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의 나는 아마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릴 적부터 잠이 많았지만 그 날의 나는 들뜬 마음에 알람도 없이 일찍 눈을 떴다. 창밖에는 곧 다가올 봄을 맞이하는 노랗고 하얀, 예쁜 꽃들과 싱그러움을 뽐내는 초록빛 나무들로 가득했다. 눈을 뜨자마자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젖은 머리가 채 다 마르기도 전에, 옷장의 양쪽 문을 활짝 열어 그 안에 걸려진 교복을 바라보았다.
교복이다! 숨길 수 없이 새어나오는 미소를 입가에 건 채로 걸려진 교복을 옷장에서 꺼냈다. 한 번도 입지 않은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차례대로 치마와 넥타이, 조끼까지 모두 입었다.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옷을 다 입곤 방 구석에 놓여진 전신거울 앞에 섰다. 처음으로 입어보는 교복은 어색했지만 그런 어색함마저도 좋았다.
" 짠! "
방문을 열고 거실에 앉아있는 엄마와 아빠를 향해 짠, 하고 소리를 내자 엄마와 아빠가 날 바라보았다. 엄마는 날 바라보며 머리는 다 말렸어야지, 하고 웃으며 말했고, 아빠는 입이 귀에 걸릴 듯 활짝 웃으며 예쁘다, 우리 딸, 하는 말과 함께 날 향해 양팔을 벌렸다. 얼른 아빠의 품으로 쪼르르 달려가자 아빠가 날 품에 안고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기분 좋아보이네. "
" 막 떨려요. 내가 벌써 중학생이라는 게 안 믿겨. "
내 말에 엄마와 아빠는 마냥 내가 귀엽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배시시 웃으며 그 품에 얼굴을 부비다가 아빠의 품에서 조금 떨어진 채로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얼른 가요, 입학식 늦으면 어떡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서두르는 내 모습에 아빠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아빠의 손목을 잡고 얼르은, 하고 재촉하자 아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입학식은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전교생을 한 곳에 세워두고 교장 선생님의 긴 말씀이 이어졌다. 그 다음으로는 각 반의 담임 선생님과 각 과목의 선생님들을 소개했다. 입학식 자체는 지루했지만 그 곳에 가만히 서있는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났다. 교복을 입은 것도 좋았고, 이렇게 새로운 학교에 온 것도 좋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그냥 모든게 다 좋았다. 하물며 강당 밖으로 보이는 나무에 새 두 마리가 앉아서 몸을 부비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냥 좋았다.
강당에서의 입학식 다음으로 담임 선생님과 반 친구들을 만나고 나서야 입학식은 끝이 났다. 교문 앞에 선 차에 익숙하게 올라타자 미리 타고있던 아빠와 엄마가 날 바라보았다. 입학식은 어땠어? 다정하게 물어오는 엄마의 물음에 다 좋았어! 하고 답하자 엄마는 내 대답이 의외였던 건지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아빠는 옆에 놓여진 종이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 이게 뭐에요? "
" 입학 선물. "
선물이라는 말에 활짝 웃으며 상자를 열자 검은색 가방이 보였다. 갖고 싶었던 선물에 배시시 웃으며 아빠를 바라보자 아빠가 마음에 들어? 하고 물었다.
" 당연히! "
고마워요, 하고 짧게 인사를 하곤 얼른 상자 안에서 가방을 꺼냈다. 입고 있는 교복에 꽤나 잘 어울릴 것 같은 가방을 바라보자 자꾸만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엄마도 작게 웃었다. 그렇게 좋아? 엄마의 물음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 좋은 것 투성이야.
흐뭇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아빠는 앞에서 묵묵히 운전을 하고 있던 아저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들 입학식이 몇 시라고 했지? 아빠의 물음에 아저씨는 무뚝뚝한 말투로 답을 해왔다. 3시 입니다. 그 말에 아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거기 들렀다 가지. "
" 입학식 말씀하시는 겁니까? "
" 응. "
" 안 그러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
" 오랜만에 지원이도 같이 밥 먹고 싶어서 그래. "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두곤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아빠의 입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 아빠를 향해 되물었다. 지원이? 지원이가 누구에요? 내 물음에 아빠가 웃으며 답했다. 아저씨 아들.
