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처음 보는 사내가 내 누이를 품겠다고 했다. 감히, 감히 내 누이를 품겠다고 했다. 살짝만 만져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이 아이를, 나도 제대로 안아보지 못한 이 아이를. 진짜인 것이냐, 저 사내가 내뱉는 말이 사실인 것이냐. 누이를 다그쳤지만 그 아이는 아무말도 없었다. 날 지탱하고 있던 끈이 하나 풀린 느낌이었다. 날 바라보는 __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나뿐인 제 오라비입니다."
오라비.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오라비일 뿐이다. 저 가여운 아이에게 무엇 하나 해주지 못하는, 그래서 다른 사내가 저 여린 손목을 붙잡고 데려가도 아무 말 못하는, 그런 오라비일 뿐이다.
이럴 수는 없다. 아까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돼. 당장 시장 어귀로 달려갔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시장은 아직도 북적였다. 많은 인해들 틈을 비집고 시장 구석에 위치한 지원을 찾았다. 복덕방을 하는 꽤나 재력이 있는 집안의 자제였다. 복덕방 근처로 발걸음을 하자 기녀들을 옆에 끼고 청주를 들이키고 있는 김지원이 보였다. 지원의 품에 기대어 술을 따르는 기녀들의 웃음소리가 야살스러웠다. __의 모습과 저 기녀들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안 돼, 절대로 아니된다.
"김지원!"
술을 들이키던 김지원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김지원은 언제나 태평했다. 조금 취했는지 김지원이 쓴 갓이 기울어져 있었다. 지금 속 편하게 술을 들이킬 때가 아니란 말이다!
"이런, 내 친구가 어쩐 일로 날 찾아와서는."
"긴히 할 말이 있다, 부탁도 있고."
급하게 뛰어온 탓에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며 지원이 짖궂게 웃어보였다. 무슨 부탁이길래. 자네 부탁이라면 들어 줘야지. 나는 지원의 옆에 기댄 기녀들을 바라봤다. 기녀들은 여전히 지원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기서 할 말이 아니다."
지원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꽤나 중요한 일인가 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지원이 앞장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덥다며 도포와 갓을 벗어 의자 위에 던진 지원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래, 어떤 일인가."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을 감자 사내에게 손목을 잡혀 들어가던 __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주먹을 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연화방 말일세."
지원이 낮게 웃었다. 연화방이라 함은 기방이 아닌가, 자네같이 올곧은 사내가 왜 기방을.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내게 묻는 지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연화방을, 매각할 방도를 아는가."
조금 전까지 장난기를 띄던 지원의 얼굴이 굳었다. 지원이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연화방을 매각하다니, 자네 제정신이야?"
"지금 그 어떤 상황보다 제정신이야. 그 누구보다 간곡해."
지원의 눈을 마주했다. 부릅 뜬 지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__은 내가 가져야 한다. 다른 사내들의 품에서 뒹구는 꼴을 볼 수는 없어.
"연화방의 현 대모를 아는가? 그녀는 천하지 않아. 친가 외가 모두 꽤나 이름 날리는 양반가문이지. 그래서 연화방에 양반가 자제들이 줄지어 드나느는 것도 있지만, 그 이유로 방이 윗물과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거야. 그걸 몰랐는가. 연화방은 보통 기방과는 다르단 말일세. 연화방을 매각하는 순간, 자네도 매각되는 거야."
이럴 수는 없었다. 연화방을 매각해서, 사랑스런 나의 __을 데려와 옆에 두려 했건만. 나의 계획은 싹을 틔우기도 전에 무참히 짓밟혔다. 기방에 들어가겠다던 __이를 더 간절하게 붙잡았어야 했는데, 왜 그러질 못했을까.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런 나를 지원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연화방과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가?"
"악연이라면 제일 질긴 악연이지.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빼앗겼어."
