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연안 마을에, 선박에서 다시 편주로 갈아타 마침내 조선의 흙을 밟게 된 어느 끼 많고 재주 좋은 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도 창창한 바비婆譬렷다.
상서로운거 리
이리 오너라. 문 밖에서 들리는 말은 길게 늘어졌다. 이 곳의 하나뿐인 몸종 옥촉서는 황급히 치맛단에 물 묻은 손을 닦아내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노비의 행동이 곧 주인의 얼굴이 되는 법, 이 곳을 찾은 손님에게 문을 늦게 여는 실수 따위로 용화의 명성에 버릇 없는 먹칠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옥촉서는 거대하지만 허름한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가 이내 마음을 잡고 세차게 문환을 돌리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기분 나쁜 소릴 내며 벌어지고 있는 문 틈 사이가, 왜인지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기가 바로 심성이 고운 것으로 유명한 정 씨 가문의 마지막 후손, 정용화 도령의 집인가?"
"…맞습니다만 도련님은 누구십니까?"
옥촉서는 서서히 열리고 있는 문 밖으로 조금 묘한 인상의 남자를 보았다. 까만 밤에 둘러싸인 남자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쩐지 조금 수상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그에게선 이유 없이 꺼림칙한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꼭 산 사람이 아닌 것만 같다. 보통 사내들처럼 얼굴 색이 노르스름하지 않았다. 옥촉서는 그게 무례인 줄도 모르고 창백한 그 얼굴을 마치 탐문하는 것처럼 곧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갓의 끈을 한 번 스치면서 빙긋 웃었다.
"반갑소, 방금 미국서 물 건너온 바비 도령이라 하오."
"…바……. 뭐요?"
"바비. 자, 따라해 보시오. 바, 비."
살짝 낯이 간지러워질 정도로 친한 척을 하고 있는 그는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린 갓을 한 번 쓰다듬더니 작게 헛기침했다. 늦은 밤에 뜬금 없이 들이닥쳐 이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영 엉뚱하던 옥촉서는 그가 이런 생소한 꾀를 써서 집에 있는 돈들을 훔쳐 달아나는 괴한일지도 모르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 생각이 불쑥 머릿속을 점령한 뒤엔 저렇게 사르르 접히고 있는 눈가가 어쩐지 더욱 수상하게만 보였다. 애매한 경계심을 뾰족하게 세우고 있던 옥촉서가 괴상하면서도 세련된 차림의 바비를 집요하게 훑어봤다. 서양의 나라에서 왔다는 그는 눈이며 손짓이며 어디 하나 여유롭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머리칼과 동공은 모두 검었다.
그 의심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바비는 해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유학이라네, 유학. 태생이 미국인 것이 아니구."
"…아, 그러셔요."
"왜? 내 동공이 형형색색이 아니라서 실망인 것이오?"
"아닙니다."
"묵을 곳이 없어 한참을 돌아다녔다오. 내게 빈 방을 좀 내어주지 않겠소? 마침, 이전 나라에서 얻어온 문물이 꽤 있으니 하루 묵는 값으로 그걸 드리리다."
"죄송하지만 남는 방이 없습니다."
조용히 대꾸하자 그는 잔뜩 접은 눈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노, 노. 그렇게는 안 되지."
"…도련님. 남는 방이 없다니까요."
"소녀가 지내는 방이 있을 것 아니오?"
"……."
"딱 하루만 동침하지. 응? 그렇게 함세."
매끄러운 이목구비가 차마 거절을 할 수 없도록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옥촉서는 흔들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독이며 무조건 그의 청을 외면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행동마저 여유로웠다. 바비 도령은 몸종이 허락을 하기도 전에 마당으로 들어와 힘차게 어깨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절로 기운 빠진 웃음이 흘러나와, 잠시 희번득한 눈으로 숨을 쉬고 있으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그의 하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천으로 꾸밈한 그것은, 안에 이상한 형체를 하고 있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도령이 칭한 문물 쯤으로 보였다. 그는 멀뚱히 서 있는 옥촉서를 향해 등을 돌리며 소리쳤다.
"캬, 내 잠시 이 땅을 비운 사이에 이렇게나 미인들이 많아지다니. 참으로 다행이고 또 놀랍구나."
"…도련님. 죄송하지만 나가주셔요."
"몸종마저 저리 고운 자태가 있는 것을 보면 이 곳의 마님은 분명 빼어난 천하절색이로겠군!"
도령은 사람 말을 잘 무시했다. 그는 문득 앞니를 내보이며 웃었다. 토끼 같이 생겨서는 말이 많았다.