" 우리 공주보다 오빠야. "
아빠의 말에 그렇구나, 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타고 움직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는 또 다른 학교 앞에 멈춰섰다. 이 학교는 조금 전 내가 입학식을 하고 왔던 학교보다 조금 더 컸다. 학교 교문 안으로는 우리 학교와 다르게 남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이 학교는 교복이 저건가 봐. 저것도 예쁘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는 내게 아빠가 물었다. 잠깐 내릴까?
차에서 내리자 달콤한 향기가 코를 스쳤다. 교문 바로 옆으로 솜사탕을 팔고 있는 작은 가게가 하나 보였다. 설탕이 풍기는 달큰한 향기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 곳으로 고정되었다. 먹고 싶긴 한데, 엄마는 분명 안 사주겠지. 아쉬운 마음에 입을 우물거리며 입맛을 다시는데 꼭 잡고있던 엄마의 손이 나를 이끌었다. 얼른 와. 엄마의 말에 겨우 그곳에서 시선을 떼곤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에게 잠깐 닿았던 내 시선은 앞서 걸어가는 아빠를 향했고, 아빠에게 닿았던 내 시선은 곧장 누군가와 인사를 하고 있는 아저씨에게로 닿았다.
아저씨는 남색 교복을 입은 남자와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아빠를 향해 몸을 숙여 인사했다. 아빠는 그를 보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던 날 그에게 소개했다.
" 이쪽은 우리 딸. "
" 아…. "
" 내 딸은 처음 보는 거지? 올해 중학교 들어가. "
아빠의 말이 끝나자 그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명찰을 다는 곳과 똑같은 곳에 그 또한 명찰을 달고 있었다. 노란색 명찰 위에 검게 새겨진 '김지원' 세 글자를 잠깐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때의 바비는 눈이 둥글게 휘어지도록 날 보고 웃으며 짧게 안녕, 하고 인사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피어올라 괜히 걸음을 뒤로 한 걸음 주춤거렸다. 그리고는 곁에 서있는 엄마의 뒤로 살짝 몸을 숨겼다. …응.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내 모습에 엄마가 웃었다. 얘가 왜 안 타던 부끄러움을 타나 모르겠네.
* * *
밥을 다 먹고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불편해 조심스럽게 그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식당 안에 가득한 음식 냄새와는 다르게 산뜻한 바람이 불었다. 꼭 마당처럼 꾸며진 가게의 입구 한켠에 있는 연못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연못 앞에 몸을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옆에 흩어진 작은 돌멩이를 들어 잔잔한 연못 위로 던졌다. 물가에 닿은 돌멩이를 중심으로 잔잔하던 연못이 찰랑였다. 다시 한 번 아주 작은 돌을 들어서 연못을 향해 던지려는데 갑작스럽게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 돌 던지면 안 돼. "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연못 옆쪽 다리 위에서 그가 날 바라보았다. 아마 그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재미 없어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그가 이름이 뭐야? 하고 내게 물었다. ---, 하고 짧게 답하자 그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름 예쁘다.
웃는 그 시선을 나도 모르게 피하자 그가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나는 여전히 연못을 바라보며 쪼그려 앉은 상태였고, 그는 내 옆에 선 채로 연못 안을 바라보았다. 꽤 많네.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또 한 번 연못으로 던졌다. 작은 파동이 다시 한 번 연못 안에 일었고, 물고기들이 내가 던진 돌멩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듯 헤엄쳤다.