내 말을 들은 지원이 호탕하게 웃었다. 자네의 소중한 사람이라, 연인이 기생이라도 된 건가. 지원의 말에 작은 실소가 터졌다. 연인이라.
"연인으로 삼고싶은 여인이, 연화방에 있어."
내 말을 들은 지원이 사뭇 진지해졌다. 맑은 눈빛이 한순간에 검게 변했다. 지원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매각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도와줄 방도는 있는데."
*
구준회는 해시를 넘길 때까지 객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로 나를 품거나, 안은 것은 아니다. 그저 말없이 깊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__아."
구준회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불린 내 이름에 놀라 구준회를 바라보았다. 구준회가 저 이름을 알면 안되었다. 큰어머님과 관계가 깊은 구준회가 알게되면, 큰어머님께 알려질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런 나를 보고 구준회가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 웃음소리가 천천히 방 안을 맴돌았다.
"큰누님께는 말하지 않으마."
불행 중 다행인 걸까 구준회는 큰어머님께 나의 진짜 이름을 말하지 않겠다 말했다. 하지만 구준회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어제 처음 본 사람이고, 무엇보다 나는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 내 속을 들여다 본 듯이 구준회는 믿어도 된다, 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정말 믿어도 될까 하고 구준회를 바라보는데, 구준회의 입술이 다시 들썩였다.
"다만, 네가 왜 __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지, 왜 자란이라는 이름을 쓰는지,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내가 기방에 들어오며 나의 이름을 버리게 된 까닭.그것은 나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이 연화방에 들어오기 전 오라버니가 내 손을 붙잡고 간곡히 부탁하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그 이유를 알고싶었다. 무슨 연유로 오라버니는 내게 자란이라는 이름을 쓰게 하였는지. 어쩌면 구준회보다 내가 더 알고싶은 부분이었다.
"그 연유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오라버니가 제게 기방에서는 네 이름을 쓰지 말라 부탁하던 것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구준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라비는 너와 참 가깝구나. 배다른 오라비인데도, 참으로 극진해. 구준회가 얼굴에 조소를 띄웠다.
"너는 오라비를 사랑하느냐?"
구준회가 내게 물었다. 예상하지 못한 물음이었고, 그 무엇보다 당연한 물음이었다. 나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랑합니다. 어찌 누이가 오라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라버니는 제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기둥같은 존재이십니다."
구준회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크게 웃었다.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활짝 벌린 입술이 보였다. 내가 물은 건 그런 류의 사랑이 아니다.
"여인이 사내를 사랑하는 마음, 연정을 품고 있느냔 말이다."
구준회의 눈은 짙고 매섭게 굳어 나를 주시했다. 진심으로 묻는 말이었다. 오라비를, 사랑하느냐.
"어찌 누이가 오라비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어미가 다르다 하여도,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구준회는 몸을 뒤로 젖히고는 나를 바라봤다. 적응되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베일것만 같은 그 시선에 나는 고개를 돌렸고 구준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색 도포자락이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못할 일은 아니다. 항상 조심해라."
잘 자거라. 구준회는 객실을 나섰다. 마지막 말이 귀에 맴돌았다. 못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조심해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걸까. 나의 마음을? 아니면 동혁 오라버니를? 내가 아는 오라버니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실 분이 아니셨다. 구준회의 말을 곱씹으니 머리가 아파왔다. 무거운 생각을 떨치고, 객실을 나서 침소로 향했다. 오라버니가 쥐어준 향주머니에서 제비꽃 향이 나의 발길을 감쌌다.
*
"네가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널 찾는 사람이 많구나."
큰어머님은 모든 기녀들이 모인 앞에서 날 바라보고 말하셨다. 큰어머님의 목소리에선 뿌듯함과 애정이 넘쳤다. 동기들과 선배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부러움이 실린 눈빛도, 비난이 섞인 질타도 있었다.
"한 선비가 너를 찾아왔다. 객실로 가 보거라."