"도련님? 다시 한 번 죄송하지만 여기에 마님은 없으십니다. 저희 도련님께선 아직 미혼이시라……."
"허, 그것 참. 통탄한 일일세."
"……."
"소녀는 쓰는 방이 넓은가?"
"…아니오."
"그것 한 번 잘 되었네. 우리 둘이서 손을 꼭 잡고 자면 되겠구려."
약간 막무가내 같은 기질이 있는 그는 참 쉽게 그런 말들을 하며 옥촉서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언제나 고리타분하고 순종적이던 몸종은 조금씩 차오르고 있는 성가신 분노를 참으려고 애썼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양껏 받고 있는 요즘, 저렇게나 덕과 눈치가 없는 자를 이 곳에 들일 수는 없었다. 바비 도령은 솔 자수가 곳곳에 새겨진 청색 도포를 찰랑거리며 여전히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그를 쫓아낼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던 옥촉서는 갑자기 사랑채에서 몸을 내미는 용화를 보고 놀라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평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찍 잠에 들곤 하는 용화는 졸린 눈으로 상황을 파악 중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마루에 널부러지는 것처럼 앉아있었고, 몸종인 옥촉서는 주인의 잠을 깨게 한 것이 죄송한지 안절부절 불안한 모습이었다. 희미하게 실랑이 같은 목소리들이 들리기에 대충 무슨 일인지만 확인하려고 몸을 일으켰던 용화는 상상 밖의 장면을 마주치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죄송의 표시로 꾸벅 허리를 숙이는 몸종에게 괜찮다고 타이르던 용화 도령이 상황의 근본을 물었다.
"촉서야, 여기 계시는 이 분은 대체 누구시냐."
"…예, 도련님. 미국에서 건너오신 바비 도령이라고 하십니다."
"……미국? 미국이라 함은 멀고 먼 서양의 나라가 아니던가."
"그렇소. 반짝거리고 온갖 좋은 것들이 넘실넘실한 풍요의 나라, 미국! 거기서 무려 일 년 사트 아흐레를 지내고 온 대단한 유학생이 바로 나, 바비라오!"
"…예, 바비 도령. 그대가 어떤 사람인 줄은 이제 잘 알겠으나 다른 호화한 곳들을 두고 굳이 여길 찾아온 이유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큼, 미국에서도 들리는 소문이 떠들썩하더이다. 억울하게 몰락 당한 조선 최고 지성의 가문, 정 씨를 찾아가면 아무리 천한 신분의 자도 하루 쯤은 편안히 묵을 수 있으리라고."
쉽게 말하자면 공짜로 묵을 곳이 필요해 이 곳을 찾아왔다는 소리였다. 바비의 본심을 알게 된 옥촉서는 기가 막혀 허무하게 웃었다. 순백으로 된 저고리를 입고 있는 용화는 그의 입에서 태연하게 흘러나온 아버지의 죽음이 문득 가슴 아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바비 도령은 가지고 온 하얀 보따리를 가볍게 흔들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염치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그 모습에 옥촉서는 주인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궁금해졌다. 용화는 고심하고 있는 것만 같은 얼굴로 한참을 있었다.
"…좋습니다. 도령의 하루를 돕겠습니다."
"오!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구려. 베푸는 마음이 아름답소이다."
"하지만 충분한 방이 없으니 저와 함께 계셔야 합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으응? 방을 묵는 주제에 말이 많아 미안하지만 그건 싫소. 나는 여기 있는 이 귀여운 몸종과 같이 오늘 밤을 보내고 싶습니다만…."
그 말로 옥촉서는 확신하게 되었다. 바비는 미친 사람이다.
개구진 표정은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용화 도령은 아닌 말을 하는 그에게 언성을 높이려다가 아버지를 생각해 관두었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 초면인 사람에겐 나쁜 화를 내지 말라고 버릇처럼 말하고는 했었다. 용화는 그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조금 들끓었던 화를 삭혔다.
"그럼, 제가 지내는 방을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이오?"
"아무리 천한 제 몸종이어도, 여자입니다. 다 큰 남자와 같은 방에 눈을 붙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흠, 그렇담 도령께선 다 큰 남자가 아니신 건가?"
"……."
"어차피 도령은 매일 몸종을 볼 것 아니오, 딱 하루만 내게 빌려주는 것이 그리도 아깝소? 그리고 내가 나쁜 짓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만 같은 곳에서 자겠다는 건데……. 따지자면 귀한 몸인 도령께서 굳이 사랑채를 내게 넘기고 몸종과 같은 방을 쓰겠다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소만."