" 그러지 말라니까. "
" 이럼 안 돼? "
" 물고기도 스트레스 받아. "
그러니까 던지지 마. 그의 말에 그를 한 번 힐끔, 올려다보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말이 많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에게는 섣불리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자꾸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런 말도 못 한 채로 그저 연못 안을 바라보고 있는데, 때 마침 붉은 물고기들 사이로 하얀 물고기 한 마리가 헤엄쳐 지나갔다. 와, 하얀색! 예쁘다. 다른 물고기들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그 하얀 물고기는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온 건지 연못 안을 둥글게 헤엄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눈이 반짝였고 시선은 그 하얀 물고기만 따라 움직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아서 조심스럽게 조금 가까이 손을 뻗는 내 행동에 날 바라보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 만지는 것도 안 돼. "
어째서? 올려다보며 묻는 내게 바비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 아까 전이랑 같은 이유야. 만지지 마. "
" 왜 자꾸 다 안 된다고 그래? "
" 네가 자꾸 하면 안 되는 것만 하잖아. "
그의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곤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그 물고기에게로 돌렸다. 그래도… 한 번 만져보고 싶은데. 그 하얀 물고기는 꼭 자기를 잡아달라는 것처럼 내 바로 앞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로 꼬리만 아주 살짝씩 흔들고 있었다. 그 물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홀린 듯 물고기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물고기에게 거의 다 닿은 것 처럼 느껴지는 그 때, 쪼그려 앉아있던 내 몸이 살짝 기우뚱하는 것이 느껴졌다.
" 어… 어, 어? "
앞으로 쏠리는 무게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어, 하는 바보 같은 소리만 내던 내가 연못 안으로 빠지려던 그 순간, 그가 내 팔을 잡았다. 얼른 잡은 팔을 당긴 바비 덕분에 내 무게는 바비에게로 쏠렸고, 나는 연못에 빠지는 것 대신 바비의 품에 푹 안겼다. 훅 밀려오는 바비의 향기는 지금 느껴지는 바비 특유의 향과 함께 그 때 입고 있던 교복의 새 옷 냄새가 섞여 있었다.
놀란 눈으로 멍하니 있는 내게 그 또한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괜찮아? 하고 물었다. 겨우 참았던 숨을 뱉으며 응,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핀잔 섞인 그의 목소리가 내 위에서 울렸다. 많이 놀란 건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서도 들려왔다.
* * *
처음 만난 그 날 이후로 그와 나는 만나는 횟수가 잦아졌다. 내 조름에 아저씨는 종종 그와 함께 우리 집으로 왔고, 그가 함께 올 때면 오빠! 하는 부름과 함께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저씨는 금방 달려오는 날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아저씨 안녕, 하고 얼른 인사를 마치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반가운 시선에 그는 눈치를 잠깐 보다가 곧 피식 웃으며 내 머리로 손을 뻗어 나를 쓰다듬었다. 그 때의 나는 아직 철이 없었고, 그 때의 바비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던 때였다.
나는 내 방 침대에 배를 붙이고 엎드려 누워 다리를 까딱였다. 바비는 침대 옆 내 책상 의자에 몸을 앉혀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종이 한 장을 읽으며 펜의 끝부분을 입으로 물고 있다가, 종이를 그대로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으…. 나도 모르게 작게 새어나온 칭얼대는 소리에 그가 만화책을 넘기려다 말고 날 바라보았다.
" 왜? "
" 학교에서 내 꿈을 적어오래. "
" ……. "
" 그런데 난 꿈이 없어. "
내 말에 바비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꿈이 없어? "
" 응. "
" 그럼 좋아하는 건? "
" 좋아하는 거? "
"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직업을 꿈으로 삼으면 되잖아. "
그 말에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전 그 종이로 다시 옮겼다. 다른 곳은 빽빽히 채워져 있었지만 '장래희망' 이라고 적힌 칸 아래는 아직도 비어있었다. 꿈…. 그의 말을 속으로 다시 한 번 되새겨보며 손에 잡고 있던 펜을 살짝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오빠는 꿈 있어? "
내 물음에 바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는 날 보던 시선을 거둬 다시 만화책을 바라보았다.