큰어머니께 허리를 숙이고 마당을 나섰다. 누구일까. 나를 찾아올 사람은 오라버니와 구준회를 빼고는 없었다.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객실에 다다랐다. 숨을 죽이고 객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까만 갓에 보라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오라버니도, 구준회도 아니었다.
"안녕."
나를 보고 개구지게 웃은 사내는 내게 다가와 팔을 벌렸다. 한 발 다가서니 그 사내는 내게 다가와 날 품에 안았다. 반갑구나. 중얼거리는 사내를 밀어냈다.
"누구십니까."
사내는 손을 올려 내 뺨을 쓸어내렸다. 미소를 띈 얼굴과는 달리 사내의 눈동자에서는 검은 빛이 일렁였다.
"기생 주제에, 누구인지 알아야 품에 안을 수 있는것이냐."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발끝부터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제 아무리 기생이어도, 여인의 지조는 있습니다."
사내는 내 말에 수긍하는 듯 하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기생에게도, 여인의 지조가 있긴 하느냐. 나를 찌르는 사내의 말에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여인의 취급을 받아보지 못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젠 얼굴까지 붉어졌다. 사내에게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저 사내의 말은 틀린 게 없었고, 나는 나를 찾은 손님에게 그런 짓을 할 만한 신분이 되지 못했다. 나를 보는 사내가 웃음을 흘렸다. 여인의 지조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기방을 나오면 되지 않느냐."
"처음 본 사내에게 그런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도 이 기생을 품으려 기방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내 말에 사내는 고개를 들고 크게 웃었다. 사내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머리에 꽃힌 머릿쪽지를 매만졌다. 그의 손길이 차가웠다.
"난 기생을 만나고 싶으면 직접 부른다. 이런 하찮은 기방까지 발걸음 하지 않아."
아, 나는 김지원이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사내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자란이라 하옵니다. 사내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사내는 그런 나를 보며 웃어보였다.
"이름은 알고있다. 나는 다른 대답을 원해."
"이 기방을 나오지 않겠느냐."
김지원은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기방을 나오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도 이 기방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기방을 나섰을 때에 나를 옥죄어 올 신분의 굴레가 두려웠다. 나는 메마른 웃음을 지어보이며 김지원에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한 여인의 인생을 뒤바꿀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십니다."
김지원은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그냥 하는 말 같으냐. 김지원은 방을 한바퀴 거닐며 콧노래를 불렀다. 한 기생을 머릿속을 어질러놓고, 저렇게 콧노래가 나올까. 괜히 김지원이 괘씸했다. 이만 나가주시지요, 입을 열려는 순간 김지원이 입술을 떼었다.
"내가 널 사면 되지 않겠느냐."
"내가 널 사고, 네가 내 첩이 된다면, 어떻겠느냐."
김지원이 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원이의 등장! 지원이는 어떻게 동혁이를 도와줄까요...뭔가 글이 제가 생각한 방향이 아니라 다른곳을 향해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네요ㅠ.ㅠ 제 글에 댓글 달아주시는 독자님들 너무 감사드려요! 덕분에 글 쓸 맛이 납니당ㅎㅎㅎ
하나하나 답글 달아드리지 못해 죄송해요ㅠㅠㅠㅠ그래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준회 님, 구닝 님, 엘사 님, 콘초 님, 팬 님, 용군 님, 뿌요를 개로피자 님, 두둠칫 님, 무룩이 님, 주네야 님, 보랏빛 난초 님, 뿌링클 님, 부농부농 님, 거북이 님, 찌푸 님 애정합니다! !0! 이모티콘, 바나나킥 님, 알콩달콩 님, 마그마 님, 알린 님, 감사해요! 암호닉 늘어날 때마다 뭔가 뿌듯하네요ㅠㅠㅠㅠ제 글을 좋아해주시는 독자님들이 이렇게 생기시다니!! 혹시 제가 빼놓은 암호닉 있으면 말해주세요..!
그럼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