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곤해죽겠네."
" 진짠가보네.다크써클내려왔다,너."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퇴근시간이 비슷해 명수와 나란히 만나는 정류장안에서 밖으로 굵직굵직하게 내리는 장마비를 보던 우현이 명수의 목젖을 손등으로 툭 쳤다.
" 그렇게 박음질하고 오면 안 힘드냐 ? "
" 무슨 소리야."
" 발뺌하긴.새벽에 다들려,이 치와와같은 새끼야."
" 큼…들렸냐 ? "
'예쁜걸어떡해'하며 바보같이 웃은 명수의 모습에 우현이 한숨을 쉬며 축축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 예쁜건 김성규가 더 예쁘지… 예뻐서 죽겠다,진짜."
" 불쌍한 새끼…어쩌냐,성규형이 워낙 조신해서…"
" 닥쳐."
띠리링하는 알림음에 가방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우현이 씨익 웃으며 명수에게 문자 내용을 보여줬다. [ 비오는데마중나갈까? ]
" 쩔지."
" 별로."
괜찮다고 답장을 보낸 우현이 가방안에 도로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 하아…"
" 내 도움이 필요한가,친구 ? "
" 니 도움받아서 잘 된적이 별로 없어서 그닥…"
" 박력!!!!!!!! "
" 씨팔,깜짝이야."
갑자기 우현의 어깨를 내려치며 잡은 명수가 두 눈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박…력 ?
" 뭐 박력 어쩌라구…"
" 너는 말이야. 박력,박력이 없어. "
" 내가 왜 박력이 없어. 내가 힘이 얼마나 좋은데."
" 그건 무식하게 힘만 쎈거고 박력은 그거랑 다른거거든 ~ "
" 무슨. 버스 온다."
" 어,나 만원짜리밖에 없어.나까지 찍어주라."
" 두 명이요."
버스카드를 찍고 맨 뒷자리로 간 우현이 머리를 털며 가방안에서 성규가 넣어준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아냈다.
" 그래서 맨날 고딩처럼 키스만 할꺼냐 ? "
" 김성규 그런거 무서워해."
" 언제 해봤냐 ?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무서워하는지 어떻게 알아."
" 김성규 딱 보면 모르냐 ? "
" 무서운게 아니라 부끄러워하는거겠지. 무서울건 또 뭐야."
" 시끄러워."
" 쯧쯧."
'그러다 거미가 거미줄치겠다' 명수가 힐끗 우현의 앞섬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버스가 시원하게 빗줄기를 가르며 다음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절대 성규와 억지로 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성규가 준비가 됐을때,분위기도 받쳐줄때. 그럴때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데…
목적지에 멈춘 버스에서 내린 우현과 명수가 얼른 눈에 보이는 편의점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비닐우산을 집어들고 성규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계산대에 올려놓자 후다닥 달려온 명수가 와인 한 병과 포장된 치즈,그리고 핫바를 잔뜩 가져와 계산대에 얹었다.
" 핫바는 대충 알겠는데 그 와인이랑 치즈는 뭐냐."
" 널 위한 선물."
" 나 ? 너 나 좋아하냐 ? "
" 뭐래,미친놈. 성규형이랑 분위기 좀 잡아보라고 짜샤."
" 야. 김성규 술 못해."
맥주 한 잔에 바로 훅간다.
" 알고 산 건데."
" 야,내가 무슨 너처럼 발정난 애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하기 싫다."
" 누가 하랬냐 ? 그냥 분위기만 잡으라고.이 새끼 은근 앞서가네."
편의점 알바생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걸 깨닫고 얼른 계산을 한뒤 편의점을 나와 우산을 펼쳤다. 봉투안에 담긴 와인병이 꽤 묵직했다.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성열과 호원,동우가 느릿느릿 일어나 둘을 맞이했다.
" 장동우 넌 뭐타고 왔냐 ? "
" 나 ? 병원 앞에서 택시잡아타고 왔는데."
" 돈도 많다…. 김성규는 ? "
" 방안에.그 봉투는 뭐야 ? 와인같은데 ? "
우현의 손에 들린 봉투에 관심을 가지며 다가오는 동우의 머리를 밀어낸 우현이 냉장고 구석에 봉투를 잘 쑤셔넣고 방으로 향했다.
" 비 많이 오……"
" 이쁘지 ! "
" …… "
방안으로 들어온 우현이 멈칫하며 천장에서부터 곱게 내려와있는 핑크색 모기장을 천천히 훑었다.
" 이,이쁘네.색깔이 참… "
" 응응.이거 치고 자면 모기 안 물릴꺼야!"
" 그렇겠네…"
지금 날 시험하는겐가.