" 오빠 꿈은 뭐야? "
" 보디가드. "
" 보디가드? 경호원? "
" 응. "
" 오빤 왜 그게 되고 싶어? "
그게 좋아서? 내 물음에 그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그냥,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멋있는 일이니까. 우리 아버지처럼.
말을 마치고 만화책 한 장을 넘기는 바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 꿈꿔온 일인 듯, 경호원이라고 답하는 바비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의 바비는 평소와 달라보였다. 조금… 멋있는 거 같아. 혼자 그렇게 생각을 하곤 바비의 말을 잠깐 곱씹어보다가 바비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 왠지 오빠 같은 사람이 매일 곁에서 지켜주면 되게 든든할 거 같아. "
내 말에 바비가 만화책을 보던 걸 멈추고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바비와 눈이 마주치자 바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망설이는 바비를 조르고 졸라서 이번엔 우리 집이 아닌 바비의 집으로 놀러 갔다. 저녁에 모시러 오겠다는 아저씨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랑 잘 놀고 있을게요. 그 말에 잠깐 그를 바라보던 아저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차를 출발시켰다. 조금씩 멀어지는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가자.
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에게서 자주 풍기던 향기가 더욱 진하게 풍겨왔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내게 그는 어머니는 안 계셔, 하고 말을 하곤 곧장 집 안을 향해 소리쳤다. 야, 김한빈. 그의 목소리에 닫혀있던 방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왔어? "
" 인사해. "
" 뭐야, 누구야. 여자 친구? "
" 아가씨. "
그의 말에 김한빈이라는 그 남자아이가 방문을 열곤 내 앞으로 달려왔다. 와, 네가 아가씨야? 나를 아는 건지 아가씨라는 소개에 신기하다는 듯 날 바라보던 김한빈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으니 악수, 하고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 흔든다. 아빠랑 형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 나 지금 무슨 연예인 본 것 같아. 개구진 얼굴로 말을 걸어오는 김한빈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안녕. 내 인사에 김한빈도 활짝 웃었다. 김한빈은 나와 다른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말도 많고 성격도 밝은 김한빈과는 금방 친해졌다. 자꾸만 장난을 걸어오는 김한빈과 그를 응징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바비는 음료수를 꺼내어 내 앞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장난 좀 그만 쳐. 그의 말에 김한빈이 내 앞에 놓여진 음료수를 제가 들고가서 따며 웃었다. 장난치면 얘 반응이 너무 웃겨. 그 말에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 음료수 내 껀데 왜 네가 먹어!
한바탕 웃으며 놀다가 영화 볼래? 하고 묻는 김한빈의 제안에 그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세 명은 나란히 쇼파에 앉아 티비에서 재생되는 영화를 바라보았다. 내 왼쪽에는 바비가 있었고, 내 오른쪽에는 김한빈이 있었다. 언제 가져온 건지 김한빈은 제 앞에 놓인 큰 그릇에서 팝콘을 우물거렸다. 나도 줘. 내 말에 김한빈이 들고 있던 큰 그릇을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 안에서 팝콘을 한웅큼 집어 입에 넣었다. 금방 볼이 빵빵해지고, 그런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바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햄스터 닮았어.
영화가 시작되었고, 높은 평점과 재미있다는 입소문에 걸맞게 영화는 스토리가 진행이 될 수록 흥미진진했다. 중간중간 웃긴 부분이 나올 때면 우리 세 명은 함께 웃음이 터졌다. 영화는 어느새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고, 한참을 집중해서 보는 내 왼쪽 어깨에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닿았다. 어? 순간 놀라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피곤했던 건지 잠에 빠진 바비가 내 어깨에 아주 살짝 기대어 있었다. 얼레….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움찔거리는 내 몸이 굳었다. 영화를 다시 보려고 했지만 온 신경이 바비가 닿아있는 왼쪽 어깨로 쏠려 있었다.
