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똥 같은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지더니, 이윽고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다. 히끅 소리를 내며 벽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은 그래에 석율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 앞에 같이 쭈구려 앉았다. 아까는 화가 나서 눈물이 고여있던 거라고 치자, 그러면 지금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너무 성급했나? 하긴, 장그래는 남자를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럼 화가 날법도 하다. 남자 따위한테 기습 키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뽀뽀, 라니. 게다가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패기로운 고백까지. 한없이 소심해진 석율은 그래의 이름을 연신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깨의 들썩거림이 조금씩 작아지더니, 푹 처박고 있던 작은 고개가 일어선다. 소맷자락으로 얼굴에 범벅이 된 눈물을 닦으려고 하는 그래의 손목을 제지하고, 석율이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쥐어 주었다.
“어…. 저기, 장그래. 미안해.”
“…뭐가 미안하단 겁니까?”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지, 너는 나 싫어하는데….”
사람 혼은 있는 대로 다 빼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린가. 그래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꾹 참았다. 한석율은 이상한 데서 언밸런스한 순수함을 갖고 있다. 싫다 싫다 한다고 정말로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고 있다니. 저도 모르게 눈이 접히는 것을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가렸다. 그리고 몰려드는 정적과 쪽팔림. 이게 그렇게 서글프게 울 일이냐 묻는다면은, 그냥 가슴이 벅차서 감당 안 되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혼자서 앓다가 말아야지, 꽁꽁 숨겨야지, 했던 마음이 상대방과 통했다는 것도 그렇고, 자기는 조심스럽고 겁이 나서 감히 입 밖으로 꺼내려고 생각지도 못한 말인데 용기 내어 말해준 석율이 고마워서. 그리고 놀라워서.
울상을 짓고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 석율을 보며 그래는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에 오스스 소름이 끼쳐서, 피어오르는 웃음을 거두고 손수건을 접어 석율에게 건네며 일어섰다. 처음에는 눈치 백 단인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이만한 바보가 없다.
“한석율 씨.”
“응…?”
“왜 그렇게 눈치가 없습니까?”
“…어?”
“여자 마음은 그렇게 잘 안다면서요.”
“…그렇지.”
“아, 남자 마음이라 모르는 건가?”
석율은 눈동자를 바삐 굴렸다. 실컷 울고 나서 뺨이라도 때릴 줄 알았건만, 하는 첫 마디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저는 이만 가봅니다, 하고 그래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석율은 우두커니 서있었다. 세상 여자들 마음 빤히 알아봤자 뭐하겠는가, 정작 제일 중요한 장그래 마음 하나 모르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래의 말을 곱씹는데 번뜩, 하고 떠오른 것이 있으니.
그래서 대답은?
그래의 입술이 쉬지 않고 씰룩거린다. 밀린 업무들을 잔뜩 떠넘겨줘도 비실비실, 바쁜 와중에 커피 심부름을 시켜도 방긋방긋, 쓴소리를 해도 헤헤헤. 그에 수상한 눈초리로 그를 지켜보며 쑥덕거리는 차장님과 과장님, 대리님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나 보다. 어디 언제까지 실실거리나 보자, 가만히 지켜보던 차장님이 참다못해 소리를 빽 지른다.
“야 인마, 너 왜 그렇게 칠푼이 팔푼이 마냥 웃고 다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네? 제가 웃고 있었습니까?’ 라는 어벙한 말뿐이다. 의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웃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헤집고 나오는. 그러거나 말거나, 보기 좋게 차장님을 향해 빙그르르 웃어보인 그래는 여전히 싱글벙글이다. 네가 좋다, 라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한석율의 말 때문이다. 그에 하루 종일 아이 마냥 기분이 붕 떠선 조절이 안 된다. 하늘에 떠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부유감을 억누르려 입술을 꽉 짓이기는데, 조금 전에 석율의 그것이 닿았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또 이 자식이 말썽이다.
데스크 위에 뒤집어둔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린다. [이따가 끝나고 좀 보자.] 라는 한석율의 문자. 아까 대답도 없이 그냥 나와버려서 그런지 또 분명 혼자 안절부절 엄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 문자 하나 보내는데 또 얼마나 손톱을 물어뜯었을까, 생각하니 또 절로 웃음이 튀어나온다. 답장마저 안 해주면 이제 아래층으로 내려올 기세라 알겠습니다, 하고 답문을 했다.
