냐는 것으로 그 질문의 뜻을 이해했다. 그것은 찬열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만."
"두 번째라…."
찬열이 탄식 비슷한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너도 느꼈겠지만,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세상이 조금씩 변할 거야."
"…변한다고요."
"그래. 마치 지구가 자전하는 것처럼, 세상은 조금씩 변할 거야. 건물의 구조, 위치, 이런 것들도 전부."
종인은 첫 번째에 도경수를 만났을 때에 이 장소에 식탁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이번에는 거실이었다. 찬열의 말대로 집의 구조가 한 번 바뀌어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시공간의 변화를 보이는 곳이라면 몇 차원쯤 되려나. 적어도 5,6차원은 되지 않을까싶다. 하지만 뭐, 이곳이 어떤 곳이든, 몇 번째 차원을 따르든 상관은 없다. 차원 안에 경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나가 볼래?”
“어딜….”
“집 밖.”
찬열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던 종인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현관문이 있는 데까지 가더니 신발장에서 신발 하나를 꺼내 종인의 앞에 놓아주었다. 종인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얼추 크기는 들어맞는 것 같았다.
"여기서 나가면 뭐가 있는데요?"
종인의 물음에 찬열이 신발을 신다가 종인을 보고 빙긋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오늘은 길거리가 있더라고."
"길거리요?"
"응. 중간에서 경수를 만날지도 몰라. 그러니까 가자."
경수의 이름을 듣자 종인이 재빨리 신발을 신기를 마치고 벌떡 일어나 선다. 종인이 준비되었음을 슬쩍 확인한 찬열이 문고리를 잡고 힘을 주어 돌린다.
문이 열리자마자 종인은 눈을 찌푸려야 했다. 바깥의 풍경은 지나치게 밝았다. 온통 밝은 원색이다. 어떠한 다른 색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원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우리가 아는 그 색깔들. 하늘은 정말로 채도0, 명도0의 파란색을 띠고 있고, 풀밭은 푸릇한 초록색, 마치 게임 화면과도 같은 풍경에 종인은 입을 쩍 벌리고서는 채 다물지를 못했다.
"신기해?"
신기하냐고 묻는 찬열의 말에도 종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 질문조차도 듣지 못할 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종인이 집 밖으로 조심스레 한 걸음을 떼어 보았다. 발바닥을 통해서 이상한 감각이 전해진다. 일반 바닥처럼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물렁물렁하지도 않은 반점성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법한, 그런 소재의 땅이다. 왠지 신이 난다. 아이처럼 바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종인은 몇 발자국을 더 움직여 보았다. 밖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이곳의 공기가 더욱 선명해진다. 어떠한 향이 있지는 않지만 이곳의 특유한 공기의 기운이 느껴진다. 기분이 좋다. 놀이공원에 놀러온 6살배기 꼬마가 된 것처럼 들뜬다. 정말로, 기분이 좋다.
"우리 갈 데 있어."
그리고는 찬열이 종인을 잡아 이끌었다. 종인은 찬열이 자신을 끌고 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찬열이 이끄는 대로 딸려 간다.
"좀 멀 거야."
그러다가 종인은 문득 이 완벽한 상황에 무언가 하나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경수는요?"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
"그리고 경수가 너보다 형이야, 인마."
형. 종인은 그 단어를 조용히 곱씹어 보았다. 종인은 자신의 나이를 모른다. 사실 찬열에게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나이에 관한 개념을 잊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찬열은요?"
"나도 경수랑 똑같아."
그렇다면 찬열도 종인이 '형'이라고 불러야 할 대상일 것이었다. 이 때까지 자신이 찬열을 뭐라고 부르고 있었더라, 생각해보던 종인은 방금 전을 빼고 자신이 찬열을 직접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름을 빼고 할 말만 턱턱, 내뱉었던 것 같다.
"이쪽으로 와."
찬열이 가던 방향에서 45도 정도 틀어진 방향으로 종인을 이끌었다. 그러니 저 멀리 있는 푸르디 푸른 하늘에서, 희미한 빨간색의 띠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도록 상반된 성향의 색깔이라 종인이 조금은 놀랐다.
"저게 뭐예요?"
"우리가 보러 가야 하는 것."
찬열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걸음을 조금 더 빨리 했다. 종인도 그런 찬열을 묵묵히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자신이 찬열을 따르는 것인지, 저 빨간 띠에 홀려 저도 모르게 이끌려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카디절을 기념하며 올립니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현재글 [카디] 핏빛 자오선(Bloody Meridian): <上>
10년 전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키 인스타도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