우현이 한숨을 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 왜 ? 맘에 안 들어 ? "
" 아냐. 밥먹자. 배고프다."
" 그래. 씻고 먹을래,아니면 먹고 씻을래."
씻으면서 김성규를 먹으면 안 될까.
" 금,금방 씻고 나갈께."
" 알았어. 얼른 씻고 나와."
성규가 싱긋 웃으며 방을 나가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금 보니까 모기장 윗부분에 장미 모양으로 박음질이 되어있는게 이게 모기장이 맞나싶다.
" 미치겠네."
속옷과 파자마를 챙긴 우현이 방안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
저녁을 먹고 난 뒤 6명 전부 거실에 모여 앉았다.
성규와 동우는 사과와 참외를 깎고 있었고 성열과 명수는 깎아놓는 과일을 족족히 먹어치우고 있었다.
동우가 내려놓은 사과조각을 얼른 포크로 집은 호원이 동우에게 스윽 내민다.
" 먹어. 너 하나도 못 먹었잖아."
" 역시 형밖에 없다니깐."
" …… "
호원이 건넨 사과를 앙 깨물어먹는 동우를 본 우현이 얼른 하나를 집어 성규의 입에 갖다댔다.
" 너도,먹어.사과."
" 아,괜찮은데…"
" 야,이성열. 씹고 삼키는 거 맞냐 ? "
" 그럼 씹고 삼키지 그냥 삼키나 ? "
" 내 말은, 좀 쉬엄쉬엄먹으라고. "
" 왜 잘 먹고 있는 애한테 그래."
성열에게 핀잔을 주자 명수가 성열을 감싸며 우현의 허벅지를 포크로 쿡 찌른다.
" 됐다,됐어. 야,김성규. 과일 그만 깎어. 들어가서 자자."
" 이거 마저 깎구."
" 됐어. 나 졸려. 들어가자."
" 난 아직 안 졸린데."
" 아, 말이 많다. "
성규의 손에서 과도를 잡아빼 쟁반에 소리나게 내려놓은 우현이 성규의 손을 잡아끌고 방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 아,남우현 존나 꼴깝."
" 저게 박력인가."
"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야,장동우 사과 좀 더 깎아봐. 왤케 느려."
명수가 포크를 쭉쭉 빨며 재촉하자 '니가 깎아먹어라.우리도 들어가자,동우야'하고 말한 호원이 동우의 손을 잡고 건너편 방으로 휙 들어가버린다.
" 에이.별 수 없지.내가 깎아야겠네."
" 너 칼질할 줄 알아 ? 불안한데. "
동우가 일어난 자리에 털썩 앉은 성열이 당당히 과도를 집어들었다.
" 성열아. 그냥 냅둬,내가 깎을께."
" 나도 할 줄 알거든 ? 자,봐.이렇게…이렇게… "
사과 살을 저렇게 다 깎아놓다니, 씨앗을 먹을 모양인가보다.
*
" 이게 왜 이렇게…끄응… "
아,뭔 시발놈의 나무조각을 이딴 식으로 쑤셔박아놨어.
우현이 땀을 뻘뻘 흘리며 와인병에 매달렸다.
" 아오,썅."
그냥 병 주둥이를 깨트려서 따라마시면 안되나.
우현이 인상을 쓰며 부엌 구석에서 낑낑대자 물을 마시러 나왔던 호원이 물잔을 들고 우현에게 스윽 다가왔다.
" 뭐하냐. 잔다고 들어가더니."
" 아,이게 잘 … 안 따지네요."
" …그걸 맨 손으로 하게 ? "
" ……그럼 맨발로 ? "
" 기다려봐."
싱크대 여기저기를 뒤지더니 와인 오프너를 꺼내 우현에게 건넸다.
" 그거 맨손으로는 절대 못 따. 이걸로 따야지."
" 와,형은 이런거 어떻게 알았대요.고마워요. 그럼 이걸로 이렇게……"
" …거꾸로 잡았어."
" 아,아.하하하, 왠지……"
우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코르크 마개에 와인 오프너를 갖다대고 삐뚤삐뚤거리며 돌리자 결국 호원이 와인 오프너를 잡아들고 몇 번 스윽스윽 돌리자마자 뻥 - 소리를 내며
코르크가 뽑혔다.
" 오올 !!"
" 됐지 ? 근데 와인은 갑자기 왜 ? 치즈도 있네 ? "
" 아,그냥… 좀…… "
" ……아아."
쟁반위에 놓은 두 개의 잔을 본 호원이 대충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었다.
" 마신 다음 다시 마개로 잘 막아놔야되는건 알지 ? "
" 네. 그럼 주무세요."