“술 마시자.”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한석율이 얼굴을 보자마자 한 첫 마디였다. 술집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우리 대화 주제가 참 거시기 할 텐데? 허나 카페에서 얘기할 수도 없고, 회사 앞에서 얘기할 수도 없다. 그에 별 말없이 석율을 따라간 그래는 맥주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남자 둘이서 맥주 한 병 시키고 앉아 있기를 한 시간 반. 별다른 대화가 오간 것도 아니다. 석율은 그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긍정의 답이든, 부정의 답이든 뭐라도 듣지 않으면 복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오가고 있지만, 그래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제는 제 차례인 것을.
“저기, 한석율 씨….”
무거운 입술을 떼내자, 번뜩 한석율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저를 쳐다본다. 근데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곳이 하필 그 입술이라, 그만 말문이 턱 막혀버려서 고개를 돌린다. 좋아합니다. 다섯 글자뿐이 안 되는 말인데, 그게 참 어렵다. 난생 이런 낯부끄러운 말은 꺼내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 처음이 남자이니 어찌 그게 쉽겠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바둑만 두지 말고 어머니 말마따나 연애도 좀 해둘 걸 그랬다.
“저기, 저…. 하아….”
주먹에 손을 불끈 쥐고 말을 이어보지만, 무리다. 한숨을 쉬는 것과 동시에 한석율의 어깨도 축 처진다.
“됐어. 미안해서 그런 거지? 괜찮아, 애써 말 안 해도 돼.”
역시 잔뜩 오해를 사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고, 나도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벌써 마음속으로는 백 번도 더 말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알콜의 힘이라도 빌리자 싶은 그래는 맥주가 가득 찬 제 잔을 원샷 하더니, 제 앞에 있는 석율의 잔 또한 원샷 한다. 놀란 석율은 그 와중에도 장그래가 많이 화났구나, 내가 괜한 말을 했어ㅡ 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중이다.
“데려다 줄게, 장그래.”
“에? 아이, 괜찮습니다.”
“너 좀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저번 일도 갚을 겸 그래. 얼른 타자.”
맥주 두 잔을 연달아 들이킨 뒤 얼굴이 발개진 그래에 석율은 술집을 나서 아무 택시를 잡고 그래를 밀어 넣었다. 그 옆에 앉아 갑갑함에 창문을 열고 목을 죄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나 이렇게 차이는 거구나ㅡ 하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지만, 제 마음을 알았을 때부터 이미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냥, 만약에, 혹시 모르니까, 라는 그 몹쓸 심리 때문에 실망감이 배로 밀려올 뿐. 창문을 보며 한숨만 푹푹 쉬어대는 석율에 그래는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취한 건 아니고, 약간의 취기가 오를 뿐이다. 용기를 위한 취기 정도? 아무렴 맨정신 보다야 훨씬 낫겠지, 하는 생각에 그런 건데 한 잔 더 마실 걸 그랬다. 그래도 아직 입술이 바싹바싹 탄다.
택시에서 내려 인적 없는 골목길을 걷다가, 높고 험한 계단 앞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걸음을 멈췄다. 노란 가로등 불빛에 의존해서 서로의 표정을 겨우 살필 수 있었는데, 고개를 돌려 바라본 석율의 울적한 얼굴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인다.
“장그래.”
“네.”
“미안해. 넌 원하지 않는데…. 내 생각만 하고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뭐가 그렇게 미안할 일인가. 제 얼굴도 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는 석율에 그래는 가슴 한 켠이 아릿해졌다. 하지만 그게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다. 저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한석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마음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미안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하니까.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는 적당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취기도 좋고, 조명도 좋고, 제 앞에 있는 한석율은 더욱이 좋았다. 그래서 의외로 어렵지 않게 입을 열 수 있었다.
“내가…. 원하고 있다면요?”
“…?”
“한석율 씨가 저한테 좀 더 닿기를, 저한테 말 한 마디 더 걸어주기를. 제가 바라고 있다면요?”
덤덤한 그래의 말에 석율은 뜻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가 한석율 씨를 원하고 있다면. 그럼 어떻게 할 겁니까?”