웃긴 장면이 나온 건지 웃음을 터트리던 김한빈은, 저 혼자 웃고 있다는 걸 느끼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김한빈에게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 오빠 자고 있어. "
손가락으로 바비를 가리키며 말하자 김한빈이 진짜? 하고 되묻더니 내게 기대어 잠든 바비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이 난 건지 킥킥 웃으며 앉은 몸을 일으켜 제 방으로 들어갔다. 금방 나온 김한빈의 손에는 수성 매직이 몇 개 들려져 있었다. 뭐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내게 김한빈은 웃으며 펜을 하나 쥐어주었다. 그리곤 제 손에 들려진 펜 하나의 뚜껑을 열었다.
" 야아, 뭐 하는 거야! "
작게 속삭이는 내 말에 김한빈이 킥킥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펜으로 바비의 눈가에 두 개의 원을 크게 그리고나서야 김한빈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날 바라보았다. 너도 해봐. 김한빈의 제안에 잠깐 망설이자, 김한빈이 내 손에 들려져 있던 펜의 뚜껑을 열어주었다. 얼른 해보라니까. 형 깨면 이런 거 못 해.
꼭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이 김한빈은 킥킥대며 나를 재촉했다. 형을 골탕먹이는 게 그렇게나 즐거운 건지, 저 개구쟁이는 아까부터 계속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손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펜을 바비의 얼굴로 가져갔다. 이미 낙서가 된 바비의 얼굴을 바라보자 김한빈이 왜 저렇게나 웃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뱉는데, 그 순간 바비가 스르륵 눈을 떴다.
" ……. "
" …헐…. "
" …뭐야, 너네. "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바비는 나와 김한빈의 손에 들린 펜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서로를 바라본 김한빈과 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움직여 냅다 도망을 쳤다. 너네 설마, 하는 바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금방 제 얼굴을 확인한 바비는 제가 봐도 웃기긴 한 건지 웃음을 참지 못한 얼굴로 야! 하고 우릴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몸을 일으켜 우리를 쫓아오는 바비를 피해 김한빈과 이리저리 집 안을 누비며 달렸다. 꼭 유치원생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손에 들려진 펜은 여전히 뚜껑도 없이 열려져 있었다.
* * *
오늘도 바비는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엄마와 아빠는 함께 참석해야 하는 자리 때문에 저녁까지 집을 비운 상태였다. 바비에게 날 맡기다시피 부탁하고 간 엄마와 아빠 덕분에 바비는 우리 집으로 곧장 하교를 했다.
바비와 함께 티비를 보며 깎아진 과일을 우물거렸다. 그러다 가정부 이모가 잠깐 장을 보러 나가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앉았던 몸을 일으키자 바비가 날 바라보았다. 어디 가? 그 물음에 서재에 잠깐, 하고 짧게 답했다.
아빠의 서재 안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곳에 올 일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안으로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꼭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책으로 가득한 서재 안을 한 번 쭉 둘러보다가 책장 제일 위에 전날 보았던 익숙한 바구니 하나를 발견했다. 저거다! 전날 아빠가 내 휴대폰을 압수해 저 바구니에 넣었었다. 바구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을 들고 손을 뻗는데 닿을 리가 없다. 낑낑대며 손을 뻗던 것을 멈추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 마침 옆에 놓인 하얀색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의자를 책장 아래로 가져간 뒤 의자를 밟고 그 위에 올라섰다. 그렇게 해서 조금 전처럼 손을 뻗자 바구니 끝에 거의 닿을 듯 말 듯했다. 으,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조금 더 뻗는데 갑작스럽게 뒤에서 바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뭐 하는 거야. "
내게 다가온 바비가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런 바비에게 이거 좀 꺼내려구, 하고 답하며 손을 조금 더 뻗는데 순간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뭐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바로 앞에 보이는 책장을 잡았고, 고정이 되어있지 않은 책장은 내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의자에서 떨어졌고 책장 안의 책들은 쏟아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느낌에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자 바비가 날 감싸고 있었다. 책장에서 떨어지는 책들 또한 바비의 위로 다 쏟아진 건지 날 감싼 바비가 얼굴을 찡그렸다. 괜찮아? 하고 내게 물어오는 바비의 모습에 대답 대신 물었다.