우현이 와인병과 쟁반을 들고 방으로 조심히 들어갔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원이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으로 무언갈 하고있는 동우에게 다가갔다.
" 뭐해 ? 일해 ? "
" …… "
" ……뭐야.게임이네."
" 아,죽었다.아,형이 말 걸어서 죽었어."
" 눈버려,얼른 꺼."
" 안 그래도 끄려고 했거덩요. "
노트북을 닫고 침대 옆 선반에 올려놓은 동우가 침대에 쏙 들어가 이불을 덮자 슬리퍼를 벗어 침대밑에 잘 맞춰놓은 호원이 불을 끄고 동우의 옆에 누웠다.
동우가 직접 사와서 붙힌 야광별들이 천장 한가득 붙어있다. 데코용으로 대여섯개 붙이고 마는 야광별을 마치 도배하듯이 천장 전체에 붙여놓은탓에 불을 껐음에도 불구하고 연두색 불빛으로 방안 전체가 은은하게 빛난다.
" 왜 오늘은 팔베게 안 해줘 ? "
" 무거워서."
" 에이."
" 진짜야. 새벽에 화장실가려고 일어났는데 깜짝 놀랬어."
" 왜 ? "
" 피 안 통해서 팔 한쪽이 새하얗더라고."
" 거짓말. "
" 믿기싫음말고.뭐, 저릿저릿하긴하지만 내가 희생해야지."
호원이 팔 한 쪽을 스윽 내밀자 동우가 얼른 베게에서 머리를 때 팔을 베고 누웠다.
" 벌써부터 핏줄 막힌 것 같네."
" 우하하학. 잘자요,굿나잇."
" 잘자라."
팔베게 해준 손으로 동우의 머리칼을 몇 번 쓰다듬자 그새 잠에 곯아떨어진다. 동우의 이불을 고쳐덮어준 호원이 뒤따라 눈을 감고 동우의 숨소리에 맞춰 서서히 잠에 들었다.
*
" 우웩."
" 왜 그래 ? "
" 이걸 뭔 맛으로 먹냐. 애기가 토해놓은거 먹는 것 같아."
포크로 치즈를 한입 떠먹어본 우현이 헛구역질을 하며 얼른 아이스크림을 입에 퍼넣은뒤 포크를 내려놓았다.
애기 토사물 냄새에 똥꾸렁내가 조금 섞인 맛이다. 도저히 먹을 음식이 아니되어보이는데 성규는 입에 맞는건지 잘도 퍼먹는다.
" 맛만 좋은데…근데 이거 술 아니야 ? "
" 이거 ? 아,이건 와인이야. "
" 와인도 술이잖아."
" 도수 낮은 걸로 사왔어."
" 그래 ? "
응,아마도 그럴꺼야.
" 나 술 못하는데."
" 한잔만 마셔. 이건 맥주처럼 안 쓴거야. "
" 으응…갑자기 술은 왜 ? "
" 갑자기 이런거 할 수도 있고 저런거 할 수도 있는 거지."
방안의 불을 끄고 스탠드만 켜놓으니 분위기가 한층더 야릇해진 기분이다. 스탠드 불빛을 받은 분홍캐노피가 정육점 핑크불빛 비슷한 색깔을 야시시하게 내뿜고 있었다.
" 음…진짜 달달하네."
문득 와인잔을 쥐고 있는 손을 본 우현이 성규의 손을 잡아살폈다.
" 헐,살 벗겨진 것 봐."
" 조금밖에 안 벗겨졌는데…"
" …… "
하얗고 보드랍던 손이 조금 거칠어지고 곳곳에 습진도 나버렸다. 내일 퇴근하고 오는 길에 핸드크림 좋은 걸로 하나 사와야겠다.
" 집안일 이제 조금만해. 이성열 시켜,이성열."
" 아냐,그냥 내가 하는게 편해… "
" …… "
" ……큼."
우현이 말없이 머리를 쓰담쓰담해주자 성규가 와인을 좀 더 홀짝거렸다. 뭔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성규의 옆구리,등,목 근육도 바짝 굳어있는 상태였다.
" …애,애들 다 자나 ? "
" 어. 다 자. "
" 아,그래… "
" …… "
" …… "
방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방안이 심각하게 조용한건지 성규 심장 뛰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 거,거실 에어컨 끄고 들어갔나."
성규가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일어나려하자 덥석 팔을 잡고는 다시 침대에 잡아앉힌다.
' 박력!!!! '
그래,이게 바로 박력!
명수가 해준 말을 곱씹은 우현이 천천히 성규의 어깨를 감싸잡았다.
*
늦어서 죄송해요 ㅠㅠㅠㅎㅎㅎ
댓글필수 ㅎㅎㅎ