그리고 뒤이은 그래의 말에, 석율의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눈이 저도 모르게 크게 뜨이고, 입이 벌려진다. 하지만 그래는 그걸 아직도 제 말을 이해 못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전쟁터에서 최종병기를 집어 든 병사 마냥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석율의 침이 더러 꼴깍 넘어간다.
“한석율 씨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확인 사살. 죽을 듯이 뛰는 심장의 고동이 이제 제 귀까지 닿을 지경이다. 눈 딱 감고 지른 고백에 응답이 시원찮은 상대 때문에 그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미루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한석율 씨도 저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어? 아니, 어. 맞지. 당연하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면서요. 근데 뭘 그렇게 꾸물댑니까.”
“…….”
“혹시 이제 와서 미룰 생각이라면, 절대 안 됩니다. 저 마음 단단히 먹었….”
가슴이 벅찼다. 너무 벅차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이 마음을 대체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데, 저도 모르게 뾰로통한 그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툭, 하고 석율의 손에 들렸던 브리프 케이스가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석율의 얼굴이 점점 제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서로의 코가 닿을까 말까 하는 거리에서 석율이 푸스스, 웃고 말았다.
“너야말로 미루지 마.”
전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하려던 말을 석율의 입술이 그만 먹어버렸다. 제 양 볼을 소중한 듯이 감싸고 입을 맞춰오는 석율에 그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알싸한 맥주 향과 석율의 체향이 섞여 아찔하게 코를 찌른다. 그게 간지럽기도 하고, 또 설레서 저도 모르게 웃고 마는데, 그 입술 사이로 뜨거운 무언가가 밀려든다.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빳빳해지고 눈을 크게 뜨고 마는데, 그 말캉한 것이 더 깊숙이 파고든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안을 맴돈다. 말캉한 혀가 치열을 훑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고, 심장은 두근두근, 쿵쾅 쿵쾅이 아니라 이제 덜컹덜컹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질적이지만 한 편으로 느껴지는 아릿한 쾌감에 그래는 그 짜릿한 감각을 더욱더 느끼고 싶어 본능적으로 석율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에 더 자극을 받은 석율은 그래의 어깨와 등, 허리를 차례로 훑으며 고개의 각도를 달리해 입안을 탐한다. 온몸에 전류 같은 짜릿함이 퍼져 그래는 눈물이 찔끔 고였다. 얼마나 더 혀들이 엉키고 엉켰을까, 석율이 입술을 핥으며 떨어지는데, 저도 모르게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그래는 침을 꼴딱 삼켰다.
“…장그래.”
저를 끌어안은 석율이 귓가에 나지막이 제 이름을 불렀다. 그 음성이 너무 달콤하고, 또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느껴져서 입가에 미소가 일렁인다.
“장그래. 그래야.”
“한 번만 불러도 알아듣습니다.”
“좋다. 진짜 너무 좋다.”
제 어깨를 더 꽉 감싸 안는데, 제 온몸을 감싸는 한석율이 너무 좋아서. 그 체온이 너무 좋아서 나도 좋다는 말 대신에 그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 순간, 우리가 뭘 버려야 하는지, 뭘 잃게 될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기쁜 일들도 많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불행한 일도 많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모두 다 알지만, 그냥 아무 말도 않기로 했다. 이 순간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맞닿은 우리의 감정뿐이니까. 그래서 말없이 그저 서로의 등을 토닥였다. 다 잘 될 거라는 듯이. 다 괜찮다는 듯이.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안타까운 마음은 애써 외면하고 설레는 마음만을 가득 채운 채로 그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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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썼지만 저도 감격스럽습니다.... 드디어 우리 율래가.... 드디어ㅠㅅㅠ...♡ 7화의 삽질 끝에 마음이 닿았습니다. 그만큼 더 공들여 쓴 에피인데... 마음처럼 잘 써지지가 않네요ㅠㅠ 하지만 본격적인 율래 연애는 드디어 시작입니다. 이제 맘 놓고 여러분들 염장 지를 수 있어서(?) 벌써부터 설레는 1人.. 아 그리고 제가 딱히 써놓지를 않아서 연재인 줄 모르고 아무거나 먼저 읽으셨다가 낭패를 보신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ㅠㅠ 각 화 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풀어 나가는 형식이긴 한데, 결국에 보면 모든 화가 다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보시는 게 이해가 가실 거에요ㅠㅠ 아무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과분한 사랑 감사히 받고 있어요...♡3♡ 다음 화에서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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