" 오빠는 괜찮아? "
" 어. 그러게 대체 왜 이런 짓을 해선…. "
" 휴대폰 꺼내려고 그런 건데…. "
" …이 책들은 다 어떡하지. "
" 오빠, 오빠… 오빠 목에…. "
피….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에 바비가 목을 손으로 쓸었다. 책이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모서리가 바비의 목을 스친 건지 목이 살짝 베여 피가 조금 맺혀있었다. 어떡해, 피 나, 하고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는 내 모습에 바비가 제 손으로 맺힌 피를 다 닦았다. 그리고는 찡그린 얼굴을 풀어 살짝 웃었다. 괜찮아.
"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
예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온 아빠의 모습에 바비와 나는 순간 몸을 벌떡 일으켜 섰다. 아빠는 쏟아진 책과 그 사이에 앉은 우리 둘을 보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바로 아빠를 뒤따라온 아저씨 또한 우리를 바라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재 안을 눈으로 쭉 훑던 아빠는 내가 휴대폰을 꺼내려고 했다는 걸 짐작한 건지 살짝 화가 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 설명해봐. "
" ……. "
" 아빠 서재에는 왜 들어왔고, 책은 왜 쏟아져있는 건지. "
다그치는 아빠의 목소리에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고개를 숙인 채로 몸을 작게 떨었다. 그게…. 혼날 걸 알지만 망설이며 답을 하려던 내 목소리를 바비가 막았다. 아빠에겐 보이지 않도록 내 손목을 살짝 움켜쥔 바비가 먼저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 제가 그런 거에요. "
" 뭐? "
" 읽고 싶은 책이 있었는데 억지로 꺼내려다 책장 안에 있는 책들이 쏟아졌어요. "
" ……. "
" --이는 제가 다친 줄 알고 놀라서 온 것 뿐이에요. "
지금 들으면 참 어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지만 아빠는 바비의 말에 아무런 말도 없이 바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이어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 아빠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옆에서 가만히 서있던 아저씨는 아빠를 향해 몸을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 말에 아빠는 굳힌 얼굴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 나는 또 우리 딸이 휴대폰 꺼내려다 사고 친 건줄로만 알았더니. "
" ……. "
" 역시 지원 군은 책벌레라니까. 그래, 어떤 책이 마음에 들었나? 원하는 걸로 빌려가려무나. "
아빠는 바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알면서도 속아주었다. 바비를 바라보며 말을 마친 아빠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바비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장 걸음을 돌려 서재를 나갔다. 아저씨는 아빠를 따라 가지 않고 숙였던 몸을 들어 바비를 바라보았다. 김지원, 하고 부르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바비가 내 손목을 놓곤 아저씨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장님 댁에서 이렇게 사고를 치면 어떡해? 아저씨의 혼내는 목소리에 바비는 아저씨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런 말이 없다. 한참을 그렇게 혼을 내던 아저씨는 서재 밖으로 걸음을 옮겨 나갔고, 그제야 고개를 든 바비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바비를 향해 말했다.
" …고마워. "
내 말에 바비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떨어진 책들을 피해 조심스레 바비에게로 다가가 바비를 올려다보았다. 날 내려다보는 바비는 괜찮다는 의미인 건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바비의 목으로 시선이 닿고, 다시금 피가 살짝 맺힌 상처를 바라보다가 바비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이리 와, 내가 약 발라 줄게.
* * *
" 나 꿈 생겼어. "
내 말에 이번에는 만화책이 아닌 다른 책을 읽고 있던 바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 그림 그릴 거야! 내 말에 바비가 피식 웃었다.
" 그림? "
" 응. "
"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 "
" 좋아해. 그리고 믿기진 않겠지만 나 그림도 꽤 그려. "
" 정말? "
" 응. 정말로. "
자신있는 내 말투에 바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꿈이 생겨서. 다정한 그의 말투에 배시시 웃으며 여전히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다리를 까딱거렸다.