바비는 칼 끝처럼 예리한 말을 툭 던지고 용화의 반응을 살폈다. 전과는 다르게 변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소매 안으로 주먹이 쥐어지는 게 보였다.
옥촉서는 이런 불편한 상황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서 참을 수 없이 괴로워졌다. 괜히 처음부터 바비를 완강히 내쫓지 못해 주인이 대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원하시는 쪽으로 하시지요."
"그래! 이제야 말이 통하는구만."
"하지만 날이 밝는 순간에 도령을 관아로 데리고 갈 것이니 그렇게 알고 계셔야 합니다."
"…관아? 도령, 설마 포도청을 말씀하는 것인가?"
용화는 말 없이 고갤 끄덕했다.
"미국에서 오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신변이 불분명하니."
"……."
"촉서야. 그리 나쁜 분인 것 같진 않으니 안심하고 오늘 밤만 방을 함께 하거라."
"예, 도련님."
그걸 들은 바비는 그에게서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 몸종은 순순히 대꾸했다. 크게 웃음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바비 도령은 탈 없이 돌아서는 용화의 뒤를 보고 잠깐 침묵했다. 옥촉서는 추운 날에 저고리 차림으로 오래 서 있었던 주인을 생각하며 온돌의 온도를 더 높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옥촉서는 용화에게는 한 없이 충성스러웠다. 몸종은 곧장 아궁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바비는 생각보다 넓지 않은 가옥을 주욱 시선할 뿐이었다.
옥촉서는 끝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주인이 내심 섭섭했지만 그래도 그만큼이나 몸종을 보호하려 하는 도령은 조선에서 찾기 드물 것이라고 생각하며 소소한 위안을 삼았다.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아궁이 앞에서 매운 기침을 토하고 있던 몸종이 어느 순간부터 드리워진 그림자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바비 도령이 신기한 표정으로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옥촉서처럼은 아니지만 나름 곱게 무릎을 꿇어 의지 있게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옥촉서는 그런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옆에서 낯선 언어로 감탄사를 남발하고 있는 바비는 도저히 신경을 끄고 무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이 쯤 되면 미국이란 나라가 대체 어떤 것을 가르치는 곳인지가 궁금해진다.
그렇게 한참을 나란히 아궁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불이 잘 올라갈 수 있도록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던 옥촉서가 문득 옆에 있는 바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무얼 하시는 도련님이세요?"
"음. 그건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그걸 묻는 소녀는 이름이 무엇인가?"
"…옥촉서입니다."
"오호. 그러고 보니 정말로 옥수수처럼 고소한 면이 있군, 그래."
그 말을 하는 바비의 목소리가 능글능글했다. 먼저 물은 저가 잘못이었다. 옥촉서는 한숨을 쉬며 이만 접었던 무릎을 펴 몸을 일으켰다. 부엌을 나가 허름한 행랑으로 향하는 몸종의 뒤를 바비가 바짝 쫓았다. 그리고 그의 입은 정말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갑자기 느닷 없는 웃음을 짓기도 하고 이상한 박자의 노래 한 소절을 뽑기도 했다. 바비의 뒷짐한 손 아래로, 볼록한 보따리가 흔들흔들했다.
문을 열자 따사로운 여인의 향기가 아닌 찬 공기가 먼저 바비를 환영했다. 방은 작고 누추했다. 그리고 차가웠다. 온돌의 능력이 여기까진 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옥촉서는 깜깜한 방을 밝히기 위해 아궁이에서 덜어온 작은 불씨를 촛대에다 붙였다. 방은 금방 환해졌다. 몸종은 매일 덮고 자는 이불을 구석에서 털고 바닥에 눕혔다. 바비 도령은 예상보다 수줍은 기색이었다. 부끄럽게 시선을 여기 저기로 돌리는 게 여간 정신이 사나웠다.
"…저는 천하니 이불 없이도 푹 잘 수 있습니다. 이불은 도련님께서 덮으셔요."
"어허! 무슨 그런 섭한 말을. 냉큼 내 옆으로 오시오."
그게 싫어서 일찍부터 이불을 포기했는데 바비는 속을 모르고 제 옆을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차마 그 말을 뇌까릴 수 없었던 옥촉서는 고갤 저으며 벽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 겁 먹은 몸 동작에 순간 장난스런 어떤 기질이 발동한 바비 도령이 급하게 갓을 벗고 입고 있는 도포의 고름을 난폭하게 풀어헤치는 척을 했다. 잔뜩 겁을 먹고 두 팔로 얼굴을 가리는 게 귀여워 소리 없이 웃고 있던 그가 거칠게 열리는 행랑의 문을 쳐다봤다. 몸종의 손이 찰싹 바비의 뺨을 메어치던 찰나였다.