"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될 거야. "
" 얼씨구. "
" 나중에 나 유명해지면 내 얼굴 보기 힘들걸. "
" 유명해지면 연락 안 할 거야? "
" 설마! "
바쁘니까 보기 힘들 거란 말이지. 내 말에 바비가 바람 빠진 웃음을 뱉었다. 바비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눕곤 바비를 향해 물었다. 오빠는 여전히 경호원이 되고 싶어? 내 물음에 바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을 얘기하는 바비의 모습은 언제 봐도 멋있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리곤 배시시 웃었다.
" 나중에 유명한 작가가 되면 분명 경호원이 필요하겠지? "
" 왜? "
" 왜긴. 위험할 거 아냐. "
유명한 연예인들은 다들 경호원이 필요하잖아. 내 말에 바비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 했다. 그런가, 하고 짧게 대답하는 바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그럼 그 때 오빠가 나 경호해주면 되겠다. 내 말에 바비가 어이가 없단 듯 웃으며 날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책으로 돌렸다.
" 누가 해준대? "
" 싫어? "
" 일단 유명해지기나 해. "
그 말에 치, 하고 작게 입술을 삐죽이곤 다시 침대 위로 벌러덩 누웠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책을 한 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바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말대로 내가 널 경호해 주려면. "
" ……. "
" 우리 둘 다 꼭 꿈을 이뤄야 그게 가능해지겠네. "
바비의 말에 잠깐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오빠도 나도 꿈 이룰 수 있을 거야. 분명해, 하고 말하는 내 목소리에 바비가 책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까딱이는 내 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바비가 피식 웃으며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 해줄게. 네 경호원. "
" 정말? "
" 응. "
" 정말로? "
" 응, 정말로. "
나는 바비에게 정말로? 하고 되묻는 걸 좋아했다. 그런 내게 바비는 늘 응, 정말로, 하고 답했다. 내게 확신을 주는 바비의 저 대답이 좋았다.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아 바비를 향해 손을 쭉 내밀었다. 새끼 손가락을 빼곤 나머지 손가락을 접은 채로 손을 내밀며 약속해, 하는 내 말에 바비는 피식 웃으며 보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의자를 돌려 나와 마주보고 앉아 내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며 웃었다.
" 그래, 약속. "
♡
안녕! uriel입니다
다른 글만 쓰려다가 오랜만에 아가씨를 쓰니까 너무 어색한 거 있죠, 게다가 늘 하던 반존대가 아닌 반말하는 여주와 반말하는 지원이는 이상하게도 쓰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들고 왔어 ㅠ_ㅠ
이전 글이었던 진환이 빙의글 Blue sea가 독방에서 많이 언급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들어갔을 때도 몇 번 봤고, 게다가 저 없을 때도 blue sea 최고라며 눈물 흘려준 분들 누군가요 ㅠ_ㅠ 이리 와요 뽀뽀 좀 해줄게.. 싫어요? 거절은 내가 거절! 쓰면서도 저도 참 많이 아련했던 글이에요 정말 좋아하는 글이기도 하고! 그런 제 글이 뭐라고 스크랩까지 해가신 분들을 보며 폭풍 감동 ㅠ_ㅠ 아.. 블루씨 생각하면 맘이 아려요 진환아 미안해.. 울적한 기분에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
암호닉은 언제나 신청 가능합니다! <>안에 넣어서 신청을 해주시면 최근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을 거에요! 혹시나 제가 빠트린다면 둥글게 둥글게 다시 알려주세요! 조만간 암호닉 정리도 해야겠죠? 아가씨 텍파를 위해! 개한빈 텍파와는 다르게 아가씨는 암호닉 분들께만 드릴 예정입니다 정말이야 ㅠ_ㅠ 이번엔 암호닉 정리 잘 해서 꼭 그렇게 할 거에요 ㅠ_ㅠ 흐 비회원 분들도 암호닉 신청 가능하시니까 걱정은 않으셨으면 해요! ㅎ_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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