비명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용화가 헉헉대며 몸종의 방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옥촉서는 그런 주인의 멍한 얼굴을 본 뒤에야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고 급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도련님! 다른 게 아니라, 이 분이 갑자기 저를 덮치려 하시기에…."
"소, 소녀! 장난 조금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대체 뭐가 되오?"
세 명 중 가장 당황한 건 바비였다. 불순한 목적 없이 그저 친해지고 싶어 행동한 장난이었는데 이런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상황을 연출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하던 용화가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바비 도령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고름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냥 내가 여기에 있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어떤 말도 부가하지 않았다. 용화 도령은 그 둘 사이에 털썩 앉으며 작은 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뜻하지 않은 삼자대면이었다. 옥촉서는 자신도 모르게 바비의 뺨에 손을 댄 것이 슬그머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용화가 따뜻한 감이 없는 바닥을 잠시 손으로 쓸었다. 그다지 분노하지 않는 모습에 바비는 입을 열었다.
"도령, 옥수수 밭에서 소녀를 데리고 왔소?"
"무슨 말입니까."
"아니, 이름이 그렇다길래 묻는 것이오."
"…옥수수 밭에서 이 아일 발견했더라면 더 좋은 이름을 붙였을 겁니다."
옥촉서는 옆에서 차분히 흘러나오고 있는 음성에 어쩐지 가슴이 쿵쿵거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몸종의 기억의 시작은 이 곳이었다. 눈을 뜨고 어려서부터 아주 당연하게 용화의 수발을 맡아 했을 뿐, 자신의 삶을 심각하게 파고든 적은 없었다. 그것을 지금 처음 알게 될 것만 같아서 옥촉서는 약간 두려워졌다.
바비는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더 말을 잇지 않는 용화 도령을 집요하게 쳐다보며 재촉했다.
"옥수수 열 다섯 자루를 주고 내 아버지가 데려왔습니다."
"…음, 그런 사연이."
바비 도령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화는 나른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초에서 옥촉서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몸종은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되어 조금 상처 받은 모습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새벽이 찾아오고 있을 것이다. 바비는 정말로 이 안에서 밤을 지낼 기세인 용화가 몸종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아주 묘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비는 답답한 갓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묶음한 보따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물건들을 거치는 손길을 용화와 몸종이 말 없이 쳐다봤다.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저렇게 색이 화려하고 모양이 특출난 것은 조선에서 팔거나 만들지 않는다. 용화는 그것들이 그가 가지고 온 미국의 문물이라고 단번에 생각했다. 바비의 손은 어느 한 염낭에서 멈추었다. 낯설고 어지러운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짜잔. 이것이 무엇인 줄 아시오?"
바비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용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비는 작게 웃으면서 음성을 낮춰 둘에게만 속삭였다.
"커피. 이것이 바로 커피라고 하는 씨앗이오. 갈아서 가루로 만든 것이지. 물에 타기 전엔 쓴 향뿐이지만 마시게 되면 잠을 쫓아주어 주로 공부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널리 쓰인다오."
"…미국에서 가져온 것입니까?"
"그렇소. 미국엔 커피 말고도 좋은 씨앗들이 많이 있으니 나중에 나와 한 번 갑시다."
"제가 왜 도령이랑?"
"싫음 말구."
염낭에 얌전하게 담긴 검은 가루는 머리를 아프게 했다. 바비는 방을 하루 묵는 값으로 그걸 용화에게 내밀었다. 용화 도령은 약간 의심스런 눈을 하면서도 넙죽 그걸 받아 챙겼다.
바비는 한참 보따리 안을 살피다가 무언가를 덜컥 집고 옥촉서에게 내밀었다. 빨갛고 동그란 통이었다. 무엇이냐고 묻는 눈빛이 호기심에 잔뜩 뒤덮여 있었다.
"먹으면 죽는 것이니 입엔 절대로 가져가지 마시오, 소녀. 그저 조금 울적해질 때 덮개를 열어서 숨결을 불어야 하는 것이오."
"입에 닿으면 죽는다니, 그렇게 위험한 걸 지금 내 몸종에게 주는 것입니까?"
"그렇게 위험해도 그만큼 예쁜 것이니 너무 화내지 마시오, 용화 도령."
얼떨결에 그로부터 선물을 받게 된 몸종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바비는 그냥 웃기만 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지 그는 자세를 고쳤다.
"실은 지금 미국에선 몇 년 전부터 신종 유행가가 돌풍이오. 내가 그 곳에서 이리내어怡理耐語 소속이 된 것도 다 그 유행가 덕분이었소."
"…이리내어? 그게 무엇입니까."
"기쁨을 다스리고 견뎌서 말을 창조하는 집단이오. 기존 조선에 있는 가락과는 판이하게 다른 소리들이지."
바비는 말을 마치고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지를 반 쯤 훌러덩 내렸다. 잘하면 속곳이 보일 것이다. 흉측한 모습에 용화 도령이 고함했으나 바비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소녀가 내가 무슨 사람인지가 궁금하다고 했소. 내 친히 알려주지."
"…아니, 이젠 별로 안 궁금하……."
"미국에서 새로 얻은 내 이름 바비! 소리를 비유한다는 아주 좋은 뜻을 가지고 있소."
"아니……. 도련님. 안 궁금하다…."
"내가 이래 봬도 미국에서 좋은 학문을 배우고 계신 블로 선생의 하나뿐인 제자라오! 날 이리내어 소속으로 이끌어주신 정말 권투적인 가사의 총명한 분이지."
바비는 정말 사람 말을 잘 무시했다. 잡아서 확 토끼 탕을 끓여버리고 싶다.
"드높은 조상께서 이르시길 무엇이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소. 내가 미래의 예정된 꾼인 것을 몰라 보는 소녀를 위해 한 가락 뽑아보겠소이다."
말릴 틈도 없이 바비 도령은 차림처럼 괴상한 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게 꼭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방 안을 막무가내로 활보하는 바비는 간간이 얼씨구를 외치며 심히 비정상적인 가락을 종알거렸다. 용화는 마음 속으로 이미 그를 관아로 패대기해 곤장을 때리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소녀와 나의 연결 고리! 얼씨구! 이것은 우리 둘이 내는 소리! 지화자!"
한바탕 난리 끝에 바비는 숨을 고르면서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정신적으로 거센 충격을 받게 된 옥촉서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빨간 통을 쥐어 몇 번 흔들었다. 바비 때문에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덮개를 열자, 투명한 물이 출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바퀴 같이 생긴 집게에 약하게 숨을 불자, 동그란 방울들이 생겨 하나 둘 방 안을 돌아다녔다. 예쁜 거품들이 시큼한 향을 풍겼다. 바비는 기쁨에 젖는 옥촉서의 얼굴에 만족하며 웃었다. 용화는 어지럽게 두둥실 떠오르는 방울들이 신기했지만 그걸 굳이 바비 앞에서 내색하고 싶진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걱정 마시오, 용화 도령! 도령이 겪은 억울한 것들을 양인들 모두가 안타깝게 여기고 있어 정 씨 가문을 일으키기로 입을 맞췄다오. 내가 도령과 소녀에게 힘이 되어주겠소!"
곤히 잠든 옥촉서에게 어깨를 내주고 있는 용화가 힐긋 그를 쳐다보며 고갤 끄덕였다. 작은 움직임에 몸종이 눈을 뜨는 일이 없도록 용화 도령은 정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초가 꺼졌고 방 안은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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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어제 그렇게 공지 글만 드리고 사라지기엔 너무 죄송해서 ㅠㅠㅠㅠ 예전에 구상하고 묵혔던 글 하나 가지고 왔어요!
정말 예~전에 써놓았던 거라 나중에 수정될 수도 있겠네요.
죄송한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서 포인트는 없슴미다..
단편이고 한 편마다 멤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시리즈에요. 그래서 일곱 편이 나오면 끝나요!
이 편은 미국에서 유학하다 온 능글능글 바비 도령 에피소드!!
한양이랑 같은 장르지만 상서로운 시리즈는 그렇게 분위기가 무겁지 않죠? 최대한 밝게 쓰려고 노력했어요 칭찬~~해~~주세요~~~!~!~!
굳이 정용화 씨를 집어넣은 이유는 나중에 찬우의 등장을 위해서... ㅋㅋㅋㅋ (스포)
그렇다고 정준하 씨를 등장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유부남이시니까... ㅎ... ㅋㅋㅋㅋ
그리고 옥촉서는 옥수수를 한자로 표기한 말이에요. 아이콘 = 콘 = 옥수수 = 옥촉서! 이런 공식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읽어주신 모든 분들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8ㅅ8...
암호닉 분들과 비회원 독자 님들 항상 항상 고마워요!! (손가락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